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

제목이 없는 합작

청주산코알 2016. 5. 14. 00:58




*원피스 사보





-사보, 거기서 뭐해?

질문을 받았을 때 사보는 마땅히 대답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본인이 어째서 배 갑판으로 나와 가느다란 난간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다에 비친 밤 하늘을 금방이라도 빠져들 것 처럼 보고 있었는지 사보 그 자신도 몰랐다. 분명 아주 방금전 까지도 방 안에서 에이스의 얼굴이 인쇄된 신문 1면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파자마 차림으로 나와있는 건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답을 종용하는 눈빛을 보내는 코알라에게 그녀가 원하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대신 웃어보였다. 기억이 돌아온지 일주일 하고도 몇시간이 지난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밤의 망망대해는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파도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이어지는 바다는 날카로운 이를 감추고 마치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밤하늘의 별을 비추었다. 잔잔한 바다의 표면에 반사되는 별들의 행진은 어린 마음에 보기엔 말을 잃을 정도로 대단해 하늘이 위에도, 아래에도 있는 것 같다고 어렸던 자신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더랬다. 배 위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어떤 뱃사람은 당연히 매일매일 보는 광경이니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러니 우리는 바다뿐만이 아니라 넓디넓은 하늘까지 항해하는 인간들이 아니겠느냐며 호기롭게 웃는 이들도 있었다. 각자가 왁자지껄 떠드는 말을 뒤로 하고서도 사보는 한동안 별을 수놓는 바다로부터 눈을 떼어놓지 못했다. 어떠한 상상을 하던 가뿐히 뛰어넘는 광경은 차고도 흘러넘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럼에도 끝없이 부족한 듯 마음 한구석을 서늘하게 훑는 감정을 느끼며 어린 자신은 무엇을 생각했었는가. 그의 고민과는 관계없이 제 할일을 하는 바다가 물살을 밀어 올렸다. 배의 몸체에 부딪혀 사르르 퍼지는 파도가 별빛을 반사하며 달콤하게 흩어졌다. 코알라가 사보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녀의 둥그런 눈매는 기억 저편에서 바보같이 웃고 있던 남동생을 닮았다. 사보가 말했다.

“나 안 떨어져.”

코알라는 대답이 없었다.

 

이제는 세상에 남은 둘만이 기억하고 있을 옛 이야기다. 사보는 제 딴엔 나름대로 마음씨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도적들에게 형제들의 얼굴을 빌어 몸을 의탁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 형제들의 웃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돌아볼 것 같은 지금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유년시절을 아름답게 가꾸어 주었던 형제들과의 추억 속에는 즐거운 일이 많았다. 물론 즐거운 일만큼 괴로운 일도 많았다. 마음은 이미 바다로 향해 자유를 찾아 모험을 하고 있었지만 몸뚱이는 어린아이에 불과해 어른에게 맞서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온몸에 피딱지와 생채기를 덕지덕지 달고 다니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아픔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었던 때였다. 술잔으로 맺어진 형제사이는 실제 피로 맺어진 형제들의 관계보다 더 깊고 두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제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가장 뚜렷이 떠오르는 기억을 고르라면 두 손가락을 다 동원하고도 모자라 한참을 고민하게 할 만큼 참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어느 여름에는 루피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보물을 찾았다며 함께 모험을 떠나자고 했다. 그래봤자 숲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에 불과했지만. 루피의 작달만한 발걸음을 따라 향한 곳에는 두 명이서 손을 잡고 껴안아도 품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커다란 벌집이 있었다. 에이스와 자신은 그것이 벌집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지만 어린 루피는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듯 왜 도망을 쳐? 하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고 곧이어 울며 우리를 쫒아오는 루피를 위해 우리는 갔던 거리를 되돌아 루피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인생에 더 이상 뜀박질은 없어도 될 것처럼 한없이 달렸다. 눈앞은 저 밑에 강이 졸졸 흐르는 절벽이오 뒤로는 소름끼치는 앵앵 소리를 내는 벌들이 쫒아오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우리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와 에이스, 루피는 강물로 뛰어들었고 다리에 쥐가 난 에이스와 악마의 열매 능력자였던지라 당연한 것처럼 무능해지는 루피를 끌고 나 혼자 간신히 강의 둔치로 올라 올 수 있었다. 여름날이었음에도 몸을 담근 강물은 이가 딱딱 부딪히도록 차가워 우리 셋은 덜덜 떨며 연달아 재채기를 했다. 우리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을 많이도 경험했고, 작은 동생이 발견했다는 보물은 그 경험의 횟수에 당당히 한 획을 긋게 해주었다. 에이스가 생각좀 하고 살라며 루피의 말랑하고 작은 머리통을 때렸고 루피는 아프다 외치며 에이스의 손을 깨물었다.

 

온 힘을 다해 도망쳤던 통에 이미 머무르고 있던 집에서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떨어져내려왔던 절벽을 다시 기어 올라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강을 따라가면 뭐가 나올지 짐작하기도 조심스러웠다. 나는 우리가 꼼짝없이 조난 비스무리 한 것을 당했음을 깨달았는데 -숲은 우리의 놀이터와 같아서 조난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에이스와 루피가 이런 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하는 것에 홀린 듯 나 또한 별일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길을 잃었으면 찾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고 우리에겐 길을 찾아내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사전에 회의를 마친 듯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우리는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었다.

-배고파.

루피가 배고프다고 말을 꺼내기 시작할 즈음 해는 서서히 붉게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고.

-나도.

에이스마저 배고프다 말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수평선을 넘어가고 어둠이 얇게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주변에 먹을 것이라곤 강물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앞뒤 분간도 가지 않게 된다면 잡을 수도 없을 터였다. 물속에서는 한없이 무능력에 가까워지는 동생을 대신해 할 수 없이 나와 에이스가 송사리 몇 마리를 잡았다. 잡고 보니 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생채로 먹을까 잠깐의 고민을 한 끝에 아쉬운 마음으로 한 끼 식사가 되었을 물고기를 놓아주었다. 입맛을 다시며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 작별을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엔 이미 해가 완전히 지고 골짜기를 따라 다가온 어둠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잘만한 곳도 녹록치 않아 우리는 등이 배기는 것을 감수하며 강과 절벽이 이어지는 틈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루피에게 다 너 때문이니 조용히 하고 자라며 에이스가 윽박질렀다. 루피는 금세 풀이 죽었다. 나는 두 형제의 모습에 웃었다.

 

등을 찔러오는 돌멩이들의 공격에도 에이스와 루피는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잘만 잤다. 나는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토록 잠은 오지 않아 형제들의 곁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 보았던 광경은 마치- 바다와 같아서. 바다라는 이름의 자유를 동경했던 시절, 나는 하늘에서 꿈꾸던 자유를 보았다. 반복되는 밤마다 보아왔던 광경임에도 검은 식탁보 위에 설탕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거렸던 밤하늘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가 없다. 손 뻗으면 잡힐 것처럼 가까이에 있는 듯 하면서 결코 잡히지 않는 동경의 파편들. 목이 뻐근하도록 한참을 올려다 보다 뒤척이는 소리에 옆을 보니 동생이 졸음에 겨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으며 가슴께를 토닥거려 주었다. 아이도 희미하게 웃곤 다시 잠들었다. 물가 근처라 서늘한 바람은 냉기를 품고 내게 와 부딪혔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형제들이 곁에 있었기에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최근 알아채게 되었다. 마치 눈앞에서 자길 잡아달라며 떨어질 것만 같았던 당시의 별처럼 손만 뻗으면 쥘 수 있을 것 같은 과거의 기억은 내게 이토록이나 찬란하다. 폭격을 맞고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아가던 그 때 어두워지는 시야와 함께 내 시간도 별을 볼 수 없는 밤하늘 속에서 멈추었다.

 

-사보.

-응.

-사보.

-왜?

-이제 슬슬 들어가야 겠단 생각이 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코알라는 아직도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흡사 금방이라도 바닷물에 뛰어들 것 같은 자살희망자를 보고 있는 눈이라 나는 손을 뻗어 코알라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하지 말라고 짜증내는 것에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쓰다듬자 반항하는 움직임이 줄어들었다. 항상 제멋대로지. 불퉁하니 입술을 내민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타고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혹여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릴까, 조금이라도 희미해지거나 사실과 달라지는 일이 있을까 품속에 껴안고 내보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또래 동료들을 보며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던 적도 있다. 죽음을 한끝차이로 피한 사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너덜너덜해진 이름밖에 없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나이는 어렸지만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갓 태어난 신생아와 다를 것이 하등 없었다. 떳떳하게 과거를 밝히는 사람들을 피해 어두운 구석에 숨어서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감는 일이 자주 있었다면 꽤 자주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혁명군의 일에 매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뒤를 돌아볼 틈이 있었던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은 돌아볼 뒤조차 존재하질 않아 좋던 싫던 억지로 앞만 보는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강해지자, 나를 구해준 사람에게 도움이 되자,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자. 비어있는 과거를 메울 틈은 나 스스로 정했다. 강해지기 위한 훈련에 매진하면서 때때로 바다를 보면 찾아오는 그리움- 혹시 과거에 나는 바다와 관련된 인물이 아니었을까 의심이 될 정도로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는 소금기를 포함한 그리운 무언가가 있었다. 조금만 집중하면 크게 들릴 것 같은 웃음소리, 갑판을 뛰어다니는 듯 조그마한 발소리와 내게 속삭이는 목소리. 무엇이 문제였는지 몰랐다. 이것이 내 기억의 끈일까 어렴풋이 생각을 하면서도 사춘기가 온 탓이라 말하는 어른들의 말을 받아들이며 끊어지지 않는 그리움을 따라 머나먼 바다를 흘끔 보는 것으로 공허함을 대신 할 뿐이었다.

-넌 옛날에도 그랬어.

옆을 돌아보니 찬 밤바람에 코알라의 볼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만날 바다를 봤잖아. 왜 그렇게 바다를 보느냐는 말에는 제대로 대답도 안 해주구.

-나도 왜 바다를 보는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대답을 안 해 주잖아.

-지금도 왜 바다를 보는지 모르겠는걸.

코알라가 이해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난 네가 옛날 일을 떠올린다고 생각했는데?

-옛날 일?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나는 멍하니 코알라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볼 때마다 그리운 눈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기억이 없을 때에도 말야.

 

나는 자유를 동경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 없음에도 그저 내가 혼자 해 나아갈 수 있는 것, 부모님에게서 벗어나는 것, 나를 구속하는 것에서 벗어나 꿈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했다. 막연한 동경은 꿈이 되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이 그곳에서 멈춤과 동시에 기억과 꿈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가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에이스. 나의 소중한 형제. 에이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오보일 가능성도 있다. 줄줄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래곤 씨에게 말했더랬다. 사실은 극심한 부상일 수도 있다. 확인을 잘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살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흰 수염과 세계정부의 싸움, 동시에 에이스의 죽음은 전 세계에 생중계가 되었다는 것을. 분노를 멈출 길이 없었다. 에이스가 죽어가는 순간조차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 받았으며 구경거리가 되어 손가락질 받았다는 생각에. 또한 그 순간 자신이 곁에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이 되어 온몸을 짓눌렀다. 며칠을 앓고 며칠을 비명 속에서 지냈는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나를 코알라를 비롯한 혁명군 동료들이 붙잡지 않았으면 나는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다 속으로 수장되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리워했구나. 내가.

꿈을 잃고 살았던 시절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언제나 내 꿈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 나의 형제들과 함께 맹세한 꿈을. 반드시 자유로워지자. 세상에서 아무나 붙잡고 가장 자유로운 사람을 묻는다면 당연한 듯이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밤하늘을 유영한다고 해도 의심조차 못하게,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되자. 그때에는 정상에서 셋이 다시 만나 본인들이 겪어온 숱한 모험 이야기를 하자. 언제나처럼 악어고기를 먹으면서 말이야. 어린 시절에 루피가 사고친 얘기도 곁들여서. 분명 꿈을 이루는 건 즐거울 거야. 이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둘밖엔 남아있지 않지만.

 

에이스의 죽음은 내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해 주었다. 머나먼 과거 속 루피를 만나기도 이전에 하릴없이 쓰레기를 뒤지고 있던 나에게 에이스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곳에서 뭐해? 라고. 그렇게 얽힌 인연은 형제의 연이 되어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금까지도 에이스는 내게 손을 내밀어 준다. 거기서 뭐하냐? 바보야. 라고 웃으며 가라앉은 나와 내 꿈을 붙잡아 주었다. 뭘 하긴, 널 만나러 가야지. 나는 또다시 손을 뻗어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코알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체념 했는지 가만히 곁에 서있는 그녀를 보며 작게 웃었다

-들어가자.

 

 

 

남아있는 나의 형제 루피. 멈추지 못한 채 끝을 모르고 달려 나가는 그리움은 에이스만으로도 감당 못할 만큼 충분하다. 남아있는 나의 유일한 형제를 두 번다시 잃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