마족형제 합작
나는 ~~ 할 수 있습니까?
질문에 대한 답은 예, 다. 당장 기억할 수 있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꿈으로 끝날 바람과 같은 단어라 생각했는데. 데몬은 앞마당을 가꾸던 손을 멈추었다. 슬슬 해가 하늘 높이 뜰 시간이다. 일어나서 허릴 폈더니 머리가 띵 하니 어지러웠다. 마당을 차지한 야채들이 많이 자랐다. 처음 이 곳에 자리를 잡았을 땐 돌밭에 불과했건만. 괜스레 감동적이다. 양껏 미소 지었다.
데몬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전투였다. 옛 영웅들의 뒤를 따라, 혹은 앞서나가서 스스로 동생을 베어버렸던 그 날은 데몬이 몇 백 년 간 손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던 무기를 스스로 내려놓은 날이었다.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동생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그렇게 소원했을 때 정말로 데미안은 눈을 뜨고 일어났다. 형아, 안녕. 데미안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를 가엾게 여기던 세계수가 마지막으로 어떤 장치를 해 놓은 것인가,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동생을 얼싸안고 우느라 바빴으니까. 동생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데미안은 죽었다 살아난 이후 한동안 말수가 줄었다.
이전에 검은 마법사에게 영혼을 팔았던 자들이 둘. 세상은 형제를 호락호락 놔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영웅은 당연히 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연합 또한 그리 기분 좋은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다시 검은 마법사에게 빌붙어 미래를 구걸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가 가까스로 하나 되찾은 동생이다.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다. 이번에는 반드시 내가 너를 지켜줄게. 소곤이 말을 건네는 데몬에게 데미안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설핏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데몬은 소리 소문 없이 기척을 지웠다. 어둑한 숲을 빠져나가던 데미안은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빛나는 반딧불이가 허공으로 상회하며 그 사이를 달려 나가던 동생의 모습이란.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눈물을 쏟을 뻔 했다. 데몬은 눌러 쓰고 있던 모포를 떨구었다. 깊디깊은 숲 속이었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달려 나간 동생을 따라 데몬 또한 달렸다. 볼을 베어내는 밤바람마저 기분 좋다. 형제는 숲 한복판에 누워 숨을 골랐다. 하늘 높이 뜬 달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형.”
“그래, 데미안.”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집을 구하자. 그리고 그 곳에서 함께 살자.”
“우리만 사는 거야?”
“응.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해지니까.”
“에이. 싫은데.”
“왜?”
“난 형이 결혼해서 오순도순 사는 게 보고 싶다고.”
슬쩍 본 동생이 흐, 하고 웃었다. 옛 집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위치는 알려질 대로 알려 졌고, 가족이 죽은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리프레 숲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없었기에 데몬의 옷에 붙어있던 보석 몇 가지를 헐값에 팔았다. 사실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조금 생긴 돈으로 외투를 사서 동생에게 입혔다. 꼬질꼬질한 붉은 머플러가 눈에 걸려 그것 또한 새로 사 줄 생각이었으나 극구 거부했기에 한번 세탁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리프레의 숲 깊고 깊은 곳으로 향한다. 몬스터가 출몰한다는 표지판을 두어 개 지나, 그나마 사람 살 만한 폐가를 발견 한 형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후엔 뭐.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비가 한참을 내리던 날엔 여기가 야외인지, 집 안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쫄딱 젖은 데몬을 보고 데미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비 새는 곳을 틀어막고, 바람이 들지 않도록 판자를 덧대고, 누더기 같은 집에서 사람 냄새가 날 즈음에 데몬은 마을에서 채소 종자와 책을 사들고 왔다. 지속적으로 얼굴을 노출해서야 마족 출신인 것을 들키지 않겠느냐며. 데미안은 데몬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앞마당을 작은 텃밭으로 바꾸는 과정에서는 투덜거렸다.
“농사는 처음 지어본단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진걸.”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
잔뜩 까진 손을 보고 울상을 짓기에 그날 저녁 자는 틈을 타 약과 반창고를 붙여주고. 처음으로 수확에 성공한 감자는 그저 그런 맛이었다.
“우리 감자만 먹게 되는 거 아니지?”
“걱정하지 마.”
“진짜?”
“당근도 심었어.”
“....”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동생은 그 날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토끼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 외엔 특별히 커다란 사건이 없었다. 몬스터는 집 주변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처음에는 몇 마리 보이기도 했는데, 본보기 삼아 정리한 이후로는 소문이라도 퍼진 듯 싶었다. 데몬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계속해서 기를 이유가 없다 말했더니 데미안은 아깝다고 잘린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사람 살 만한 곳이 되어간다 싶었다. 외부와 연락을 끊은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다 생각이 되었을 때 데미안과 데몬은 옛 집에 다녀왔다. 그을린 가족사진을 챙기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어린 데미안이 아꼈던 의자를 집었다.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건 왜 챙겨?”
“네가 좋아했었잖아.”
“아, 그랬던가.”
데미안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했다. 나 이젠 그렇게 작지 않은걸. 의자는 어린아이의 체형에 맞추어져 있었다. 데몬이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장식용으로 놔두게. 엄마 사진이랑 꽃병 정도는 올려놓을 수 있을 거야.
데미안도 데몬도 별다른 대화를 하진 않았다. 워낙 말이 많았던 동생인지라 왜 이렇게 말 수가 적어졌나 궁금도 했었다. 그러나 굳이 묻지 않는다. 형제 사이에 쌓인 시간도 동생 쪽이 일방적으로 길었고 아슬아슬히 빗겨나간 평화의 실금을 건드려 깨트릴 걱정이 앞섰다. 어느날은 데미안이 제안을 했다. 형, 우리 소풍 가지 않을래? 옛날처럼. 데몬은 눈이 왔던 날을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그래. 그러자. 옛날처럼.
집에서 먼 곳이 아니었다. 몬스터의 구역을 침범할 위험도 있었고 햇빛이 드는 곳도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데미안은 저벅저벅 걸어 동그랗게 퍼진 빛의 한복판에 벌렁 드러누웠다. 눈부시다. 데몬은 데미안의 옆에 앉았다.
“데미안.”
“응. 형.”
데몬은 질문을 하기 전 잠깐 망설였다. 혹시나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행복하니?”
한참 대답이 없다. 데몬은 말라오는 입 안에 가까스로 침을 꿀꺽 삼키고 슬쩍 동생을 훔쳐보았다. 순하게 웃는 입이 목소릴 낸다. 정말로.
“행복해요.”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손가락으로는 한참 긴 데몬의 머리카락 끝을 꼬아 빙빙 돌렸다. 무릎 위에 살풋 올려놓은 머리의 무게가 묵직하다. 옴폭하게 진 치마 주름을 꾹꾹 눌려 폈다. 얼굴을 가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눈과 이마에 걸친 무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데몬은 깨어나지 않는다.
정말, 가엾게도. 미래의 문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녀 안으로 걸어들어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원을 들여다보는 것도, 환상을 보여주는 것도 더 없이 쉬운 일이다. 간단하다. 데몬은 갑자기 밀려온 졸음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곁을 맴돌던 고양이는 쫒아내 버렸다. 잠든 데몬을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 꿈속에 가두어 놓기로 했다. 이미 없는 동생을 만들어 내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추억을 만들어 순환시키면서. 옛 군단장에게 표현하는 예의이기도 하고, 어쩌면 지독한 비꼼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초라한 무덤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두 개 씩이나. 컴컴한 심연 속에서 데몬을 끌어안은 루시드가 흐, 하고 웃었다. 행복해요. 정말 정말로.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습니까?
질문에 데몬이 한 대답은 ~~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