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캇데쿠] 나비소년

개인작 2016. 9. 27. 21:22


1.



미도리야 이즈쿠는 몸이 아팠다. 원인은 모른다. 태어났을 당시의 몸무게는 3.15kg으로 또래보다 적당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게였다. 성장 과정은 평탄했다. 지금 미도리야 일가의 가족 앨범을 들여다보면 외아들 미도리야가 활짝 웃고있는 가족 사진이 한가득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미도리야는 원인 모를 빈혈을 앓았다. 엄마. 나 머리가 아파. 모친은 단순한 두통이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아프다 칭얼거리는 아들과 함께 소아과를 찾아가도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어른이 먹는 진통제를 한 알 깨어 먹였다. 

어느 날은 배가 아프다 했다. 하나 있는 아들이 혹시 관심을 끌기 위해 아프다 거짓말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았으나 하루 종일 화장실에 가서 나오지 않고, 나와보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모습을 보고 단숨에 의심은 사라졌다. 대학 병원으로 갔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모친은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원무과 앞 줄을 서서 기다렸다. 미도리야는 그동안 병원 로비의 의자에 앉아 벽걸이 TV에서 나오는 놀라운 세상 따위의 프로그램을 봤다.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미도리야에게 관심을 보였다. 꼬마야. 혼자 왔니? 미도리야는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말라는 모친의 신신당부를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엄마랑 같이 왔어요. 허둥지둥 지갑을 뒤지는 어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아주머니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차례를 기다리는데 한참이 걸렸다. 간신히 소아과 진료실로 들어섰더니 의사는 차트를 몇 번 성의없이 넘긴 후 미도리야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차가운 청진기의 감촉에 미도리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도리야의 배를 문지른 후 똑같이 무성의한 말투로 채혈실로 가세요- 하고 말했다. 


"엄마. 채혈이 뭐야?"


모친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곧 알게 되었다. 정말 펑펑 울었다. 그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지만 커다란 주사기 안에 피가 슬슬 고이는 모습은 어린아이에겐 충분히 공포였으므로. 솜으로 팔 안쪽을 문지르고 또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엑스레이를 찍고 시티촬영을 했다. 모친의 표정이 점점 안좋아졌다. 처음 보는 기계가 무서워 울먹울먹 울음을 삼키던 미도리야의 손을 꼭 붙잡고 모친은 저녁으로 좋아하는 가츠동을 사 주겠다 약속했다.

검사 결과를 찬찬히 훑던 의사는 미도리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모친과 나누었다. 

이제 볼 일이 끝났다고 했다. 미도리야는 모친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가야."


의사가 미도리야를 불렀다. 내민 손에는 딸기맛 사탕이 놓여있다.


"뭐 해. 의사선생님이 주시는데. 받아야지."

"고맙습니다."


배꼽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했다. 딸기 맛보다 오렌지 맛이 더 좋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포장을 까지 않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저녁은 약속대로 가츠동이었다. 입 안으로 튀긴 고기를 집어넣는 아들을 가만 바라보던 어머니가 자신의 그릇 위에 놓여있는 고기조각 한 점을 아들의 그릇 위로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 

가게의 조명은 전구가 나가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었고 날이 저물어 주인 아저씨가 응원하는 구단의 야구 경기가 낡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 컵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엄마. 물."


모친은 한참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다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모친은 눈물이 많았다. 결혼 비디오에서도 한참 주례사가 주례를 읊을 때 울음을 터트리셨으니까. 기뻐서 흘리는 눈물, 놀라서 흘리는 눈물, 슬퍼서 흘리는 눈물,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 가지각색의 눈물이 있다고 늘상 말 하셨다. 

어두워진 바깥의 가로등이 켜졌다. 미도리야는 소스에 비빈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집어넣으며 보챘다. 아빠 오겠다. 엄마. 우리 빨리 먹고 가자. 모친은 티슈곽에서 싸구려 휴지를 뜯어 눈물을 훔쳤다. 그래. 아빠 보러 가자. 

모친이 계산대 앞에 서 낡은 동전 몇 개를 올려 놓았다. 미도리야는 듬성듬성 스티커가 붙은 가게 문 너머로 바깥을 구경했다. 미도리야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이가 노래를 불렀다. 제멋대로 가사를 붙인 가요의 흥겨운 곡조가 거리 위에 수런히 묻혔다. 




*




약을 많이 먹었다. 모친이 약국에서 얻어온 봉투더미를 펼쳐 놓으며 열심히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건강해진다고 말 했다. 미도리야는 아침, 점심, 저녁이 쓰여져 있는 봉투를 집어들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전부 다 먹어야 해?"

"그럼."


모친은 종이 가방에서 갈색 병 하나와 하얀색 병 하나를 더 꺼냈다. 


"여기 두 약도 먹어야 해. "


비타민이니까 꼭꼭 챙겨먹어야 한다. 이즈쿠. 미도리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알약을 먹는 것도 가루약을 먹는 것도 고역이었던 나이인지라 입 안에 물과 약을 한꺼번에 물었다가 몰래 화장실로 달려가 약을 토해내는 날이 꽤 있었다. 모친이 네 번째로 그 광경을 발견한 이후로 미도리야는 모친의 앞에서 약을 삼켜야 했다. 




*




좋아하는 만화 주제가를 부르며 걸으면 한 곡이 끝나기 전 또래 아이가 살고있는 집에 도착했다. 이름은 바쿠고 카츠키. 동네의 골목대장이자 부모님들끼리 알고지내는 사이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까진 때로 미도리야가 노올자 불러내기도 했고, 바쿠고가 미도리야 집 초인종을 누르며 노올자 부르기도 했다. 

자주 어울려 놀았다. 별 다른 것을 한 건 아니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던가, 몇 명 아이들을 더 모아 술래잡기를 하거나 아니면 주택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악당을 무찌른단 만화 영화 주인공 놀이를 했다. 키가 가장 작고 기가 약했던 미도리야는 항상 악당의 하수인A 역할을 맡았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미도리야가 쓰러진 것은 여름의 초입, 한참 기온이 올라갈 때 였지만 밤이 되면 춥다며 부모들이 자식에게 아직도 가디건을 입혀 밖으로 내보낼 무렵이었다. 미도리야는 초록색 후드티와 그 위에 조끼를 입고 나왔다. 비오듯이 땀을 흘리며 언제나처럼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바쿠고 원정대 구호를 외치고 다니던 미도리야는 일순 하늘이 핑글 도는 경험을 했다. 어라. 걸음을 멈추어섰다. 앞서가는 무리는 멈추지 않았다. 구호소리가 작아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나보다. 

아스팔트 길에 잠깐 서 있다가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다. 추웠다. 아직 해가 머리 위에서 쨍쨍 내리쬐고 있는데도 그랬다. 금새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 엄마아...


저절로 겁이 났다. 너무 춥고 무서워 몸이 덜덜 떨렸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 그러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내가 돌아는데 이젠 괜찮다? 눈을 껌벅이고 이상하다 생각한 미도리야가 친구들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 위로 머리를 찧었다. 기절.




.

..

...

"이즈쿠. 오늘 아침에 약 안 먹었니?"

"먹었어. 엄마."

"그럼 점심 약은?"

"..."


미도리야가 입을 다물었다.


"하얀 병에 있던 것도 안 먹었지?"

"..."

"대답해."

"안 먹었어."

"엄마가 먹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들어."

"약은 쓰단 말이야. 왜 나만 약을 먹어야 하는데? 다른 애들은 약 같은거 아플때만 먹는데. 나는 안 아파도 약을 먹잖아."


불만을 토로한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였다. 근데 엄마.


"왜 불을 껐어? 벌써 밤이야?"





정확한 원인을 의사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검사를 해 보았을 때 별다른 이상은 없고 비타민 수치만 조금 떨어져 있다고. 햇빛이 강해 블라인드로 가려놓았음에도 빛이 새어들어왔다. 


그럼 제 아이가 왜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먹이라는 약 전부 먹였는데 왜 아픈거죠? 

일시적인 실명 현상일 겁니다. 금방 돌아올 거에요.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 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나요? 

가벼운 열사병일수도 있으니, 어머님 일단 진정을.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미도리야는 병실에서 홀로 눈을 깜박거리며 (아마도)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캄캄한 밤이네. 하나도 안 졸린데. 엄마 오면 불 켜달라고 해 봐야지. 




*




몸 만한 노란 가방에는 아침 점심 약이 반드시 들어갔다. 모친은 미도리야가 등교를 하기 전 항상 물었다.


"이즈쿠. 학교에 가면?"

"아침 약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점심 약을 먹는다."

"항상?"

"차 조심."


모친이 미도리야를 꼭 끌어안았다. 

잘 다녀오렴. 미도리야도 모친을 마주 끌어안았다.

잘 다녀올게 엄마.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도리야는 학교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 하는 편이었다. 학기 초에 길을 걷다 난데없이 쓰러져 며칠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반 안에 들어오니 벌써 다들 짝을 지어 사이좋게 수다를 떨고 있더라. 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반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미도리야는 쭈뼛쭈뼛 빈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유일하게 신경을 써 주는 것은 반장 뿐이었다. 

수업시간엔 전 날 챙겨오라는 준비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창피를 당하고 쉬는 시간엔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 틈에 끼지 못해 외톨이 신세였다. 어수룩하게 학급 문고가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고르는 미도리야의 뒤에서 소꿉친구인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이름을 길게 외쳤다.


"데-쿠. 또 쓰러져서 병원에 갔다왔냐? "

"카, 캇짱."

"넌 지인짜 약골이구나."


바쿠고의 주변에는 항상 또래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바쿠고는 언제나 재미난 것을 들고 학교에 등장했다. 사슴벌레, 나비 유충, 유리구슬, 하다못해 박음질이 잘못 된 신발까지(미도리야의 것이었다) 항상 당당하고 거침없는 바쿠고는 남자아이들에겐 우상이었고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마냥 악동짓만 하는 것은 또 아니라 보는 쪽지시험에서 항상 일 등, 중간평가에서도 전교에서 손에 꼽게 좋은 성적을 받았다. 선생님들이 바쿠고를 예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바쿠고의 모친은 항상 그런 말을 들었다. "카츠키가 말썽을 많이 피우기는 해도 참 착한 아이입니다."

반면에 미도리야의 모친은 이런 말을 들었다. "이즈쿠가 수업 진도를 따라오지 못 합니다, 수업에 필요한 준비를 잘 해오지 못해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주 오후 수업을 빠지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는걸. 


다른 학년에서도 바쿠고가 있는 반에 이따금씩 놀러오곤 했다. 물론 같은 반인 미도리야가 있는 그 곳. 학기 초만 해도 언제 소꿉친구였나 미도리야를 무시하고 쌩쌩하게 패거리를 이끌고 재밋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던 바쿠고는 여름방학이 슬슬 다가올 무렵 학교의 모든 개구멍과 비밀스러운 창고를 정복했다. 




"아. 심심해."


입술 위에 연필을 올리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바쿠고의 눈에 마침 가방 안에서 약을 꺼내는 미도리야가 들어왔다. 자리가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아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앞에 앉아 있었다.


"야. 데쿠."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그 별명으로 불렀다.

"그거 뭐냐? 가방 안에 있는거."


미도리야가 점심 약을 꺼내다 말고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이,이거?"
"그럼 그거말고 또 뭐가 있는데."

"약이야. 병원에서 받은 약.

"쓰냐?"

"약이 쓰지..."

"줘 봐."

"어?"


바쿠고가 짖굳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줘 보라고.





괴롭힘을 당했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에게서 약봉지를 빼앗아 들어 뜯어냈다. 


"하나, 둘, 셋, 넷, 우와. 너 무슨 약을 이렇게 먹냐?"

"돌려줘."

"이걸 다 먹는거야? 안 배불러?"

"돌려줘!"


미도리야가 소리를 질렀다. 약을 털며 이리저리 뒤져보던 바쿠고가 동작을 멈추고 제 앞의 소꿉친구를 노려보았다. 반 안이 조용해졌다. 알게모르게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바쿠고는 비죽 비뚠 웃음을 지었다.


"누가 안 돌려준데? 잠깐 보기만 한 거잖아."

"나 그거 먹어야 해. 돌려줘 캇짱."

"돌려줄게. 돌려 준다고."


손 끝에 약봉지를 달랑이며 말 하는 바쿠고는 말 내용과는 다르게 전혀 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미도리야가 낚아채듯이 손을 휘둘렀다.


어이쿠.


재미있는 놀이다. 바쿠고는 새로운 놀잇감을 찾았다. 우스꽝스레 몸의 중심이 기운 미도리야를 보고 바쿠고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거야 데쿠. 완전 꼴사납잖아! 바쿠고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웃음을 터트렸다. 침묵을 폭소가 밀쳐내고 반 안을 가득 채운다. 바쿠고는 그래 그래 돌려줄게- 라고 발음을 길게 끌며 말 하더니 저벅저벅 아이들을 밀치고 창가에 섰다. 


"나는 분명히 돌려줬다."


약봉지는 툭 떨어졌다. 창문 밖으로. 미도리야가 울상을 지었다. 단박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뒷문을 따라 지독한 웃음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쫒아왔다. 

약 봉지는 화단 안에 있었다. 다행이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하얗고 특유의 비린내를 가진, 우유였다. 미도리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빈 우유곽을 쥔 손 두개가 창문 안으로 쏙 들어간다. 머리카락과 턱을 타고 우유가 뚝뚝 떨어졌다. 계단을 올라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모두 못 본 척 고갤 돌리고 제멋대로 떠들었다. 미도리야는 말 없이 자신의 의자에 앉으려 했다. 했는데.


"아악."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를 돌아본다. 바쿠고가 모른척 교과서를 들어다보고있다. 어디서 픽, 하고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마."


미도리야가 울먹임을 담아 말했다.


"해지매애~"


누군가가 비아냥을 담아 미도리야의 말투를 따라했다. 미도리야가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야 데쿠."


바쿠고가 시침을 뚝 떼고 어른의 근엄한 말투를 따라했다. 


"너 냄새나."


코를 싸쥔다. 미도리야는 교실을 뛰쳐나와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날 때 까지 학교 교정의 뒤편에서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떼웠다.




바쿠고는 수업시간엔 아닌 척 미도리야의 머리 위로 지우개 가루를 던져댔고 쉬는 시간엔 책을 못 읽도록 일부러 뒤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허튼 짓을 했다. 그 때마다 미도리야는 비명과 울음을 꾹 삼키고 묵묵히 참아냈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바쿠고의 관심은 금새 식었다. 

어느날 미도리야가 등교를 하자 바쿠고의 옆 자리에 있던 짝(쉽게 말해 똘마니)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쿠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바쿠고. 데쿠 왔다 데쿠. 바쿠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도리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픽 고개를 다시 돌린다.


"아 재미없어."


괴롭힘은 그렇게 어이없이 끝났다.


"야 그보다 너네 집에 새 게임기가 들어왔다며. 나 그거 보러 가도 되냐?"

더 이상 아무도 미도리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잘 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바쿠고와 미도리야의 집 방향이 같다는 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모친에게 부탁을 받았고 제 어머니에게도 신신당부를 들었다. 이즈쿠는 몸이 아프니 네가 꼭 가방을 들어주라고. 알게 뭐야. 내가 그딴걸 꼭 해야 해? 앞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저런 데쿠같은거. 미도리야는 노란색 가방 끈을 꼭 쥐고 느릿느릿하게 바쿠고의 뒤를 따랐다. 


"야 데쿠. "


교정 문을 나서자마자 뒤를 돈다.


"으응?"


곧 묵직한 가방이 미도리야에게로 날라왔다. 


"그거 네가 들어."

"하지만 이건 캇짱 가방인데."

"그래서."

"아니, 캇짱 건데 내가 왜."

"싫어?"


눈을 부라리며 말 하면 누가 싫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미도리야는 뒤엔 노란색 가방, 앞엔 빨간색 가방을 끌어안고 묵묵히 걸었다. 느리게 걸으면 길어야 이십 분 정도가 되는 거리였지만 언제나 곧바로 집으로 향하는 법이 없어서 한참 돌아가거나 멈춰서서 새 장난질을 기대하는 바쿠고를 기다려야했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집에 도착하기 한 블록 전에 자신의 가방을 맸다. 그리고 미도리야에게서 억지로 가방을 벗겨내어 그것도 자신이 들었다. 저 멀리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바쿠고와 미도리야를 발견한 모친은 언제나 우리 아들, 아들친구 카츠키 왔구나 하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바쿠고는 그 때마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이즈쿠의 모친이 과자와 함께 돌아갈 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라며 동전을 쥐어줬으니까. 


"내일 보자."


바쿠고는 성의없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미도리야는 한참 바쿠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 캇짱이 날 괴롭혔어. 내 약을 버렸어. 여기 오기까지 내게 가방을 들게 했어.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미도리야는 그러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나마 대화하고 함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가 바쿠고 외에는 없었다. 모친이 말했다. 손 씻고 밥 먹으렴. 그리고 가끔씩은 카츠키 군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좀 하렴. 언제나 너를 챙겨주잖니. 모친의 애정어린 말을 들으며 미도리야는 꼼꼼히 손을 씻었다. 


"알겠어. 엄마."




*




매미가 울었다. 여름방학을 잘 보내라는 담임선생님의 종례와 함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교실을 튀어나갔다.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숲이 가까이에 있어 그런지 공기가 습했다. 숲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공간이었다. 자주 들어가 놀았다. 바쿠고는 말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그 미도리야도 엄마 몰래 놀이터를 빠져나와 바쿠고와 그 패거리의 뒤를 따라 돌아다녔다. 혼자 있는 것 보다는 나았다. 

바쿠고 탐험대. 바쿠고는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어린 시절부터 특공대, 파워레인저, 기사단 등등 이름이 자주 바뀌었지만 맨 앞에 바쿠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변한 적이 없다. 미도리야는 나무 뿌리게 걸려 넘어질까 조심히 느릿하게 걸었다. 

쉽게 숨이 찼다. 학교 체육시간에도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기는 커녕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피구를 했고, 그마저도 공이 세게 날아와 얼굴 한 가운데를 맞추어 코피가 멈추지 않았던 적 후엔 눈총을 받아 교단 위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헛발질 한 공을 주워달라 부탁을 받는 것이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미도리야는 중간에 멈추어서 숨을 골랐다. 언제나 그랬듯 아이들은 저만치 앞서나가있다.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미도리야는 땀을 닦았다. 깊게 들어왔다. 나가는 출구를 까딱하면 잃어버리고 한참을 해메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난다.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도리야가 점만큼 작아보였다. 쳇. 혀를 찬다.

왜 따라오고 난리야. 짜증나게.

심기가 불편한 바쿠고의 기색을 읽어낸 아이 하나가 바쿠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왜."

"있잖아. 우리 숨바꼭질할래?"

"숨바꼭질?"

"응. 미도리야도 끼워서."

"너 제정신이냐? 저 데쿠를 왜 끼워."

"그러니까. 데쿠한테 술래를 하라고 하는거야. 그리고 우리는 도망치는 거지."


솔깃한 제안이었다. 곱씹던 바쿠고가 빙그레 웃었다. 


"백을 셀 때 우리는 다른 곳에 가면 되는거잖아. "

"이번엔 숲을 나가 다른 곳을 탐험하자."

"쟤는 숲에 내버려두고."


부탁한다. 간곡한 어조의 미도리야 모친은 이미 기억 저편이었다. 바쿠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옳지 않은, 한 아이를 버려두는 작당모의다. 수작을 끝낸 바쿠고가 언제나처럼 미도리야의 별명을 불렀다. 길게, 발음을 끌면서.




*




95. 96. 97. 98. 99. 100.

찾는다!


미도리야가 꼭 감았던 눈을 떴다. 잔가지와 잎새가 무성해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둔 숲 속에서 오로지 혼자였다. 스산한 새 소리가 울려퍼졌다.




*




재미있었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숲 안에 들어선 바쿠고와 패거리들은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곤충 채집통에는 사마귀 몇 마리가 톱날을 도사리고 있었다. 


맞다. 데쿠는? 누군가가 기억난 듯이 말을 꺼냈다. 

에이. 갔겠지. 벌써 숲을 다 뒤져봤겠다. 포기하고 갔을걸. 

맞아. 데쿠는 근성이 없어서 말이야. 몸이나 아프고.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거침없이 헐뜯는 말을 하며 걷던 바쿠고가 일순 말을 멈추었다. 말 끝이 힘을 잃고 기어들어간다. 카츠키 왜 그래? 뒤이어 이상한 기색을 느낀 아이들이 바쿠고를 따라왔다. 숲에 나무가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땅에도 잔뿌리와 잔가지들이 가득했지만 어린아이 무게 하나를 버틸 정도롤 굵지는 않았다. 곳곳에 뿌리가 부러진 흔적이 있다. 바쿠고는 찬찬히 걸었다.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고 짙어졌다. 어둠에 가까운 녹음이 눈 앞에 장막을 씌웠다. 머리 위에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듯이 커졌다.


그리고 멈추었다. 

미도리야가 있었다. 무성한 풀 숲 사이에. 정신을 잃은 채로.

우습게도 바쿠고는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이 언젠가 보았던 동화속의 새하얀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공주처럼 미도리야는 독 사과를 베어문 듯 죽은 것 처럼 누워 있었다. 숲에서 울 리 없는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사마귀 한 마리가 다른 개체의 목을 물어뜯는다. 아무도 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2.


미도리야 이즈쿠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구급차가 붉은 사이렌을 아프게 울리며 숲의 입구에서 멈추어 섰다. 때늦은 소란에 이웃 주민들이 무슨 일인가, 나와보았다.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다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씩 물러선 탓에 바쿠고 혼자서만 앞으로 나와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미도리야는 구조대원의 품에 안겨 구급차 안으로 들어갔다. 굵은 팔 틈으로 축 늘어져 달랑이는 손이 마치 연 같다고 바쿠고는 생각했다. 소식을 듣고 도착한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아들을 확인하고 함께 구급차에 올라탔다. 구급 대원들은 미도리야를 발견한(함께 있었던) 아이들에게, 바쿠고에게 정확히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고, 몸이 약했던 아이가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 해 쓰러진 것으로 결론 내렸다.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틈 사이로 미도리야의 가는 팔목에 링거 바늘을 찌르는 모습이 보였다.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채집통을 꽉 움켜쥐었다. 차 문이 닫혔다. 구급차는 떠났다. 소란이 가시자 어른들은 손짓하며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놀이는 그렇게 끝났다. 

바쿠고는 귀가길을 홀로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까르르 웃는 느낌이었다. 괜히 돌멩이를 걷어찼다. 집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밥을 먹지 않겠다 말 했다가 혼이 났다.


"너 좋아하는 매운 카레 해 놨잖아."

"안먹을래."

"안먹는다니.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몰라도 돼."

"얘 카츠키!"

"몰라도 된다니까!"


자꾸 생각이 났다. 인형처럼 쓰러져 있던 소꿉친구가. 




*




미도리야가 쓰러진 일엔 놀라울 만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 몸이 약하던 아이가 이번에 기어코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단 소리 뿐. 

바쿠고는 곤충 채집통을 들고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멈춰 선 곳이 미도리야의 집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앞을 빙글빙글 돌며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선 대답이 없다. 까치발을 뜨고 간신히 보이기나 할까 싶은 담을 넘어 훔쳐보는데 뒤에서 나직한 조언이 들려왔다.


"거기 아무도 없다." 바쿠고가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거기 아무도 없어. 애랑 애 엄마가 함께 병원에 갔거든."


허둥지둥 도망을 쳤다.




숲 입구, 공터에 친구들이 두엇 몰려 있었다. 친구들은 바쿠고가 어깨에 맨 곤충채집통을 보고 화색을 지었다. 

"잡은 사마귀를 보자!"

몰려들어 채집통을 살피던 아이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이상하네. 원래 한 마리가 모자랐었나?"

"싸움을 붙이자고 우리 머릿수대로 잡아온 거였잖아."

바쿠고가 채집통 안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사마귀 한 마리가 모자랐다. 햇빛이 아프게 내리쬐었다. 



"야. 재미 없다."

우리 곤충싸움 말고 다른거 하고 놀자. 친구들은 아쉬운 듯 잠깐 입맛을 다시더니 곧 수긍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미도리야는 원체 아이들 틈에 섞이질 못했기 때문에. 숲을 걷다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점처럼 보이는 미도리야가 나무를 짚고 차근히 걸어올까. 어느샌가 버릇이 들었나보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어른들로부터 미도리야를 잘 돌보라 말 들었었으니까.

잔가지가 보삭보삭 부서진 흔적이 있다. 숨바꼭질이었다. 멀리서 24, 25, 26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곳을 찾던 바쿠고의 걸음이 느려졌다.

미도리야가 쓰러진 곳이다. 잠시 주저하다 풀 숲 사이로 들어갔다. 어색하게 가만히 서있다 슬며시 주저앉았다. 앉은 키만큼 자란 풀이 시야를 가린다. 위로 넓게 가지를 퍼트린 나무가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여름 햇살이 인사했다.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가렸다. 미도리야는 이 자리에 누워있었다. 단정하게. 동화속의 주인공처럼. 

바람이 불었다. 풀을 스치고, 나무를 흔들고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았다. 


아.

바쿠고는 비로소 숲의 색과 미도리야의 눈, 머리색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과도 같은 녹음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가늘고 바람에 속수무책 흔들리는 것이 누구를 닮았는지.


"찾았다."


나무 뿌리 위에서 그 새 쫒아온 친구가 바쿠고를 내려다보며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바쿠고는 친구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벌써 찾았냐."




*




여름 방학기 끝날 때 까지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개학 후 학교에 와서 방학동안 지겹게도 보았던 친구들 얼굴을 다시 보고 뭐 할말이 그리도 많은지 시끄럽게 떠들다 조례 시작한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비로소 바르게 앉았다. 앞이 횡했다. 미도리야는 등교하지 않았다. 반장이 번쩍 손을 들고 말 했다. 선생님. 아직 미도리야가 오지 않았어요. 미도리야 군은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어요. 걘 방학 내내 병원에 있었는데요. 바쿠고가 저도 모르게 볼멘 소리로 말을 했다. 선생님은 놀란 듯 바쿠고의 얼굴을 보다가 그래도 소꿉친구니 걱정하는 마음이 있겠지, 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앞자리는 텅 비어있었지만 달라진건 거의 없었다. 바쿠고는 쉬는 시간마다 떠들었다. 쪽지시험도, 단어시험도 완벽하게 보았다. 점심 시간에 반장이 교탁 앞에 서서 잠시 주목을 외치더니 병원에 입원한 클래스메이트를 위해 종이학을 접고 쾌유 메세지를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바쿠고는 심드렁히 그 거창하고 진부한 계획을 들었다.

일인당 다섯 장씩 색종이가 돌아왔다. 턱을 괴고 손바닥 만한 색종이를 만지작 거리던 바쿠고가 괜히 앞에 있는 미도리야의 의자를 신발로 꾹 밀었다. 하얀 편지지는 짜증이 났고 더군다나 부담스러웠다. 시험을 볼 때와는 다르게 머릿속이 새하얘서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사각사각 막힘없이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바쿠고와 함께 미도리야를 괴롭히던 놈들도 마찬가지로) 바쿠고 혼자 머리통을 부여잡고 끙끙대는 것이다. 반장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바쿠고는 슬그머니 편지지를 숨겼다. 나는 데쿠랑 집이 가까우니까, 알아서 전해줄게. 바쿠고를 바라보는 눈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오후는 음악시간이었다. 가방과 책상을 탈탈 털어보고 나서야 바쿠고는 제가 리코더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교실 뒤편으로 나가있으라기에 터덜터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가서 반주를 따라 삑삑 연주해대는 급우들을 지켜보았다. 


미도리야는 자주 이렇게 교실 뒤편에 서 있었다. 

수학 시간에는 모형자, 과학 시간에는 스포이드, 미술 시간에는 크레파스, 음악 시간에는 리코더, 가끔씩은 교과서도 빼 놓고 안 들고왔다. 사실 시간표를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상 위에 얼굴을 박고 열심히 공부했다. 다들 5학년 수학책을 볼 때에 4학년 사칙연산 문제를 힘겹게 풀었으면서도, 그랬다. 

나무재질의 마룻바닥을 실내화코로 쿡쿡 찍었다. 결국 전부 데쿠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




"카츠키. 엄마랑 같이 나갈거니까 준비해."

"아 왜?!"


바쿠고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병원에 갈거야!"

"병원엔 왜 가는데?"

"얘 좀 봐? 이즈쿠가 이제 중환자실에서 나왔으니까 문병 가야지."

"내가 그 데쿠 문병은 왜 가?"

"너 이즈쿠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데쿠를 데쿠라 하지 뭐라 해."

"이즈쿠라고 부르라니까."

"싫어."


리모컨으로 만화영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바쿠고가 툭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나 친구들이랑 놀거야."

"어딜 가."

"아 친구들이랑 놀거라니까! 약속했다고오!"

"다른 날에 놀자고 그래. 오늘 꼭 이즈쿠 만나러 가야 해."


바쿠고 모친의 의지는 강경했다. 그리고 바쿠고가 제 어머니를 이긴 적은 없었다. 모전자전이다.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바쿠고는 투덜투덜 거리면서 닌텐도 게임기를 들고 모친과 함께 택시에 탔다. 에어컨을 켰으니 창문을 닫아달라는 말에도 무시하고 창문을 열었다가 모친에게 꿀밤을 맞았다. 

이미 스테이지를 전부 깬 게임이었다. 눈 감고 해도 깨겠네. 모친은 시험에서 일 등을 하면 게임팩을 사주겠단 약속을 했다가 탁상 가득히 쌓이는 게임팩과 비례해 점점 얇아지는 지갑을 보고 시험에서 전부 다 맞는 것으로 조건을 바꾸었다. 한참 뿅뿅 버튼을 누르다가 지루해져 택시 밖의 풍경을 보았다. 콘크리트와 벽돌로 이루어진 담이 길고 길게 이어지다가 트인 팔차선 도로가 나왔다. 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는건데?"

"대학병원이야."

"대학병원? "

"커다란 병원 말 하는 거야."

"왜 커다란 병원에 입원한거래."

"아프니까. 많이 아파서."


입을 다물었다. 




택시는 십 분 정도 지나서 바쿠고 모자를 병원 입구에 내려주었다. 바쿠고는 먼저 내려 커다란 건물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정말 이게 전부 병원이란 말이야? 

바쿠곤 병원과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 아픈 적이 드물었고 그 험한 장난을 치면서도 사고를 당한 적도 드물었다. 기껏해야 발목 몇 번 삐거나 살이 까졌지. 

입구에서 자동문이 열렸다. 로비에 사람이 많다. 바쿠고의 모친은 능숙히 원무과에서 미도리야의 이름을 말하더니 아들의 뒷덜미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7층 714호. 바로 옆에 창백한 얼굴의 여고생이 환자복을 입은 채 함께 탔다. 바쿠고는 모친 곁으로 한 발자국 붙어섰다. 여학생은 6층에서 내렸다. 7층에 도착해 일부러 느릿느릿히 걸었다. 로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소독약 냄새가 훅 풍겼다. 얼굴을 찌푸린다. 낮임에도 복도는 조용했다. 가끔가다 산책을 하듯 돌아다니는 환자들과 이리저리 체크하며 움직이는 간호사들이 전부다. 모친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미도리야는 4인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서 책을 읽던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발견하고 와락 웃었다. 세상에. 카츠키도 와 줬구나. 바쿠고는 어설프게 목례를 하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하얗고 반질거린다. 미도리야의 침대 옆 탁상에는 종이학과 편지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바쿠고는 그제서야 제 방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백지가 생각났다. 

쭈뼛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할 말이 없다. 


"캇짱."


미도리야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금 수학시간에 뭐 배워?"
"어, 분수."


미도리야는 수줍은 듯 손가락을 꼼질거린다.


"나 여기서 엄마가 수학 가르쳐주고 있거든. 이제 수학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냐."

"저기 음악 시간에는?"

"리코더."

"아직 부는 방법 잘 모르는데."

"바보냐? 아직도 몰라?"


바쿠고의 모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츠키! 말 곱게 써야지!"

"아니 얘가 바보지. 아직까지 리코더 부는 방법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어디있어? 유치원 애들도 다 안다고."


미도리야가 어설프게 웃었다. 

"병실에서는 리코더를 불 수가 없어서.. 시끄럽다고 싫어하시거든. "




침대 옆에 쌓여있는 교과서를 보고 바쿠고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도 공부를 하냐? 기껏 학교에서 나왔으면 그냥 놀아."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였다.


"난 공부하고 싶은데."

"공부가 좋아?"


살풋 고개를 젓는다.


"학교에서 창피한게 싫어."


할 말은 금방 동이 났다. 바쿠고의 어머니와 미도리야의 어머니는 수다 삼매경이다. 별 것 아닌 말에도 시도때도 없이 웃었다. 바쿠고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은 아들을 놀리는 내용 뿐이었지만. 아, 바쿠고가 짜증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서 병실을 나갔다. 미도리야는 침대 위에서 바쿠고의 뒷모습을 쫓았다.





복도에 나왔으나 재미있어 뵈는건 없다. 바쿠고가 속으로 한탄했다. 더럽게 재미없네 진짜. 왜 끌고온거야. 이딴 곳. 낮설고 조용해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도 싫었다. 분명히 놀릴테니까.

복도를 걸었다. 병실 대부분은 호수 밑에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네 개가 가장 많았고 여섯 개도 많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놓여있는 휠체어를 타 보고 환자들이 하는 것 처럼 바퀴를 손으로 굴렸다가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걸려 혼났다. 재빨리 자리를 도망쳐 불이 깜박이는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병실이 있다. 이름표 자리는 네 개였으나 이름은 한 개였다. 문이 비스듬이 열려있었다. 호기심이 들었다. 바쿠고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낮이었음에도 창문을 온통 블라인드로 가려놓아 병실 안이 어두컴컴했다. 왜 불을 안 켜지. 탁하고 찝찝한 냄새가 났다. 지하 창고에 들어가면 나던 그런 냄새. 

TV가 켜져 있었다. 낚시 채널인듯 하였다. 그마저도 전파가 지지직거려 화면이 일그러져 보인다. 주저하면서도 병실 안에 발을 디뎠다. 침대 하나는 비어 있었고 한 침대엔 노인이 누워있었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딸국질이 났다. 


노인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쿠고를 지긋이 쳐다보고 손짓했다. 바쿠고가 도리질쳤다. 빠진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얼굴에 있는 검버섯이 꿈틀거린다. 본능적인, 꺼려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노인이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가, 아가. 이거 먹을텨?"


노인의 침대 옆 탁자에는 검게 변한 바나나가 있었다. 바쿠고가 대답을 망설이자 노인이 손을 뻗어 바쿠고의 팔목을 잡았다. 덥썩. 깜짝 놀라 뿌리치려 했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노인은 생명줄을 붙잡듯 바쿠고의 손목을 잡았다. 


"나도 너만한 손자가 있단다. 그런데 병원에 오질 않네."

"이거 놔요."


낑낑거리며 손목을 비틀었다.


"내가 얼마나 예뻐했는데. 다 죽어가니 오지도 않는구나. 너는 젊어 좋겠다. 너는 어려 좋겠다."

"놔요!"

"병원에 오기 전 까지는 건강했거든. 멀쩡히 밭도 가꾸고 산책도 했단 말이야. 그런데 자식들이 버리고 간 뒤로 눈도 침침해지고..."

"놓으라니까! 놔!"

"병원이 사람을 죽여. 병원이. 돈 벌라고 일부러 안 놔주는 거야."


바쿠고가 있는 힘껏 손을 뿌리쳤다. 노인의 손이 침대 난간에 크게 부딪혔다. 그 충격 탓에 손을 잡는 힘이 약해져 떼어낼 수 있었다. 바쿠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병실 바깥으로 나왔다. 뒤에서 아가, 어딜 가니, 아가 이리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쿠고는 겁에 질려, 창백한 몰골로 단숨에 미도리야의 병실까지 뛰어들어왔다. 지나가는 간호사가 이상히 쳐다보았다.




미도리야의 병실에선 탈취제 향기가 났다. 집에서 쓰는 것과는 다른 향이었는데 아무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아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모친이 괜히 얄미웠다. 오히려 바쿠고를 알아채는 것은 미도리야다. 바쿠고의 입에서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갔다.


"뭘 봐 멍청아."


모친이 휙 고개를 돌린다.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너 집에가면 두고 봐. 두고 보라지. 

바쿠고는 침대에 걸터앉아(얘 카츠키! 밑으로 안 내려와?! 괜찮아요. 내버려 두세요. 이즈쿠도 괜찮을 거에요., 저희 애가 아주 제멋대로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닌텐도를 꺼냈다. 손이 아직도 덜덜 떨렸다. 얼핏 보니 벌건 자국이 남아있었다. 바쿠고가 질겅질겅 입술을 씹었다. 미도리야가 물었다.


"캇짱.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짜증난 바쿠고가 대꾸했다.


"신경 꺼."


미도리야는 걱정스레 바쿠고를 물끄러미 보았다.




바쿠고의 모친은 미도리야의 어머니와 함께 잠시 병실을 나갔다. 눈치를 보던 미도리야가 물었다.


"캇짱. 과자 먹을래?"

"과자 있어?"

"응. 사람들이 사다줬는데 난 이런거 먹으면 안 된대."

"왜?"

"먹으면 몸이 더 아파진대. 그래서 병원에서 주는 것만 먹고있어."

"흐음."


바쿠고는 과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뜯었다. 침대 위에 과자 가루가 흘러내렸다. 미도리야가 베시시 웃었다.


"캇짱. 맛있어?"

"어."


닌텐도의 전원이 켜졌다. 바쿠고는 이미 깨도 열 번은 더 깼을 스테이지를 눌렀다. 미도리야가 공책과 연필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바쿠고 가까이에 붙었다. 옆에서 보는 시선이 신경쓰였지만 그렇다고 쳐내버릴 건 아니었고, 미도리야가 뒤집어 쓰고 있던 담요의 보드란 감촉이 좋아서 내버려두었다. 무엇보다 제가 이렇게 게임을 잘 한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와 캇짱, 잘 한다."

"당연하지. 내가 이거 몇 번을 했는데."

"저기 저 위에 있는 아이템도 먹을 수 있는거야?"

"이따가 보여준다."

"진짜 대단하다. 난 이런거 하나도 못하는데."

"너도 게임기 사서 해."

"음, 게임기."


미도리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책만 읽지 말고. 책보단 이게 더 낫지. "

"그런가? 아 캇짱. 앞에서 악당 온다!"

"알고 있다고."


게임속의 용사는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몬스터를 단숨에 무찔렀다. 

미도리야가 옆에서 박수를 쳤다. "캇짱 정말 대단해. 멋있다."

바쿠고가 어깨를 으쓱였다.



.

..

...

"카츠키. 가자."


한창 게임을 하던 중에 모친이 바쿠고를 불렀다.


"아싸."


바쿠고가 닌텐도를 덮었다. 미도리야는 벌떡 일어서는 바쿠고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에 또 들를게요. 아님 카츠키라도 보내던가."

"아오."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아니에요. 카츠키도 공부 해야할텐데."

"얜 친구랑 노느라 바쁘죠. 오히려 이즈쿠랑 함께 놀면 좋을걸요."

"아 나 병원 싫어."

"병원은 싫어도 이즈쿠가 있잖니?"


데쿠도 싫어, 라는 대답을 하기엔 아무리 그래도 눈치라는게 있었다.  바쿠고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카츠키 다음에 보자. 네에. 바쿠고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문 밖을 완전히 나서기 전에 뒤에서 미도리야가 다급하고 큰 목소리로 바쿠고를 불렀다. 


"캇짱 다음에 또 봐!" 


괜히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또는 무슨. 병원에 대한 인상 자체가 최악이다. 


"다신 안 와." 혀를 길게 빼 물었다. 




*




"이즈쿠를 또 만나러 가는 건 어때?"

"엄마 나 숙제있어."

"숙제 금방 끝나잖아."

"내일도 숙제있어."

"거짓말 치고 있네." 

"아 진짜거든? 왜 아들을 못 믿어."

"너 원래 숙제 금방 끝내잖아. 놀려고."

"금방 안 끝내면 되잖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모친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심화수학책을 책가방에 집어넣고 거실에서 만화영화를 보고 있으니 전화가 걸려온다. 카츠키. 네 친구란다. 바쿠고가 단숨에 달려갔다. 어. 오늘 왜 못놀았냐고? 병원갔다왔다. 안 아파. 그 데쿠(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병실 갔다왔어. 어. 내일은 놀 수 있어. 숲에서 만나. 


모친이 아들에게 눈을 흘겼다. 바쿠고는 모른채 했다. 그래. 건강만 해라. 우악스레 아들의 머리카락을 헤집은 모친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실 가득히 정의의 용사 주제가가 울려퍼진다. 바쿠고가 작게 따라불렀다.




*




학교 청소시간 걸레를 들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으려니 저쪽에서 담임 선생님이 다가오는게 보였다. 들러붙는 친구를 냉큼 밀어내고 열심히 바닥 닦는 척 했다. 선생님은 교실 앞에 서서 청소상황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바쿠고를 불렀다. 바쿠고. 조금 있다가 교무실로 와 볼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바쿠고에게 저만치 밀려나있던 친구가 다시 다가와 추근거렸다. 


야 너 무슨 잘못했냐? 왜 교무실 가? 알게 뭐야. 

또 시험 백점맞았나보지.  

재수없어. 

내가 시험 잘 보는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라고 그러냐. 

넌 진짜 천벌 받을거야. 

천벌이 무슨 뜻인지 알긴 해? 


낄낄거리며 웃었다. 넘겼지만 그렇게 좋은 예감이 들진 않는다. 





"바쿠고. 네가 이즈쿠 집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면서."

"네."

"선생님이 부탁이 있는데, 이즈쿠가 결석하는 날이 길어졌으니 네가 알림장을 전달해줬으면 해."


바쿠고가 입을 우물거렸다. 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 하는 모양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당근을 던진다. 


"학교 끝나고 전해주면 될 것 같은데. 청소 안 하고 바로 갔다오면 되고."

"진짜요?"

"물론이지. 이렇게 심부름 보내는데 청소까지 시키면 안 되는 거지."


인심쓰듯 말 한다. 바쿠고가 찬찬히 제 이득을 재 본다. 청소는 일주일마다 당번이 바뀐다. 다음주는 화장실 청소였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는 질색이다. 바쿠고가 냉큼 대답했다.


"갈게요."

"잘 생각했어. 매일 갈 필요는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면 돼."

"청소는 매일 빠져도 되죠?"

"이놈 양심봐라? ...그래. 그렇게 해라."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바쿠고는 모친이 챙겨준 장우산을 들고 총총히 가방을 챙겼다. 친구들이 청소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방 챙기는 바쿠고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야 넌 왜 청소 안해?

난 안해도 돼.

그런게 어딨냐. 너 오늘 화장실 청소잖아.

안 해도 된다니까. 선생님한테 물어보던가.



선생님, 선생님. 바쿠고 왜 청소 안해요?

선생님이 심부름 시킨게 있어서 가야 해.

아 그런게 어디있어요! 학교 끝나고 가면 될 걸!

어허. 너희들 조용히 하고, 가서 청소해!


승리자의 고양감을 만끽하며 바쿠고는 당당히 교실을 나왔다.




*




병원도 몇 번 와 봤다고 이젠 익숙했다. 물론 어둑한 복도 뒤쪽으로는 두번다시 얼씬하지 않았다. 우산을 툭툭 털고 가방에서 알림장과 게임기를 꺼내어 알림장을 미도리야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저는 게임기를 들고서 침대 위에 편하게 자세를 잡는다. 


미도리야는 기뻐했다. 알림장의 존재도, 저를 찾아와주는 친구의 존재도. 

알림장을 찬찬히 살핀 뒤에 교과서를 보고 오늘 할 분량을(계획을) 갱신 한 뒤 슬그머니 바쿠고의 곁으로 다가왔다. 바쿠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거기 수납함에 있는 과자랑 음료수를 들고 오라고 말 했다. 과자는 항상 차 있었다. 미도리야가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는지 초록색 케이스의 새 닌텐도 박스가 침대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쿠고가 콧방귀를 뀌었다. 


"너도 닌텐도 샀어?"

"으응. 엄마한테 부탁했어."

"게임팩은 있고?"


미도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바쿠고가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집에 있었던, 유행이 다 지나서 건드리지 않는 게임팩을 챙겨다 미도리야에게 알림장과 함께 던져주었다. 미도리야는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바쿠고를 올려다보았다. 데쿠. 너 가져. 정말? 정말 나 주는거야? 그럼 널 주지 여기 다른 사람이 어디있다고. 미도리야는 얼굴을 단숨에 붉힌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듯이 게임팩을 매만졌다. 


"정말 주는거야? 정말...? "


혼잣말을 중얼중얼 하더니 게임팩을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캇짱. 진짜 고마워. "


괜시리 부끄러워진 바쿠고가 고개를 돌렸다.


"야. 고마우면 과자나 더 내놔."





바쿠고는 거리낌없이 미도리야의 병실에 쳐 들어와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신나게 게임을 하며 떠들다 갔다. 게임 그만하라 잔소리를 해대는 모친이 병원엔 없었기 때문에. 미도리야는 자신이 게임을 가지고 노는 것 보다 바쿠고에게 붙어 게임속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간호사들은 바쿠고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시끄럽고 일거리가 늘어난다면서.


쫒아내진 않았다.






3.



미도리야 이즈쿠는 발작을 앓았다. 발작엔 일정한 주기가 없었다. 그저, 점점 잦아진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언제쯤 고통이 닥쳐올 줄 알았다면 의사 선생님도, 미도리야의 모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나절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기분 좋게 일어나자마자 미도리야는 온몸에 스며드는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위액을 게워냈다. 장장 두 시간동안 쉴 틈 없이 구역질을 했다. 병실에서 응급실로 실려가면서도 주어진 대야에 토악질 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식도와 목에 상처가 났다. 당분간 먹는 것은 미음과 죽, 물(혹은 링겔 수액으)로 해결하라는 처방에 모친이 비통스러운 듯이 아들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미도리야는 지친 얼굴로 제 몸 속을 샅샅이 훑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모친에게서 수학 수업을 받을 때에도 격통은 갑자기 칼에 찔리는 듯 찾아왔다. 대부분 처음은 명치께가 살살 아프기 시작해서 들불 번지듯이 고통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모친이 아들을 위해 준비한 극세사 보드란 시트가 닿기만 해도 칼침으로 이루어진 이불을 덮는 듯 아팠다. 누군가가 폐를 쥐어짜는 것 처럼 숨을 쉬는 것이 더없이 불편했다. 격통이 찾아오면 미도리야는 숨을 최대한 참았다. 그게 차라리 편했으므로. 갈비뼈가 몸의 내장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엄마. 아파. 너무 아파.


낑낑 앓으며 아프다 울면 오히려 건강한 모친마저 아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 아픈 척, 괜찮은 척 웃음을 짓다가 정말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아파오면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변기 옆에 누워서 덜덜 떨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도는 간호사를 동행한 모친이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침대에 실려 돌돌돌 이동하면서 눈물자국 가득한 얼굴로 모친은 아들의 작은 손을 붙잡고 억지로 웃었다. 


"엄마가 울까봐 안 아픈 척 하는거야? 이즈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엄마 안 울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해줘. 제발.


과도한 슬픔에 이명이 울리고 조그만 입 위에 산소호흡기가 씌어져 있음에도 모친은 가냘픈 미도리야의 말을 알아들었다.


엄마. 아파서 미안해. 


응급실(수술실)의 문이 닫혔다. 모친은 닫힌 문 앞에서 허망히 아들의 말을 곱씹었다. 





검사를 했다. 정말 많이 했다. 피를 하도 뽑아서 빈혈이 와 뽑았던 피를 다시 수혈해야 할 만큼. 촬영을 하도 많이 한 덕분에 담당 직원 모두가 어린 미도리야의 얼굴을 기억하고, 미도리야도 날짜별로 달라지는 직원들의 얼굴을 외울 만큼. 그러나 계절이 바뀌어도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희귀병이 아닐까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다. 당연히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 약이 좋을까, 저 약이 좋을까 시도를 해 보는 두 번째 담당 의사 덕분에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었다. 이제 약을 먹는다는 행위에도 더 이상 거부감이 들지 않아서, 간호사가 주는 약 꾸러미를 미도리야가 직접 받아들고 천천히 덧셈 뺄셈을 해 가며 나눈다. 모친이 챙겨주지 않아도 알아서 물과 함께 꿀꺽꿀꺽 잘 삼켰다. 낮이 바뀌고 밤이 바뀌어도 병원은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도쿄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저희로서도 안타깝지만, 지방의 대학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친은 떨리는 손으로 녹차를 담은 종이컵을 어루만졌다. 초췌한 표정으로 얼굴을 끄덕였다. 살고있는 도시를 벗어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도쿄의 병원으로 간다면 외국의 의사들과 분명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거라고. 아드님께서도 분명 차도가 있을 거라고. 


웃을 일 없던 모친의 얼굴 위로 서서히 그늘같은 웃음꽃이 드리웠다. 우리 아들, 나을 수 있는 거겠지요. 몇 달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미도리야 일가를 지켜본 의사는 애써 돌려 말했다. 확증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모친이 담당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아들의 병실로 돌아왔다. 또래에 비하여 한참 조그만 체격의 미도리야가 수학 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문제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에 멍과 함께 자리한 주삿바늘 자국이 몇 개고, 연결된 링거가 몇 개인지. 모친은 아들의 옆에 앉았다. 문제를 풀던 미도리야가 고개를 들고 모친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아이. 내 뱃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된 아이. 떨리는 손으로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주 마르고 작아서 금새 부서질 것 같은 몸을. 미도리야도 연필을 놓고 모친을 마주 안았다. 연필이 데구르르 굴러가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조금만 더 계산하면 풀 수 있을 것 같아." 


미도리야는 따뜻한 모친의 품에 얼굴을 부볐다. 색색 내쉬는 숨이 가볍다.


"이즈쿠. 우리 도쿄로 가야 할지도 몰라."

"도쿄?"

"응. 도쿄의 병원으로 가면 네가 나을 수 있을거래."

"도쿄는 멀어?"

"그렇게 멀진 않아." 미도리야는 모친의 품을 벗어나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학교는?"

"더 이상 지금의 학교를 다닐 수는 없겠지."


미도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학교 안에서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만한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 아마도 학급에 있는 친구의 이름보다 학급 안에 있는 책 이름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미도리야는 학교에 큰 애착이 없었다. 쉽게 납득한 미도리야가 책상 위의 연필을 찾았다. 손을 뻗다 잠시 멈추었다. 그렇다면 헤어져야 하는구나. 캇짱과.




*




미도리야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갔다. 개학 직후엔 그래도 걸리는 것이 있어서 아무도 앉지 않던 바쿠고 앞의 책상이었다. 가을의 초입 누군가가 무심코 앉아 급우들과 떠들어댔다. 그 아이는 나중에야 자신이 지금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미도리야의 책상에 앉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랬네. 그 깨달음이 다였다. 미도리야의 책상은 뒤편에 위치해 있어서 수업 시간 다른 행동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번갈아 그 자리를 탐냈다. 물론 들키면 혼이 났다. 네 자리에 안 앉고 다른 곳에 앉아있으면 어떡해! 


아이들은 호기심에 손 타지 않은 미도리야의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있는 것이라곤 낡은 운동화 한 짝 뿐이다. 그리고 그 사물함은 반의 각종 잡동사니를 보관해 두는 곳으로 바뀌었다. 윗부분이 사라진 리코더, 복도에서 축구를 하기 위한 용도의 슬리퍼, 다 찢어진 교과서, 금붕어 먹이, 미니 물뿌리개, 다 시든 화분 등등.

사물함 앞에는 분명히 '미도리야 이즈쿠' 이름이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 뿐이었다. 아이들은 주인이 부재한 교과서에도 눈독을 들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명색이 소꿉친구라 기억하는 바쿠고에게 양해를 구했다. 


"야 바쿠고. 나 이번 시간에 교과서를 빼 놓고 와서 그런데 한 번만 빌리면 안될까?"


바쿠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흔적이 서서히 지워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사실, 그것의 의미를 깨닫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미도리야의 교과서는 다른 반 아이들까지 빌리러 왔다. 남은 책. 그렇게 불렸다. 



어느 하늘 높고 한가로운 날 복도를 거닐던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음악책을 창가에서 발견했다. 단정한 글씨체로 이름이 적혀있던 교과서는 검은 먼지 투성이에, 낙서가 한가득이었으며 표지는 반쯤 뜯겨나가 없는 것이 마찬가지인 꼴이 되어 있었다. 저런 책도 있었구나. 그저, 그렇구나. 



미도리야 이즈쿠는 모두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지워나갔다.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자신의 책상 위에 낙서를 하거나, 혹은 칼자국을 내서 자신이 이 곳에 앉았다는 흔적을 남기곤 했다. 때문에 선생님은 불호령을 하면서 책상을 정리하라고 안달을 냈지만 미도리야의 책상은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깨끗했으니까. 


교실 뒤편에 작은 어항이 하나 놓여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모두가 관심을 갖고 예쁘다, 멋지다, 잘 돌보리라 약속했다. 두 마리 금붕어가 고운 지느러미를 흔들거리며 어항속을 돌아다녔다. 선생님은 밥을 너무 많이 주면 금붕어의 건강이 상해버린다고 말 했다. 아이들은 네에- 대답을 했음에도 서로가 자신이 밥을 줄 것이라며 매 시간마다 싸웠다. 천천히, 천천히 어항에는 녹조가 끼고 물을 갈아주지 않아 더럽게 변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물은 썩었다. 주말이 지난 날 학교에 와 보니 금붕어는 배를 하얗게 까뒤집고 물 위를 둥둥 떠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뜰채로 금붕어를 건져내어 화장실에 버렸다. 그 뒤로 어항에 물고기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바쿠고는 초록색 어항으로 시선을 주었다. 평소엔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으나 이상하게도 시선을 잡아서. 금방 관심이 사라졌지만.





*





병원에서 주는 밥은 맛이 없었다. 미도리야가 두어 수저 뜨다가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것을 바쿠고가 뺏어먹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그 끔찍한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데쿠. 넌 이런걸 매일 먹어?"

"먹으면 건강해진댔어."

"건강은 무슨. 이렇게 맛 없는 걸 먹었다간 없던 병도 생기겠다."


미도리야가 숟가락으로 맨 밥을 콕콕 찌르며 웃었다. 검은 콩자반을 노려보던 바쿠고가 물었다. 


"넌 뭐 먹고싶은거 없어?"

"먹고싶은거? "

"어. 먹고싶은거."


음, 미도리야가 잠시 생각했다.


"햄 반찬 먹고싶은데."

"그거 말고."

"먹고싶은거 말 하라고 그랬으면서..."

"씨. 그거 말고. 피자나, 햄버거나, 그런거 먹고싶지 않아?"

"먹으면 안된다고 그랬는데. 건강 나빠진댔어."

"그거 다 거짓말이야. 우리 엄마는 잘 먹고 양치만 잘 하면 건강은 문제 없다고 했어."


미도리야가 눈을 굴린다.


"음, 그럼, 핫도그."

"핫도그? 그게 먹고싶어?"

"응. 가게에서 파는 팟도그. 케찹이랑 설탕 묻힌거. 그게 먹고싶어."

"흠."



고개를 주억거리던 바쿠고는 그 다음날 주섬주섬 빨간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캇짱. 그게 뭐야?"

"네가 먹고싶다며."


가방에 넣어 숨겨온 탓에 케찹이 온갖 곳에 다 묻은 핫도그였다. 미지근했다. 미도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음 음식을 보는 사람처럼 핫도그를 관찰했다. 먹어. 바쿠고가 선심 쓰듯이 미도리야에게 내밀었다. 미도리야는 나무 젓가락에 끼워져 있는 핫도그를 받았다. 케찹이 손바닥에 묻었다. 한 입 조심스레 베어물은 미도리야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맛있다."

"맛있지?"


바쿠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난 이런걸 매일 먹는단 말이야. 근데 넌 이상한 것만 먹고있잖아. 나한테 감사해 하라고."

"고마워 캇짱."


미도리야가 다시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안에 숨겨져 있던 소시지가 드러났다. 두 볼이 터질 듯이 입 안에 음식을 넣고 천천히 씹었다.



타코야끼, 오뎅, 초코우유, 딸기우유, 콜라, 당고, 주먹밥, 바쿠고는 병원에 찾아 올 때마다 재미 붙힌 것처럼 미도리야에게 먹고싶은 음식을 물었다. 미도리야는 그때 그때 생각나는 음식을 말했다. 물론 가방 안에 숨겨올 수 있는 것 만을 말해야 했다. 바쿠고가 숨겨오는 모든 음식들을 미도리야는 채 반도 남기지 못하고 남겼다. 남은 음식은 바쿠고가 먹었다. 사실 거의 다 바쿠고가 먹었다.


"맛 없어?"

"아니. 맛있는데 배 불러서 더 못 먹겠어."

"너 편식하는거 아니냐?"

"그런거 아니야."

바쿠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미도리야를 보다가, 기껏 사 왔는데 아깝게. 하고 말하며 남은 음식을 우적우적 입 안에 집어넣고 닌텐도를 꺼냈다. 


"아, 카레먹고 싶다."


미도리야가 냉큼 바쿠고의 말을 따라했다.


"나도. 나도 카레먹고싶어."

"바보야. 그걸 어떻게 가져오는데."

"그러네. 가져 올 수가 없네."

"아. 카레 주먹밥 저번에 편의점에 있는 거 봤다. "

"그럼 그거 먹고싶어."

"넌 먹고싶은것도 많냐."

"만날 미안해. 캇짱."


그래도 굳이 카레 주먹밥을 사 온 바쿠고는 혀가 아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미도리야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야 이게 뭐가 맵다고 그래. 그리고 카레 주먹밥을 한 입 크게 베어물고 당당히 씹어삼켰다. 미도리야가 웃었다. 캇짱은 역시 대단하구나.




*




바쿠고는 쪽지 시험에서 백점을 맞았다. 선생님이 칭찬했다. 역시 바쿠고 답다고. 바쿠고는 붉은색 함박눈이 내린 시험지를 덜렁덜렁 들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짝이 물었다.


"야 바쿠고.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팩 살거지? "


바쿠고가 흘끗 반절은 틀린 옆 짝의 시험지를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지금 깨고있는 게임 있어."

"뭔데?"

"알아서 뭐하게."

"궁금해서 그래. 너 다 깼잖아."

"다시 깬다."

"왜?"

"아, 알아서 뭐하냐고!"


"거기 바쿠고랑 T타 조용히 해!"

"에이씨..."


바쿠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짝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쿠고를 노려봤다. 바쿠고도 마주 노려보았다. 




집에 돌아와 시험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녁 준비를 하던 바쿠고의 모친이 시험지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었다.


"엄마. 아들이 백 점 맞아왔는데 표정 왜그래."

"엄마가 뭐 어떻다고? 우리 아들 백점맞았네~"


모친은 시침을 뚝 땠다. 바쿠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갖고싶은 게임팩 말해. 엄마가 시장 다녀오는 길에 사올게."

"갖고싶은거 없는데."


모친은 카레 냄비를 젓고 있던 국자를 놓치고 놀라운 듯이 아들을 뒤돌아보았다.


"왠일이래. 갖고싶은 게임이 없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닌텐도 전원을 킨 바쿠고는 한참 세이브 데이터가 저장된 게임팩을 노려보았다.


"엄마."

"왜 아들."

"게임 말고 용돈으로 주면 안돼?"

"용돈?"

"어."

"어디다 쓰게?"

"..."

"아들 돈 뺏기고 다니는거 아니지?"

"아니야. 어떤 놈이 내 걸 가져가."

"하긴. 아들이 돈 뺏기면 그건 하늘이 놀랄 노릇이지."

"그냥. 먹고싶은거 사 먹고 싶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모친은 충격 받은 얼굴로 닌텐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들을 다시 돌아본다.


"엄마 밥이 맛없어?"

"아 그런거 아니라고. 그냥 요새 배고파."

"바깥에서 음식 사 먹는거 별로 안좋은데."

"엄마가 양치질만 잘 하면 된다 그랬잖아."

"어휴. 이놈의 입... 그래. 줄게. 대신 진짜로 양치질 잘 해야한다."

"내가 애야? 그런건 알아서 한다고."

"네가 애 맞지 그럼!"




*




제가 사온 크림빵을 우적우적 먹는 바쿠고를 앞에 두고 국어 문제를 풀던 미도리야가 깨달은 듯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

"왜?"

"그게, 아니. 캇짱 입에 크림 묻었어."


바쿠고가 손바닥으로 크림을 닦았다.


"그, 먹고싶은거 생각나서."

"뭔데?"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이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캇짱은 못 사와."


바쿠고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뭔데."

"아, 아니야."

"아 뭔데!"


목청이 올라갔다. 미도리야가 몸을 움츠렸다. 


"그, 그거 가방에도 안 들어가는 거고..."

"됐고. 말 하라니까."


그, 미도리야가 몸을 쪼그린채로 망설이는 듯 눈을 깜박깜박 하더니 꼬옥 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츠동..."

"가츠동?"

"응. 가츠동 먹고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가츠동..."


쯧. 바쿠고가 혀를 찼다. 그 까짓 거. 


"안 먹어도 돼. 캇짱. 그냥 진짜 갑자기 생각 난거야."

"넌 문제나 풀어 데쿠."


미도리야는 시무룩해져서 입을 다물고 다시 국어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기 안의 용사가 체력을 다 까먹고 쓰러졌다. 그러나 눈은 화면에 있고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어서 깨닫지 못했다.




*




가츠동. 바쿠고는 힐끔힐끔 가게 이름과 밖으로 내어놓은 메뉴판을 보면서 휑한 길거리를 걸었다. 가츠동을 파는 가게는 많았다. 그러나 포장이 된다는 곳이 드물었다. 포장이 된다 싶어서 들어가면 한 그릇 이상을 사 가지고 가야하고.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란다. 데쿠는 왜 하필 가츠동 따위를 먹고싶어하냐. 

날이 서서히 가을의 중반으로 접어들어 해가 일찍 저물었다. 바람이 불었다.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투덜거리며 걸었다. 전단지가 저편에서 날아와 얼굴에 부딪혔다. 바쿠고는 작게 욕을 하며 전단지를 떼어내 길바닥으로 버렸다. 저녁이 되자 네온사인 간판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주머니 안에 넣어놓은 돈 표면으로 손바닥의 열이 옮겨가 따뜻히 데워졌다. 붉은 색 가방을 매고 점퍼를 입은 바쿠고가 허름한 가게 앞에서 멈추어섰다. 

돈부터 내미는 어린아이를 보고 늙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굴 주려고 하는거니. 바쿠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아니요. 아빠? 아니요. 그럼 누구? ... 친구? 친구 아닌데요. 노인은 더 묻지 않았다.


한참이 걸렸다. 가츠동을 사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늦었다. 물론 계절이 바뀜에 따라 날이 저무는 속도가 빨라진 이유도 한 몫 했다. 가방이 묵직하다. 걸음이 큼직큼직해도 바쿠고 답지 않게 조심조심히 걸었다. 가방 안에 비닐로 꽁꽁 묶어놓은 음식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피곤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붉은 빛이 반짝이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내려오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했다.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7층 로비가 시끄러웠다. 평소엔 눈인사라도 해 주던 간호사들이 이리저리 전화를 해대느라 바빴다. 로비에 흘끔 눈길을 주고 익숙한 병실로 뛰듯이 걸어갔다. 문고리를 돌린다.





미도리야는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들의 발치에서 미도리야의 모친이 입과 울음을 틀어막고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발작이 심했다. 미도리야는 허리를 튀틀고, 눈을 까뒤집으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이번 발작도 역시나 갑작스러웠다. 공부를 하던 미도리야가 수학책을 떨구었다. 링거 줄이 당겨져 손 등에 꼽혀있던 링거가 빠졌다. 피가 튀었다. 미도리야는 만지지 말라며, 아프다고, 온 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쳤다. 휘두르는 손에 커튼이 뜯겨져나갔다. 어린아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힘이 나왔다. 


"아파, 아파요."


의사와 간호사들이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미도리야의 온 몸을 붙들고 내리눌렀다. 가는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여리한 몸이 찌그러질 것 같다. 바쿠고는 문 앞에 서서 그대로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병실 안의 다른 환자들도 얼어붙어 미도리야의 발작을 마냥 지켜보았다. 

입고있는 병원복을 쥐어뜯고 저를 내리누르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발길질을 하고, 밀치고, 할퀴었다. 


"하지마. 만지지 마."


미도리야가 흐느꼈다. 고개를 저으며 펑펑 울다가, 눈이 마주쳤다. 붉게 충혈된 녹색 눈과. 대책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도리야가 손을 뻗었다. 구원의 동앗줄을 잡으려는 듯 바쿠고에게 몸을 기울이다가 침대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버르적대며 어머니를 찾는 아이처럼 바쿠고에게로 기어가려 했다. 뻗은 손 끝이 애처롭게 덜덜 떨렸다. 얼굴과 몸이 붉었음에도 손 끝은 새하얗다. 


"캇짱."


그 입에서 울음이 묻어 넘치는 목소리로 바쿠고의 이름을 불렀다.


"카츠키. 캇짱. 살려줘."


미도리야가 몸을 뒤튼다. 

구해줘- 


"캇짱, 카츠키이-"


절규와도 같은 울음이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바쿠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방 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돌덩이 같았다. 불편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간호사 하나가 바쿠고를 발견하고 재빨리 병실 밖으로 밀어냈다. 오늘은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넋을 놓고 질질 끌려나가던 바쿠고가 뒤를 돌아봤을 때엔 이미 병실의 문이 닫힌 후였다. 굳건히 문이 닫혔음에도 밖으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바쿠고는 귀를 틀어막았다.




*




새 게임팩을 샀다는 친구들이 바쿠고에게 몰려들어서 너도 이 게임 샀어? 하고 물어댔다. 바쿠고는 귀찮다는 듯 쳐냈다.


"안 샀다고. "

"너 백 점 맞았잖아. 그럼 너네 엄마가 사주지 않아?"

"이번엔 안 샀다고."

"그으래?"


단번에 이 골목대장에게 제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으스대기 시작하는 친구가 재수없고 얄미워서 가볍게 주먹질을 했다. 넘어져 엉어 우는 친구와 주먹을 꼭 쥔 바쿠고를 하필이면 교실로 올라오고 있던 선생님이 발견했다. 바쿠고는 수업 시간 내내 손 드는 벌을 받아야 했다. 친구는 씩씩거리며 바쿠고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스테이지를 깨지 못한 친구는 슬그머니 바쿠고에게 다가와 게임기를 내밀었다. 나 이거 못 깨겠어. 바쿠고 네가 좀 대신 깨 주라. 아 팔 아픈데. 내가 주물러 줄게. 바쿠고는 관심 없는 척 게임기를 받아들고 보스 스테이지까지 쭉쭉 나아간다. 친구는 입을 헤 벌리고 바쿠고의 손 안에서 신나게 두들겨맞는 보스를 보았다. 팔을 두드리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와, 바쿠고 넌 역시 대단해. 대단할게 뭐가 있냐. 

캇짱은 역시 대단해. 

돌연 바쿠고가 열심히 놀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야. 야 바쿠고! 친구가 다급하게 옆에서 불러댔다. 정신을 차렸다. 이미 용사의 체력이 반절이나 깎여나가 있었다.





기말 시험기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의미에서 밥먹듯이 내 주던 숙제를 내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알림장에 빈 공간이 가득했다. 바쿠고는 교실 늦게까지 남아서 빈 칠판을 바라보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숲으로, 오락실로 달려가던 친구들은 부모님들의 불호령으로 인해 학원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노을이 길게 진 하교길을 혼자 터덜터덜 걸었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골목길 사이로 쓰레기통이 보인다.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까마귀와 투닥거리며 열심히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바쿠고는 잠시 멈춰섰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다 식은 가츠동을 전부 쓰레기통 안으로 쏟아버렸다. 바삭했던 튀김이 다 해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방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으로 올라가 방 안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래층에서 집에 돌아왔으면 손 씻고 발 씻고 양치부터 하라는 잔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이 났다. 베게의 귀퉁이를 잡아 머리를 감싼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깨냈던 보스 스테이지가 떠올랐다. 바쿠고는 병원에서 돌아온지 약 이주만에 자신의 닌텐도 전원을 켰다. 이미 두 번 올클리어를 끝마친 게임이 펼쳐졌다. 아무렇게나 스테이지를 선택하고 열심히 게임을 하다가, 그것도 지루해져 머리 옆에다 던져두었다. 패배를 뜻하는 음악이 울렸다.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재미가 없었다. 두 번이 올클리어를 했다는 것이 괜시리 짜증이 나 게임팩을 빼버렸다. 


문득 처음 미도리야의 병실에 찾아갔을 때 했던 게임이 떠올랐다. 아직 보스 스테이지를 깨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는 미도리야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 이미 다 깬 게임팩만을 들고 갔었으니까. 서랍을 뒤졌다. 찾는 것은 없었다. 온 방 안을 뒤집어 놓아도 보스가 남아있는 게임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래층에서 바쿠고를 부르다 못한 모친이 열을 내며 아들 방문을 열었다가 그 꼬락서니에 기함했다. 


"카츠키! 너 방이 왜 이래! 엄마가 열심히 청소해 놨는데!"

"엄마 내 게임팩 못 봤어?"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게임 하고 나면 제대로 정리 해 놓으랬지!"

"아 서랍에 없다고."

"그럼 네가 다른 곳에 놓은거 아니야?"

"다른 곳?"

"엄마한테 짜증내지 말고 다시 찾아봐. 밥먹기 전까지 이 방 전부 정리해 놓고, 지금 내려가서 손이랑 발 씻어."


곰곰히 생각하던 바쿠고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장소가 떠올랐다. 

닫히던 문, 뻗은 손, 그 곳 밖에는 없었다.




*




시간이 늦었다. 바쿠고의 모친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바쿠고는 부엌의 동태를 잠깐 살피고선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신발을 신었다. 소리가 작게 나도록 문을 닫았다. 당장 지하철로 달려갔다. 깜박깜박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저편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역 안에서 나왔다. 바쿠고는 연어처럼 그 무리를 거슬렀다. 병원 앞에 있던 지하철 역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다행이다. 모아두었던 용돈 몇 푼을 들고 지하철 표를 끊엇다. 어린아이가 개찰구를 지나는 것을 역장이 유심히 지켜본다. 

지하철이 덜컹거린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빛이 점점히, 그리고 선처럼. 


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벌써 날이 캄캄해졌다. 병원 로비는 조용했다. 그 와중에도 구석에 있는 응급실에서는 의사와 구급차가 왔다갔다 시끌벅적했다. 시선을 잠시 빼앗겼다가 사람이 빠져나간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병실 안에서는 바깥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 아침도 이르게 맞이했고, 저녁도 이르게 맞이했다. 간간히 라디오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쿠고는 조심스레 미도리야의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미도리야는 얌전하게 침대 위에 누워있다. 여름 날 풀 숲 사이에서 독사과를 먹은 공주처럼 누워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못 보던 것이 있었다. 작은 얼굴 위로 짧은 관이 끼워져 있다. 그리고 옆에는 링거와 함께 기계가 하나 더. 급하게 온 지라 몰아쉬는 숨을 들키지 않도록 나누어 쉬면서 제 소꿉친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코에 끼워져 있는 관이 신기해 손을 뻗어 동그란 콧망울을 툭 건드려보았다. 미도리야가 살그머니 눈을 떴다.


병실 안의 불은 전부 껐으면서 블라인드를 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건지, 침대 맡의 창문으로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밤에 보는 미도리야의 눈은 암녹색 빛이었다. 달빛이 물기에 반사되어 마치 밤하늘처럼 보였다. 작은 알갱이같은 것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반딧불이 처럼. 이리저리 빛났다. 미도리야가 빙그레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바쿠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지 않길래, 기다리고 있었어."

"코에 그건 뭐야."


바쿠고가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물었다.


"이거... 몰라. 끼고 있으랬어."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이다 바보처럼 웃었다. 


"코 간지럽다."




"캇짱. 게임팩을 두고갔어."

"알고 있어."

"엄마가 선반 위에 놨대."


바쿠고는 선반 위에 있던 게임팩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미도리야가 맑은 눈으로 바쿠고를 말끄라미 올려다보았다. 바쿠고는 그 눈을 피해 주머니 안의 게임팩을 만지작 거리다 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지껄였다.


"야."

"응 캇짱."

"나 몰래 나왔어."

"몰래?"

"원랜 집에서 공부해야 한단 말이야. 조금 있으면 시험이라 공부해야 한다고."

"으응. 미안해. 그럼 가야하지 않을까?"

"돌아갈 수 있겠냐? 우리 엄마한테 맞으면 엄청 아프다고."

"헤헤."

"뭘 웃어. 진짜야. 등에 손바닥 자국이 난다니까?"


미도리야는 대꾸없이 웃었다. 창백한 볼에 옅은 홍조가 드리웠다. 바쿠고는 발을 꾸물거리다 억지를 부렸다. 


"야. 나 잠와."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천천히 바쿠고의 말을 되새겼다.


"졸리다고."


그럼, 미도리야가 침을 삼켰다. 


"그럼 여기 누울래? 내 옆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야는 무거운 몸을 옮겨 구석으로 붙었다. 침대 위에 두 아이가 누울 수 있을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신발을 벗고 미도리야의 옆에 누웠다. 초등학교에 진학 한 이후에는 아마 함께 누운 것이 처음 아닐까,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서 병원 천장을 보다가 고갤 돌렸다.


미도리야의 눈이 지척이었다. 바쿠고는 숲을 봤다. 여름날의 매미소리가 울리던 숲이 미도리야의 눈 안에 보관되어 있다. 나뭇잎이 스치는 사각소리가 들린 듯 했다. 별자리를 닮은 주근깨가 볼 안에 촘촘히 그려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말랑한 볼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푸석한 감촉에 놀랐다. 

제 볼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미도리야가 가만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비춘 달빛은 이마부터 매끈한 원을 만들다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온다. 미도리야가 눈을 떴다. 바쿠고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별이 있어. 혹은 반딧불이가.


"야 데쿠."


바쿠고가 잠긴 목소리로 미도리야를 불렀다.


"응 캇짱."

"너 예쁘다."


네 눈, 예쁘다.

이제야 알았다. 눈꼬리가 풀어진 두 눈 안의 붉은 홍채를 한참 들여다보던 미도리야가 눈을 사르르 접었다. 둥근 뺨을 따라 눈물이 또르르 굴렀다. 미도리야는 기쁜 듯, 슬픈 듯 웃었다.





비어있는 바쿠고의 손을 잡았다. 바쿠고는 손 잡는 것을 싫어했다. 답답하다면서 미도리야가 손을 잡을라 치면 늘 먼저 쳐냈다. 훌쩍훌쩍 울면서 바쿠고의 옷자락을 잡고 졸졸 쫒아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망설이듯이 조심히 바쿠고의 비어있는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바쿠고는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미약한 힘으로 바쿠고의 손을 잡았다. 바쿠고가 눈을 떴다. 슬쩍 시선을  돌려 미도리야의 손을 바라보던 바쿠고가 제 손을 움직였다.

 

아, 쳐내는구나. 

예상했던 것 과는 다르게 바쿠고는 손을 빼 내고 오히려 자신이 미도리야의 손을 다시 잡았다. 깍지를 끼고 손에 힘을 주었다.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가 났다. 바쿠고의 것은 조금 빨랐지만 미도리야의 것은 조금 느렸다. 바쿠고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동안 미도리야는 들숨을 쉬었다. 때때로 잠에서 깼다. 입 앞에 손을 대 보고서 입김이 느껴지면 다시 내렸다. 미도리야의 등 뒤에 있는 기계가 일정한 그래프를 그렸다. 삑, 삑, 삑, 스산한 느낌의 기계소리가 울렸다. 미도리야는 금새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았다. 굽슬거리는 미도리야의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스쳐보다가 내려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작게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잠시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며 깨어나서, 또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고.




*




선생님은 청소시간에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바쿠고를 보고 화를 냈다. 


"너 왜 벌써 가방을 챙겨? "

"선생님이 가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 아."


이윽고 장기결석생에게 생각이 닿은 선생님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바쿠고는 짝다리를 짚고 마룻바닥을 내려

보았다. 


"그, 미안하다. 그래도 요샌 알림이 없는데 안 가도 되지 않을까. 너도 시험 공부 해야지."


바쿠고는 부루퉁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내가 미도리야에겐 말을 해 놓을 테니까. 알았지? 시험 끝날 때까진 안 가도 돼."


땅바닥이 일렁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줄도 몰랐다. 선생님은 바쿠고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버렸다. 




재미가 없었다. 학교가. 하나도. 수업시간에 사각사각 연필을 놀리던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바쿠고에게 비밀 쪽지를 던졌다. 내용은 사소하게 학교 끝나면 몰래 숲 속으로 들어가 놀자거나, 간식을 먹자거나 하는 그런한 이야기들. 바쿠고는 심드렁히 그 쪽지들을 확인하고 앞으로 던졌다. 애꿎은 아이가 맞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딴 짓 한다 선생님에게 핀잔을 들었다.


야. 바쿠고. 나 이 문제를 모르겠는데.

멍청이냐. 그것도 몰라?

아 모를 수도 있지.

이건,


데쿠도 아는 건데. 말을 하려다 마는 바쿠고에게 앞에 선 아이가 멍청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짜증이 났다. 부글부글 속 안에서 끓었다. 됐어. 내민 공책을 밀쳐내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친구는 무어라 웅얼웅얼 거리다 앞을 떠났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까지 마친 뒤, 담임 선생님이 교실을 떠날 때까지 바쿠고는 교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펼친 알림장은 온전한 백지였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바쿠고는 가장 늦게 일어나 교실 문을 잠그고 하교했다. 힘없는 발걸음에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비명처럼 들렸다. 




그 새 새 게임팩이 나왔다. 진열대 앞에선 최신 모니터에서 대마왕과 싸우는 용사의 모습이 풀 스크린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던 바쿠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게임도 재미가 없었다. 뒤에서 아이들이 바쿠고를 불렀다.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숲에 금지 표시가 붙은 밧줄이 걸렸다. 주인 없는 숲인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자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숲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바쿠고 패거리는 숲에서 쫒겨났다. 입구에 숲지기가 들어섰다. 항상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왔다갔다리 하는 어린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모든 개구멍을 보수해 들어갈 수 있는 구석도 없었다. 바쿠고와 아이들은 그 숲 앞에 서 있다가 단념하고 공터를 찾았다. 길거리 신호등이 깜박였다. 붉은 색 신호가 켜진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바쿠고는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홀렸다고도 볼 수 있겠다. 초록색 그 자체에. 친구가 옆에서 건너지 않고 무얼 하느냐 툭툭 쳤다. 신호가 깜박였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멘트 가득한 길거리다. 

버릇처럼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던 바쿠고가 들고있던 닌텐도를 주머니 안에 쑤셔넣었다.


"야. 나 오늘은 못 논다."

"뭐? 왜에? 오늘 c타 집에서 같이 게임하기로 했잖아."

"시끄러워. 못 논다면 못 노는 거야."

"새로나온 게임이라고. 야 카츠키 너 진짜 안 놀거야?"

"못 논다고."


바쿠고는 날카롭게 외치고 붉은색인 신호등을 건넜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




시험을 봤다. 동그라미 가득한 수학 시험지 뒷장을 돌렸다. 딱 한 개 날카로운 빗금이 그어져 있다. 단순한 계산 실수였다. 선생님은 과도하게 놀란 제스처를 취했다. 이번 일 등은 바쿠고가 아니라 다른 아이라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옆자리 짝이 바쿠고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히 말했다. 


"야 네가 무슨 일이냐. 하날 틀리고."


무표정으로 시험지를 노려본다. 시험은 쉬웠다. 백 점을 놓쳤다. 일 등을 놓쳤고, 게임팩도 놓쳤다. 바쿠고는 시험지를 꼬깃꼬깃하게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선생님은 너희들 공부를 하긴 하는 거냐며, 오답노트를 써오라고 했다. 그게 숙제야. 바쿠고가 눈을 크게 뜨고 교탁 앞의 선생님을 보다 황급히 알림장을 펼쳤다. 공백이 가득한 종이 위에 까만색 비뚤배뚤한 글씨가 새기어졌다. 알림장을 가방 속으로 넣느라 시험지가 구겨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청소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냈다. 저편에 붙은 이름표 하나가 떨어질 듯이 달랑거렸다. 알게 뭐야. 신발을 신고 잠깐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하면서 달려나갔다. 담임 선생님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힘없이 최후의 버티기를 계혹하던 이름표가 떨어졌다. 바랜 이름이다.





병원으로 향했다. 떨리는 기색을 보이기 싫어서 최대한 걸음을 천천히 걸었는데도 금방 도착했다. 병원 로비는 시끄러웠다. 7층 로비도 적당하게 시끄러웠다. 빨간색 가방에 들어있는 알림장의 존재를 되새기며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없었다. 아무도. 적어도 바쿠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텅 비어있는 침대를 바쿠고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발치에 걸려있던 이름표가 없었다. 

수납장 위에 올려있던 과자와 음료수가 없었다.

항상 베게 옆에 놓여있던 교과서와 공책들이 없었다.

잘 때는 머리 맡에 올려두고 잔다던 필통이 없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옆 침대에 있는 아줌마가 TV를 보다가 바쿠고를 발견했다. 고개를 가웃거리다가 그 애, 도쿄의 커다란 병원으로 갔는데 못 들었냐고 물었다. 바쿠고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로 갔어.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서 확실하게 방법을 찾으러. 저번주 즈음 갔는데 못 들었구나. 꽤 친해보이더니. 침대는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불과 환자복이 곱게 개켜져 구석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쿠고는 병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전부 그대로였지만 미도리야가 없었다. 그것 뿐이었다.





얼떨떨하게 병실을 나왔다. 복도 저쪽에서부터 침대 하나가 돌돌 바퀴를 굴리며 바쿠고 쪽으로 다가왔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모양새였다. 모친이 자주 보던 드라마에서도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바쿠고는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 쓴 침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비져나온 손이 덜렁였다. 검버섯 가득 피고 말라깽이 손을 본 적 있다. 부자연스런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은 손은 바쿠고를 사로잡은 채로 복도 귀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스치고 지나간 바람에서 아무 체취가 담기지 않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 흔적의 끝을 쫓으려는 듯 바쿠고는 복도의 어둠에 한참동안 붙잡혀 있다가 간신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럿다. 


꾸욱 버튼을 누른 손가락을 떨구려던 찰나에 뒤에서 간호사가 바쿠고를 불렀다. 너, 얘.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르고 한참 올라오는 숫자를 보다가 얘, 너 714호 환자 친구?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걔가 이걸 주고갔어. 너한테 전해달라고."


간호사는 박스를 내밀었다. 받아들었다. 엄마에게 졸라서 샀다는 닌텐도 박스였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간호사가 가 보라며 손짓했다.




*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바쿠고는 초록색 닌텐도의 버튼을 눌렀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게임기가 켜졌다. 스테이지1도 다 깨지 못한 게임이 나타난다. 박스 안에는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준 게임팩이 전부 들어있었다. 하나 하나 꼽고 빼 가며 게임팩을 살폈다. 모든 게임이 스테이지 1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끔가다 2에서 주인공이 깜박거리는 게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거의 전부가 그랬다.


닌텐도를 껐다. 미도리야는 자신이 게임을 하는 것 보다 바쿠고의 옆에 붙어서 바쿠고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는걸 더 좋아했다. 바쿠고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친구가 저를 찾아와준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기뻐했다.

애시당초 미도리야는 게임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




그 날 밤은 꿈을 꾸었다. 바쿠고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밖에 없었다. 초록색 녹음이 한창이었던 여름이었으니까. 매미 소리가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바쿠고는 제 뒤를 따르는 탐험대를 전두지휘하며 걸었다. 맨 뒤에서 미도리야가 쫑쫑 따라왔다. 모두가 곤충 채집통과 잠자리채 하나씩을 들고 있었지만 바쿠고는 잠자리채 하나 뿐이었다. 바쿠고 몫의 채집통은 미도리야가 두르고 있었다. 


바쿠고 탐험대는 뛰었다. 미도리야 또한 따라 뛰었다. 잔가지를 밟으며,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뛰었다. 모두가 사슴벌레, 사마귀를 잡겠다고 할 때 미도리야는 잠자리를 잡겠다며 뛰었다. 바쿠고는 꿈 속 미도리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비처럼 뒤었다. 폴짝 폴짝, 하늘 저 너머로 떠나가버릴 것 처럼 잔가지를 밟으며 잘도 움직였다.


아,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미도리야는 까진 무릎을 호호 불었다. 피가 주르륵 났다. 울먹이던 미도리야가 굳세게 눈물을 닦았다.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든다. 바쿠고는 미도리야 앞에 서 있었다. 

건강하게 모두를 따라 뛰어다닐 수 있는 미도리야를 내려다본다. 손을 내밀었다. 둥그런 눈이 커져 바쿠고의 얼굴과 손을 왔다갔다했다. 그래도 바쿠고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그것이 저에게 내밀어진 손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도리야가 허둥거리며 잠자리채를 왼 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 바쿠고의 손을 잡았다. 손은 축축했다. 바쿠고는 그 손을 고쳐서 깍지 껴 잡았다.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불렀다. 


"바-보."

"캇짱."

"바보- 데쿠이즈쿠."



미도리야는 제 이름을 듣고 활짝 웃었다. 흔들리는 녹음, 태양처럼, 푸른 여름과 같이, 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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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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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가깝다는 이유 만으로 토도로키와는 소꿉친구 사이였다. 사실 그렇게 가깝다고 말 할 수도 없는 것이, 토도로키 저택과 미도리야의 집은 걸어서 한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였고, 둘이 만나던 중간지점-놀이터-는 토도로키 저택에선 삼십 분, 미도리야의 집에서는 십오 분이 조금 안되던 거리인지라. 아버지 되는 사람이 시끄러운 것을 워낙 싫어해 그렇다고 모친 되시는 토도로키 부인이 말을 했더랜다. 어린 토도로키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부여잡고 쭈뼛쭈뼛 걸어왔던 그 날을 미도리야는 어렴풋이 기억 한다. 애가 낯을 가려서. 칼로 생일 케이크를 잘랐나. 반 절 딱 맞게 갈라진 머리카락을 하고 낮선 환경에 울먹이던 남자아이는 어머니 뒤로 휙하니 숨어버렸다. 이럼 안되는데. 모친이 곤란한 얼굴로 토도로키를 달랜다. 쇼토. 친구들이랑 놀아야지. 새 친구의 등장은 놀이터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슬금슬금 다가오던 아이들은 계속되는 모자의 실랑이를 잠깐 지켜 보다가, 흥미가 식은 듯 다시 저희들 놀던 미끄럼틀 그네 시소로 흩어졌다. 


그때까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돌리지 못했던 것은 미도리야 하나 뿐이었다. 뒤로 숨은 친구를 고개 쭉 빼고 빤히 보다가, 벌떡 일어서서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곤 어머니께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 엄마. 나 저 애랑 놀고싶어. 그럼 가서 함께 놀자고 말 해 보렴. 푸르스름한 녹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굽슬거리는 단발 한 쪽을 쫑쫑 땋은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에게 달려갔다. 저기 너 나랑 놀지 않을래? 저편에서 혼자 흙장난 질을 하던 친구가 볼멘 소리를 한다. 난 이즈쿠랑만 놀고 싶은데. 모친 뒤에 숨은 토도로키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동그랗게 눈을 떴다. 미도리야는 머리를 긁적이며 글쎄, 나는 모두랑 놀고 싶은데. 라고 말했다.

정확히 십 분 뒤 남자아이 하나와 여자아이 둘이 흙장난을 하는 광경이 놀이터 한 구석에서 당연한 것처럼 섞여 들어가 있었다. 저희 아이가 워낙 낯가림이 심해요. 제 딸은 눈물이 많은걸요. 어머니들은 즐거이 노는 자식을 지켜보며 이온음료 한 모금씩들을 하신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가 하는 손장난을 따라했다. 미도리야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며 답싹 손을 잡아서 배배 꼬았다. 


토도로키는 종종 놀이터에 나타났다. 모친의 손을 잡고 모습을 보일 때 마다 무릎이 까지거나, 얼굴 한쪽에 반창고를 붙였거나, 하여튼 몸 여러군데가 깨져서 왔는데, 미도리야는 처음 반창고를 덕지덕지 달고 나타난 토도로키를 본 뒤 얼굴이 새파래져선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토도로키를 만난 횟수가 한 손을 넘어 가서야 눈물 방울 조금 매달고 아프지 않았어? 오늘은 괜찮았어? 묻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토도로키는 그 때 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로키가 놀이터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그네타기였다. 미도리야는 높은 곳을 무서워 했고 치마을 입었을 때에 남자아이들이 팬티 보인데요, 팬티 보인데요 워낙 놀려 냈었기 때문에 토도로키의 뒤에서 밀어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고사리 같은 힘으로 하나 둘 밀어주곤 헥헥거리면서 옆 그네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 친구가 아니라 꼭 누나처럼 느껴질 만큼.  




2

미도리야는 흙장난을 좋아했다. 땅을 파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강을 만들고. 자기만의 작은 나라를 만든 뒤의 성취감을 즐기곤 했는데 짓궂었던 남자아이들이 그것을 가만 냅둘리 없지. 미도리야의 작은 성은 완성되기도 전에 부서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럼 몇 번을 다시 만들다가 제 풀에 지쳐서 훌쩍훌쩍 울기도 하고, 도망가는 남자아이들을 미워 죽겠다며 쫒아가기도 해 보고. 어느 때는 토도로키가 대신 때려준 적도 있었다. 엉엉 울며 놀이터 밖으로 사라졌던 아이가 덩치 큰 제 형을 데려 왔을 때 미도리야는 겁에 질려 토도로키의 옷을 끌었다. 쇼짱. 우리 가자. 무서운 사람을 데려 왔잖아.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그리고? 흠씬 두들겨 맞았지. 물론 토도로키가. 꼬맹이 주제에 악이 그득한 눈빛을 하고 끝까지 두꺼운 주먹을 물어 뜯다가 이에서 피가 났다. 입술이 찢어져 줄줄 흐르는 피를 본 미도리야가 시끄럽게 울음을 터트리니 그제야 어른들이 이놈 하며 쫒아왔다. 때린 아이는 도망을 갔고 우는 여자애와 바닥에 넘어져선 씩씩거리는 남자애를 본 어른의 심정이 어땠을까. 


병원으로 가는 내내 미도리야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점점 험상궂게 변하는 제 아버지 얼굴을 발견한 토도로키가 미도리야를 꼭 끌어 안았다. 내가 아픈데 왜 네가 울어. 쇼짱 아파? 흘러넘치기 시작한 눈물을 보곤 토도로키는 아차, 싶었던지 아니 전혀 안 아파. 찢어진 입술로 웃었다가 상처가 터져 또 피를 줄줄 흘렸다. 

병원 로비에 앉아서 다리를 덜렁이며 기다렸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고, 토도로키도 미도리야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헐레벌떡 뛰어온 미도리야의 어머니는 토도로키의 부친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제 부친이 친구의 어머니에게 애 교육좀 똑바로 시키라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본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손을 잡고 병원의 로비를 떠났다.




3

토도로키는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 때때로 미도리야와 또래 친구가 하얗고 파란, 똑같아 뵈는 옷 입은 것을 보고 모친에게 물었다. 이즈쿠랑 저 애는 왜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 유치원에 다니기 때문이야. 유치원이 뭐야? 쇼토같은 아이들이 다같이 모여서 공부하는 곳인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선생님도 계시고. 토도로키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나는 왜 유치원에 안 가는 거야?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않다가 나중에 아버지 오시면 물어보자. 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토도로키는 그 날 저녁 부모님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어야 했다.


홈스쿨링이라고들 하지. 토도로키의 경우엔 학대에 가까웠지만. 부친은 아들의 적성과 능력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교육을 시켰다. 모친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며칠 뒤 토도로키의 부친은 비뚜름한 표정으로 아들을 유치원 문 앞까지 데려다 놓았고 두리번 거리는 토도로키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달려온 것도 미도리야였다. 샛노란 모자를 쓰고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토도로키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말았다. 

부친은 출근길에 토도로키를 유치원 안으로 던져 놓았다. 아침 일찍 유치원에 도착해서 동화책을 읽다가 아이들이 오는 시간이 되면 시계 초침이 째깍째깍 한 바퀴를 돌 동안 몇번이나 문을 쳐다 보다가, 익숙한 자전거 소리가 들렸을 때 벌떡 일어서 미도리야를 맞이했다. 짝꿍은 당연히 미도리야가 될 줄 알았는데, 제비뽑기로 뽑는단 사실을 알고 울먹였다.

미도리야가 가는 길은 토도로키가 졸졸 따라 다녔다. 귀여운 핀으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와 말 나누는 것을 봤을 땐 조막만한 미도리야의 손을 잡고 질질 끌어와선 왜 쟤랑 놀아. 나랑 놀아. 라고 말 했다가 잔뜩 곤란한 미도리야의 얼굴에 충격을 받았다. 


개성을 나타내는 철이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차근차근 멋들어진 개성을 뽐낼 때 마다 미도리야의 눈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곤 자신도 멋진 개성이 나타나길 얼마나 빌었는데. 개성을 처음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미도리야였다. 반랭 반열의 개성을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축하해 쇼짱. 쇼짱은 분명 멋진 히어로가 될 수 있을 거야. 토도로키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날 미도리야는 혼이 빠진 얼굴을 하고 유치원에 왔다. 미도리야는 무개성이란다. 무개성? 무개성이 뭔데? 종알거리던 아이들은 당연히 있어야 할 축복이 조막만한 여자아이에게는 깃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이전보다 더 심하게 놀리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싫고 미원던 토도로키가 항상 미도리야의 곁을 맴돌며 막아섰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어떻게 비춰졌는지는 모른다.


어느 날,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등을 밀치면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개성이 없어도 혼자 싸울 수 있단 말이야. 쇼짱 미워. 분에 차서 저를 쳐다보지도 않는 미도리야를 잡지도 못하고. 토도로키는 그 날 저녁에 집에 돌아가 밥을 먹지도 못하고 끙끙 마음앓이를 했다.

그리고 미도리야가 초콜릿을 내밀며 사과했다. 미안해 쇼짱. 쇼짱은 내가 좋아서 그랬던 거래. 맞아? 천진난만하게 물어오는 미도리야에게 토도로키는 우물우물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그 말을 듣고 미도리야가 활짝 웃었다. 나도 쇼짱이 정말 정말로 좋아.




4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단다. 미도리야와 토도로키의 헤어짐은 갑작스러웠다. 햇빛이 유독 쨍쨍했던 날 유치원에 갔더니 토도로키가 없었다. 선생님 왜 쇼짱이 안 와요? 물었더니 이제부턴 쇼토가 유치원에 오지 않는다고. 미도리야는 하루종일 멍하니 있다가 낮잠시간 몰래 유치원을 빠져나왔다. 겁이 참 많았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물어 물어서, 혹시 너 길 잃었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뇨, 친구 찾으러 가요. 또랑또랑하게 외쳤다. 그러면 곧잘 어디로 가야 한다고 말을 해 주었다. 헥헥 숨을 뱉으며 토도로키 저택에 도착한 미도리야는 입을 떡하니 벌렸더란다. 고래등같이 어마어마하게 큰 집이다. 제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초인종을 폴짝폴짝 뛰어서 간신히 눌렀는데 한동안 사람이 나오질 않아 한참을 기다리고. 다시 뛰어 몇 번을 꾹 꾹 누르니 그제야 고용인이 귀찮은 얼굴로 나와 두리번 두리번 밑을 보았다. 샛노란 병아리 모자가 두둥실 허공을 떠 다니는 것 같은 모양새라, 코웃음을 치면서 주먹만한 여자아이를 훑었다. 


저, 저 쇼짱 안에 있나요? 도련님 안에 있다. 쇼짱 어째서 유치원에 안 왔어요? 아프다. 어디가 아픈데요? 아프면 아픈거지 요 꼬맹이가 말이 많구나. 미도리야는 겁을 먹었다. 덩치 큰 고용인 아줌마가 무섭기도 했는데 토도로키가 아프다니. 저 때문에 입술이 찢어졌던 날이 떠올라 침을 꿀꺽 삼켰다가 그럼 쇼짱을 못 만나나요? 하고 물었다. 그럼 못 만나지. 너무 아프다고 소리소리를 지르시는데 네깟 꼬맹이가 무얼 어쩌려구. 그럼, 쇼짱이 조금 덜 아파하면 이즈쿠가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꼭. 꼭이요. 제멋대로 약속을 받아내곤 다시 씩씩하게 유치원으로 돌아갔는데, 고용인은 당연하게도 말을 전해주지 않았고 미도리야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서 저녁까지 헛단길을 뱅뱅 돌다가 지나가는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눈물이 많은 어머니가 미도리야를 끌어안고 펑펑 울면서 다시는 함부로 어디 가지 말아라 걱정을 들으며 지쳐 잠이 들었다.




5

토도로키는 유치원에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6

토도로키가 놀이터에 나오는 시간은 조금 늦었다. 날이 저물고 아이들은 밥 먹으라는 소리에 한 둘씩 먼지묻은 손을 씻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미도리야는 점점 어두워지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때로는 미끄럼틀 위에 앉아서, 시소 위를 균형잡으며 왔다갔다 수십번 하기도 하고, 뱅뱅이를 혼자 돌리다 지쳐 나무 의자 위에 누워있기도 하고, 구름 다리 위에 다리를 걸치고 대롱대롱 매달려 저 멀리 보이는 놀이터의 입구를 보았다. 그리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시무룩하게 슬금슬금 집에 갈 준비를 했는데, 그때 쯤 토도로키가 힘없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첫 날엔 토도로키의 왼쪽 눈을 가린 붕대가 생소해 오히려 저가 쭈뼛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걸지 못했다. 혹시라도 마음 여린 토도로키가 이제부터 나오지 않는건 아닐까 괜시리 하루 종일 발을 동동거리며 걱정 하다가 다시 나타난 토도로키를 만난 이후론 어색함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토도로키는 부쩍 말수가 줄었는데, 그래도 미도리야를 만날 동안엔 때때로 이전 같은 웃음을 보였다. 


쇼짱 왜 유치원에 안 나왔어? 

병원에 있었어.

왜 쇼짱네 엄마랑 같이 안 왔어?

엄마는 병원에 갔어.

쇼짱 많이 아파?

응. 많이 아파.

울 만큼 아파?

많이 울었어. 또 울고 싶을 만큼 아파.


그 말을 듣고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곁에 꼭 붙어 앉았다.



네가 아픈 것 만큼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쇼짱이 더이상 안 아팠으면 좋겠어.

그럼 너희 엄마가 걱정할 텐데.

나는 건강해서 금방 나아.


씩씩하게 웃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고 토도로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다가, 울었다. 쇼짱. 웃다가 울면은 엉덩이에 뿔난대. 미도리야도 따라 웃다가 눈물을 주륵 주륵 비처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울면서 웃었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는데, 울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웃었다. 머리 위로 총총히 박힌 별이 빛났다. 한참을 서로에게 기대 있었다.




7

오늘은 유치원 N코랑 놀았어. 그 애가 내 머리핀이 멋지다고 했어. 그래서 쇼짱한테도 보여주고 싶었거든.


내민 브이자 모양의 머리핀을 본 토도로키가 발갛게 붉어진 눈으로 웃었다. 


정말 멋있다. 

이거 쇼짱한테 줄게.

나는 남자앤걸. 이런거 할 수 없어.

아니 아니, 내 소중한 거니까 줄 거야. 이게 널 안 아프게 해 줄거야.


히죽, 이가 다 보이게 드러내곤 미도리야가 한껏 밝게 웃는다. 나는 오늘 아버지, 한테 훈련을 받았어.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더 받아낼 수 있는지 하루종일 훈련장을 굴러다녔어. 나중에는 팔이 얼어서 덜덜 떨렸어.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쇼짱은 괜찮을 거야. 별이 우수수 떨어졌다. 토도로키의 색 다른 눈동자 틈틈히 별이 내렸다.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토도로키가 제 이마를 문질렀다. 하늘이 온통 녹빛으로 빛났다. 미도리야의 눈은 밤 하늘을 닮았고, 밤 하늘은 미도리야의 눈과 꼭 닮았다.




8


유치원 졸업장을 들고 씩씩하게 웃었다. 우리 딸이 언제 저렇게 컸지. 눈물 많은 어머니가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노란 병아리 모자를 벗어 던진 미도리야는 집 근처의 초등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간절히 바란 기도를 하늘 위의 누군가가 들어 주었는지. 젊은 담임 선생님이 학기 첫 날 차근차근 출석부를 읽어 내려가던 도중에 토도로키 쇼토란 이름이 튀어 나왔다. -의무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나라에서 잡아간다- 출석을 불렀을 때 대답하는 이가 없어서 미도리야는 교실 안을 둘러 보았다. 소꿉친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야는 자기 소개 시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순간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는 것은 물론이요 저를 바라보는 수십개의 시선에 땀이 비오는 것처럼 흘렀다. 더군다나 나는 무슨무슨 개성이에요! 라고 당당히 말하는 친구들 틈 사이에서 쭈뼛이 나는 무개성이라 말 하면은 당장에 저를 보는 눈빛이 달라지곤 해서. 


미도리야 이즈쿠. 개성은 없어요. 더듬더듬 말하곤 익숙한 시선에 잠깐 몸을 떨다가, 자리에 앉았다. 쉬는 시간에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미도리야를 둘러싸고 물어 보았다. 이즈쿠 정말 개성이 없어? 응, 없어.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아. 난 개성이 없는게 개성이래. 개성이 없다며 울던 미도리야에게 유치원 선생님이 애써 해 주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면서 웃었다. 아이들은 꺼림칙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이내 금방 잊었다. 친구는 금방 생겼다. 함께 도시락을 먹을 친구,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오는데 수다를 떨 친구, 체육시간에 함께 체조를 할 친구도 생겼다. 


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 째 되는 날에 미도리야는 토도로키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토도로키는 학교에 나오질 않았고 토도로키의 집을 아는 것은 미도리야 뿐이다.


쇼짱 있어요?


예의 그 고용인이 나온다. 고용인이 미도리야를 보고 사람좋게 웃었다.


또 네가 왔구나.


미도리야도 헤죽 웃으며 대답했다.


쇼짱하고 저 같은 반이에요.

그래? 참 나, 기막힌 우연이네. 어째 도련님과 너는 떨어지질 못하니. 도련님은 안에 있는데 수업을 받고 있어서 못 만날 것 같네.


미도리야는 가방에서 익숙하게 주섬주섬 프린트 뭉치를 꺼냈다. 이거 학급 프린트인데 쇼짱에게 전해주라고 해서. 고용인이 프린트 뭉치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야는 저를 기다리는 친구들에게로 달려간다.




9


토도로키는 드문드문 학교에 나왔다. 교실 문 안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어색했다. 같은 반 이라고 했어. 교실 문 앞에 서서 두리번 거리며 미도리야를 찾는다. 미도리야는 교탁 앞에서 수다를 떨다가 토도로키를 발견하곤 단번에, 활짝 웃었다.


어서 와 쇼짱. 오늘은 학교 오는 날이야?

응 오늘은 가도 된다고 했어.


미도리야의 뒷편 빈 자리에 토도로키가 앉았다. 얼마 있지 않아 수업이 시작은 되었는데. 지루한지 줄곧 창문 바깥을 보다가 제 앞에 앉아서 열심히 칠판을 보는 미도리야의 등을 손가락으로 톡 톡 쳤다. 미도리야가 돌아보면은 고개를 갸웃 하면서 모른 척 하고. 몇 번을 그렇게 했더니 선생님이 미도리야더러 수업을 방해한 죄로 뒤에 나가 서 있으란다. 억울함이 잔뜩 묻은 얼굴로 나가는 발걸음에서 쿵 쿵, 분노가 느껴졌다. 토도로키가 몸을 움츠렸다. 잘못을 했나.


쉬는 시간 눈도 마주치지 않는 미도리야의 뒤를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사과했다. 미안해 이즈쿠. 내가 잘못 했어. 심심해서 그랬어. 그게 널 괴롭히는 건 줄 몰랐어. 반을 한바퀴 돌고 일층 복도를 한바퀴 돌고 운동장도 한바퀴 돌았는데 토도로키는 좀 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차마 끝까지 무시로 일관할 수는 없었던지 미도리야가, 화장실까지 쫒아오면 어떡해! 알겠어. 알겠다니깐!! 노을빛으로 발갛게 물든 얼굴로 외쳤다.




10


토도로키는 알게 모르게 착실히 적응 해 나갔다. 학교에 오는 날이 손에 꼽도록 드물었음에도 반 아이들은 토도로키를 잘 따랐다. 개성 탓이 없지 않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남자아이 이름을 꼽으며 꺅꺅 부끄러움을 외칠 때 마다 토도로키의 이름은 빠짐없이 들어갔다. 


이즈쿠는 좋아하는 남자애 있어?

응? 없는걸.

거짓말. 토도로키군이랑 만날 붙어다니면서.

엣. 쇼짱은 쇼짱일 뿐이구. 만날도 아닌데.

토도로키군이 학교에 올 때마다 같이 다니잖아!

그거야 쇼짱이랑 친한 친구가 나밖엔 없으니까 그렇지.


순진무구한 미도리야의 대답을 듣고 T코가 뾰로통하게 물었다.


토도로키군도 이즈쿠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아?

아니, 좋아는 하구.

거봐!


대책없이 빙빙 도는 대화에 미도리야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모른다. 정말 친구인데. 좋아한다랑 좋아한다가 다른거야? 도대체 뭐가? 그리고 학년이 바뀔 때 마다 빠지지 않는 물음이란. 이즈쿠 너 토도로키 군이랑 친하다며? 혹은 이즈쿠 너 토도로키랑 유치원 때 부터 함께 다녔다며? 그럼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넌 토도로키가 무섭지 않아?

그, 얼굴에 흉터도 있잖아. 가까이서 보니까 조금 징그럽던데.


미도리야가 발끈했다.


난 하나도 안 징그러워. 쇼짱이 얼마나 잘 생겼는데. 쇼짱 좋아하는 사람들 많아. 좋아하는 것도 많고. 미끄럼틀 타는 것도 좋아하고, 그네 타는 것도 좋아하고, 모래성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아니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고. 또, 또. 열 손가락을 하나 하나 접어 가면서 좋아하는 것을 꼽다가 마지막엔 결국 웃으며 말했다. 나랑 같이 좋아하는게 이렇게 많은데 무서울 리가 없잖아. 나도 쇼짱을 좋아하고, 쇼짱도 나를 좋아해.




11


한여름이었다. 몇 주 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던 토도로키는 여름 방학을 한 주 앞두고 학교에 나타났는데, 몰골이 워낙에 처참했던지라 감히 학급 안의 누구도 토도로키에게 말을 걸 생각을못했다. 미도리야는 소식을 듣자마자 단숨에 달려왔다. 토도로키가 익숙한 발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딱 다섯 걸음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리며 피곤죽이 된 소꿉친구를 저도 모르게 훑었다. 


흉터가 있던 얼굴 반쪽에는 빈틈없이 거즈가 붙었다. 미도리야의 눈과 똑같은 색-고민해 보면 조금 다른-의 눈 위엔 안대가 덮였다. 다른쪽 얼굴도 성치는 않았다. 토도로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입술이 찢어졌던 흉터가 미세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까짓 것은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멍이 그득했다. 파랬다가, 보라색으로 변했다가, 노랗게 물든 멍도 그렇고,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이었다. 겨울 눈 같다, 예뻐 칭찬했던 하얀색 부분이 잘려나가 비죽한 모습이 볼품없었고,  그나마 붉은 부분은 멀쩡하다. 팔 한쪽 둘둘 말린 것은 깁스였다. 그 꼴로 용케 웃다가 아픔에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절뚝 절뚝 걸어서 미도리야의 한 걸음 앞에 섰다. 


나 왔어. 이즈쿠.


갈라진 목소리로 불린 제 이름을 듣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애써 웃어뵈며 대답한다.


오랜만이야 쇼짱. 학교에 왔구나.




담임 선생님은 토도로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부친이 미리 학교에 언질이라도 넣은 것인지. 토도로키쪽엔 애써 시선을 두지 않으면서, 덩달아 미도리야가 수업 내내 책상 위로 고개를 떨군 것도 보질 못했다. 


체육 시간 토도로키는 체육복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미도리야도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급우들은 반에 남은 미도리야가 걱정되었는지 공을 들고 나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수업종이 울렸다. 조용해지자 먼저 말을 건낸 것은 토도로키다.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책상 위로 엎어진 미도리야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들은 척도 안 하잖아. 그래서 화를 냈더니, 이렇게.


토도로키는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지만 미도리야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즈쿠. 화 났어?


토도로키가 묻는다. 미도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날 봐줘.


말투는 덤덤했지만 간절한 기색이 역력한 부탁에 미도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물이다. 물이 가득했다. 눈에 담긴 작은 연못을 감당하지 못했는지 미도리야가 연신 눈을 훔치며 훌쩍 훌쩍 울음을 참고 내뱉길 반복했다. 토도로키가 물었다. 이즈쿠. 왜 울어? 미도리야가 입을 한껏 일그러트렸다가, 간신히 웃었다. 그러게. 아픈건 쇼짱일 텐데.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에게 손을 뻗다가 멈칫 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미도리야의 팔을 내렸다. 울지 말아. 눈물 방울 안에 별이 담겼다. 은하수 같은 눈을 하고선 미도리야가 노랗고 보랏빛인 토도로키의 얼굴을 본다. 슥슥 마저 문지르곤 퉁퉁 부어 활짝 웃었다.


쇼짱 대신 우는거야.




12


미도리야와 토도로키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전철 표를 끊었다. 심부름 하고 거스름돈 받은 건데, 엄마가 줬어. 어디로 가야할 지는 몰랐다. 엉망진창의 토도로키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만 돌아 본다.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손을 꽉 잡았다. 선로 앞 의자에 아무말 없이 앉아 있다가 이름 모를 곳으로 간다는 열차가 들어 왔을 때 냉큼 올라탔다. 자리가 없어서 한동안 손잡이를 꼭 붙잡고 서 있다가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보다 키가 작았기에 미도리야의 옷을 잡고- 자리가 하나 나자 토도로키를 앉혔다. 철컹 철컹 열차가 움직인다. 길게 늘어선 집을 빠르게 스쳐지나고, 평야를 지나고, 눈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전선을 한동안 바라 보다가 정신을 차리니 커다란 강이 창문 가득히 펼쳐져 있다.


쇼짱 저길 봐. 강이 참 커.


토도로키가 대답한다.


저건 강이 아니라 바다야.

바다?


미도리야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토도로키에게 물었다. 응. 바다. 토도로키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열차는 한참을 더 달리다 높은 건물도 집도 드문드문 없는 곳에 멈춰섰다. 종점이란다. 차장이 아이 두 명을 의아하게 내려다 보았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는다. 토도로키도 미도리야의 손을 마주 잡았다. 토도로키는 걸음이 느렸다. 아마 다친 다리 때문인 것 같았는데, 절뚝 절뚝 힘들게 걷는 통에 미도리야가 두 걸음 걷다 쉬고, 세 걸음 걷다 쉬어야 했다.

날이 저물었다. 갈 곳은 없었다. 여름인데. 도심을 벗어나니 날이 싸늘해져서는. 토도로키가 몸을 떨었다. 동전 몇 개를 꺼내여 불이 깜빡깜빡 하는 자판기에 넣고 따뜻한 음료를 뽑아 건내주었다. 이렇게 멀리 온 건 처음이야. 나도 처음이야. 손을 잡고 터벅터벅 비포장 도로를 걸으며 둘은 많은 말을 했다.


쇼짱은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싶어?

엄마를 지키고 싶어.

그거 말구. 다른거 말이야.

다른거?

응. 티비에서 나오는 의자나 간호사나, 뭐 그런거.

나는,


토도로키가 잠깐 말을 쉬었다.


히어로가 되고싶어.

히어로.

응. 올마이트 같은 히어로.

나도. 나도 올마이트가 좋아. 나 개성이 없어서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게다가 여자애잖아.

그렇지 않아 이즈쿠. 이즈쿠는 히어로가 될 수 있어.


이렇게 나를 구해 줬는걸. 돌아본 토도로키의 눈이 더없이 예쁘게 반짝였다. 가슴이 괜시리 두근거려서 혹시 감기에 걸린건 아닌가 싶었다. 엄마가 밤엔 따뜻하게 입으랬는데. 미도리야가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을 본 토도로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즈쿠 꼭 토마토 같아.


정말 될 수 있을까? 올마이트 같이 초 멋진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구한다면 이미 히어로야.

응. 그럼 나 쇼짱이랑 같이 히어로가 될래.


한참 걷다가 토도로키가 철푸덕 넘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나, 좀처럼 일어나질 못해서 미도리야도 그냥 그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있잖아 이즈쿠.

응 쇼짱.

난 엄마만큼이나 이즈쿠를 좋아해.

나도 쇼짱을 좋아해.

반 애들이 자꾸 내가 이즈쿠를 좋아하냐고 물어봐.

나도, 나도 자꾸 쇼짱을 좋아하냐고 물어봐.

그래서 뭐라고 했어?

좋아한다구 했지. 그랬더니 T코가 엉엉 울었단 말야.

좋아한다가 달라?

모르겠어. 다른가? 쇼짱은 알아?

아니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이즈쿠를 계속 좋아할 거야.


...

그날 말야. 놀이터에 내가 처음 간 날.

응. 그 날. 쇼짱이 엄마 뒤에서 숨어 있던 날.

아냐 안 숨어 있었어.

숨어 있었어!

안 숨어 있었어!

숨어 있었다구!! 


옥신각신 숨었니 안 숨었니 다투던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날 이즈쿠가 나랑 같이 놀겠다고 해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손 틈 사이로 깍지를 꼈다.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에게 머리를 기댄다. 쇼짱 나 잠와. 피곤할 만도 하지. 토도로키는 모친이 제 등을 두드려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어색히 미도리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먼 길을 걸어 온 소녀의 머리가 꾸벅꾸벅 기울어지다가 이내 소년에게 작은 온기를 맞기곤 잠이 들었다.


온 몸이 전부 두들겨 맞은 듯이 욱신거렸다. 사실 두들겨 맞은게 옳기는 하다만은. 토도로키가 조심스레 다리를 폈다. 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은 부친이 내어준 숙제, 혹은 대련을 완벽하게 끝내었을 때 뿐이다. 학교 자체에는 그렇게 큰 미련이 없었다. 다만 저를 맞이해 주는 미도리야가 보고 싶었다.

항상 창 밖으로 미도리야가 돌아가는 것을 봐 왔다. 친구가 생긴 걸 보고 조바심도 내 보고 질투도 해 봤는데, 전할 방법이 없었다. 송곳처럼 저를 찌르는 시기심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서 미도리야를 보면 터트려 버려야지, 터트려 버려야지 생각을 했는데. 반 안에 들어서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는 순간 허망하게도 푸시시 바람이 빠져 버렸다. 웃는 얼굴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보라색과 초록색이 어지럽게 섞인 밤하늘은 별이 보이지 않고 구름이 끼었다. 날이 추운 것도 이유가 있었구나. 토도로키는 밀려오는 피로에 까무룩 눈을 감았다.




13


아이들의 철없는 일탈은 금방 탄로났다. 왔다갔다 하는 빛에 번쩍 눈을 떴을 때에는 순경 여럿이 이미 미도리야와 토도로키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쇼짱, 벌써 아침이야?


그리곤 꼼짝없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애들 둘이서 어쩌다 이런 시골까지 왔는지. 어른들은 토도로키의 몰골을 보고 수군거리다 집에 연락이 닿자 입을 싹 다물었다. 보호자가 오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미도리야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와는 반대로 토도로키의 부친은 토도로키를 보더니 두말 않고 다짜고짜 뺨을 후려갈겼다. 작은 몸이 나가떨어졌다. 짝, 하고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찰서 안에 가득히 울려퍼진다. 미도리야가 어머니의 품에서 몸을 빼내어 토도로키에게 달려간다. 입 안이 터져 피가 줄줄 흘렀다. 토도로키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부친이 말한다. 일어서라. 토도로키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일어서. 충격을 받아 바들바들 떨던 미도리야가 저와 마찬가지로 떨리던 소꿉친구의 몸뚱아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부친을 노려본다. 토도로키의 부친은 기가막힌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왜 쇼짱을 괴롭혀요.


형광등 빛이 그득찬 눈이 한점 꺾임없이 부친을 향했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품에서 가만히 숨을 쉬었다. 얄팍한 숨에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딸의 행동에 놀라 황급히 미도리야에게 다가갔다. 이즈쿠. 너 이게 뭐 하는 거야. 미도리야가 제 어머니를 밀어냈다.


쇼짱은 아무 잘못 없어요. 내가 손 잡고 지하철에 탔어요. 내가 같이 바다를 보고 싶어서. 내가 혼자 오기 무서워서 쇼짱한테 졸랐어요. 내가 깜박 졸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내가, 내가 쇼짱 손 잡고 싶어서 같이 걸었어요. 쇼짱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울면 안돼. 자꾸 울음이 새어 나온다. 겁 먹은 것처럼 보이면 안돼. 그럼 더 괴롭힐거야. 언젠가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에게 해주었던 말이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토도로키를 끌어안곤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모아서 부친에게 소리쳤다. 부친의 시선이 미도리야와 제 아들을 왔다갔다 번갈아 보다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래. 쇼토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모든 것이 네 잘못이라 이거지.




14


미도리야는 맞지도, 더 이상 혼나지도 않았다. 미도리야와 토도로키가 일탈에서 돌아온 다음 날 학교에선 미도리야의 뒷 자리에 놓였던 토도로키의 책상이 사라졌다. 토도로키군은 더 이상 함께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수런거렸다. 그리고 미도리야를 보았다. 쉬는 시간에 지독히 물어왔다. 왜 토도로키 군이 오지 않는거야? 이즈쿠 무슨 일이 있었어? 너희 바다에 갔다 왔다며. 왜 토도로키군이 학교에 못 오는 건데? 미도리야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종례가 끝나고, 미도리야는 교무실에 들려 여분의 학급프린트를 한 장 더 얻어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토도로키의 집에 도착했다. 처음 왔을 땐 한참 높아 깡충 뛰어야 했던 초인종이 이제 미도리야의 눈높이에 있었다. 누르고, 기다렸다. 고용인이 나온다. 고용인은 미도리야를 위 아래로 보더니 혀를 찼다.


도련님을 만날 수 없는건 알고 있지?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학급 프린트에요.


건넨 종이에 고용인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손을 뻗어서 미도리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근성 있구나.


미도리야가 베시시 웃었다. 


몇 년 남지 않은 학교생활 내내 미도리야는 봄이 와서 나무에 새 싹이 돋든, 여름 햇살이 내리 쬐어 땀을 뻘뻘 흘리든, 가을 낙엽이 져서 밟는 자리 마다 바스락 소리가 나든, 눈이 내려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든 빠짐없이 토도로키 저택에 들려 프린트를 전해 주었다. 고용인이 두 번 바뀌고 토도로키의 부친을 대문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아랑곳 않았다. 그저 프린트를 전해 주고, 토도로키를 만나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충분했다.


시간이 지난다. 한참 작았던 남자아이들의 키가 여학우를 따라 잡았고 훨씬 웃돌게 되었다. 반에서 중간쯤 가던 미도리야의 번호는-키순이다- 앞으로 밀려나 출석부를 오래 읽지 않아도 금방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체의 변화도 겪었다. 가슴이 몽우리지고, 부풀어 오르고, 달거리를 경험한 직후 엄마 나 죽는다며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팥밥을 우물거리며 이젠 여자애 답게 행동하라는 엄마의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와는 별개로 히어로가 되겠다는 꿈은 진행형이었다. 노트 한 권에 적은 히어로가 수십 명, 그리고 그런 노트가 몇 권 더 쌓였을 때 쯤 미도리야는 졸업장을 받았다. 


이상 육 년간 하루도 빠짐 없이 학교를 나왔던 학우들에게 바치는 축가입니다. 미도리야는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토도로키와의 가출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전혀 하지 않았다. 손에 졸업장을 꼭 쥐고서, 만세를 외치듯 기지개를 켰다. 세상이 온통, 반짝반짝 빛난다.



15


집 근처의 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에 나쁘지도 않았고, 거리도 멀지 않았다. 교복은 검은색 세라복이다. 치맛단이 조금 짧은 것 같아, 방 안에서 교복을 입곤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자꾸만 거슬리는 치맛단을 손으로 꾹꾹 눌러 내렸다. 붉은 색 스카프까지 완벽하게 구색을 갖추고 목도리를 둘둘 둘러 맸다. 한창 겨울 날씨라 춥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구겨 신고 있으니 어머니가 빼꼼 고개를 빼곤 물어왔다.


어딜 가니, 이즈쿠?


미도리야가 잠깐 멈춰섰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쇼짱 만나러 가요! 




16


발걸음이 가볍다. 익숙한 길을 지나 익숙한 코너를 돌아서, 익숙한 대문을 그냥 지나친다. 어릴 때는 고래 등짝만한 집이었는데 커서 봐도 똑같네. 처음 보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이 근처에 공원이 있다고 했어.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눈 쌓인 거리를 둘러보던 미도리야의 얼굴이 밝아진다. 저 멀리 그리워했던 인물이 보였다. 색이 반절씩 나뉜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자리하고, 잘생긴 얼굴 한쪽을 뒤덮은 흉터에, 시원한 이목구비. 비교적 오랜 시간을 헤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제 헤어지고 오늘 다시 만난 친구처럼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든다. 미도리야를 발견 하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빙그레 웃었다. 토도로키는 가쿠란 차림이었다. 미도리야가 천천히 토도로키에게 걸어가 올려다 보았다. 올려다 본다? 못 본 사이에 토도로키는 키가 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저보다 손가락 두마디 정도는 더 작았는데, 이젠 얼추 가늠하기에도 한 뼘 씩이나 더 커져서는 저를 내려다 보는 것이다. 토도로키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즈쿠, 너 작아졌어.

쇼짱이 큰 거야.


그대로일 줄 알았는데, 바뀐게 있구나.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교복 차림을 보고선 볼을 붉혔다. 많이 예뻐. 미도리야는 칭찬을 듣고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뭐가 예뻐. 못난인데. 둘은 걸었다. 엇갈리고 엇갈려 간신히 시간을 맞추어 잡은 약속이었다. 부친의 히어로 일이 예상치 못한 폭설을 만나 많이 지체된다나. 기회는 드물었다. 미도리야의 얼굴을 기억하고 가끔가다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건네주던 세 번째 고용인은 토도로키에게 말을 넌지시 흘렸다. 서로가 서로를 만나고 싶어 했었으니 약속이 맺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교복을 입고 만나기로 약속했다. 은연중에 서로가 다른 학교를 선택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로 그냥 교복만 입자, 말을 했다. 미도리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쇼짱과 나는 평생동안 친구 할 운명인가봐. 그 말에 토도로키가 따라 웃었다. 키가 많이 자란 것 뿐만 아니라 체격과 얼굴도 듬직하니 아이 티가 조금은 가셨나, 싶었다. 학급 친구들은 워낙 오랜 시간을 옆에서 부대끼며 보냈기 때문에 변화를 보아도 와 닿지 않았건만 토도로키의 변화는 단숨에 느껴진다. 설핏 설핏 스치는 팔과 저를 내려다 보며 지어뵈는 미소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어깨가 넓어졌네.

이즈쿠는 작아졌어.

네가 큰 거라니까. 키가 그렇게 크다니.

우유를 많이 먹었거든.

이젠 까치발을 떠도 쇼짱을 넘어설 수 없게 됐어.


토도로키가 갑작스레 미도리야의 손을 잡았다. 미도리야가 화들짝 놀라선 토도로키를 본다.


옛날엔 항상 잡아 줬잖아.


투정을 부리는 얼굴이다. 익숙하고도 또 그리운 표정에 미도리야가 말 없이 토도로키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항상 보고싶었어.

나도 쇼짱 보고 싶었어.

거짓말 하지 마. 친구들 많이 사귀어서 놀았을 거면서.

응. 사실은 그 말이 맞아.


토도로키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다. 미도리야가 까르르 웃었다. 


그렇지만 내 소꿉친구는 쇼짱 하나 뿐이잖아.



만남은 시침이 초침으로 변한 것 마냥 빠르게 지나갔다. 미도리야가 아쉬움을 삼키며 토도로키의 손을 놓았다. 


또 몇 달 동안 못 보겠네.

괜찮아. 학교에서 매일 볼 수 있으니까.

이젠 학교에서 볼 수 있구나.


볼 수 있어. 만날 수도 있고. 멋들어진 소꿉친구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단 것이 더없이 기뻤다. 토도로키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인사를 했다. 잘 들어가 이즈쿠. 미도리야도 인사를 했다. 학교에서 봐 쇼짱. 손을 흔들고 뒤 돌아 가려던 차에 갑자기 어깨가 훅, 하고 잡아당겨졌다. 갑자기 눈 앞에서 마주하게 된 눈동자가 뜨겁다고 느꼈다.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불에 댄 것 같다. 낮아진 토도로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해. 이즈쿠.

어?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은 예전 소꿉친구 그대로의 모습이라서. 미도리야는 멍청하게 웃었다.


응. 응 나, 나도 쇼짱 좋아해.


토도로키가 만족한 듯 웃는다. 정말로 완전히 뒤 돌아 집으로 가는 길 발걸음에 맞추어 가슴이 쿵쿵  뛴다. 터질 것 처럼 얼굴위로 열이 오른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병이 있나. 어디가 아픈가. 또 감기에 걸렸나. 집에 도착해선 침대에 누웠다. 어디 아프냐는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에 엄마 나 감기 걸렸나 보더라고 대답했다.




17


중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 처럼 재미있지는 않았다. 초등학교의 연장선이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무개성 신고식이라고. 자기 소개를 할 때에 개성이 없단 말을 비뚜르게 듣는 아이들이 있었다. 다 같이 쉬는 시간에 몰려 와 정말 무개성이야? 지겹게 들었던 질문을 했다. 응. 나는 개성이 없어. 라고 대답하니 비실비실 웃는 입매가 영 달갑지 않았다. 학급에는 언제나 미도리야를 놀리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주는 아이들이 있었다. 초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고 생각했다.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체육 시간엔 남자, 여자 따로 나뉘어 수업을 듣는 다는 것 정도. 토도로키와는 다른 반이었다. 학교를 오래 다녀보지 못한 토도로키가 어떻게 수업을 받고있나 궁금해서 근처를 기웃거려 봤는데 여러 아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질문 공세를 받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그럭저럭 잘 지내는구나 싶었다. 


수업은 따로, 점심 도시락도 따로, 체육시간과 특별 활동도 따로. 미도리야는 도서부에 가입을 했다. 토도로키가 아무런 특별활동에도 가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미도리야가 의아하게 물었다. 


쇼짱은 특별활동 안 할거야?

잘 모르겠어. 그냥 같이 하교를 하고 싶은데.


대답을 듣고서 미도리야가 큰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도서 부원이 아니었음에도 토도로키는 도서실에 자주 나타났다. 나타나서 아무 말 없이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발견하면 한권 집어들어 읽고, 한참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잠시 미도리야를 바라 보았다가, 다시 책 위로 숙이고.

봄 날 지나가는 바람에는 꽃 향기가 선율처럼 흐르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았더니 교정에 핀 꽃잎 몇 개와 함께 바람이 불어와서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줄곧 길렀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혀 쓸어 넘기고, 또 쓸어 넘기고. 해가 질 무렵엔 학교의 도서실도 문을 닫았다. 쇼짱. 나 일 끝났어. 토도로키를 부르면 그제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미도리야의 옆에 섰다. 


하교길엔 항상 노을이 졌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옆 얼굴을 흘끔 훔쳐 보았다. 날이 갈 수록 단단해지는 골격이 도드라진다. 수평선 너머로 다가오는 빛 덕분에 토도로키의 얼굴에는 항상 그늘이 졌는데, 그 틈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실 없이 웃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이 서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건만. 가벼운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생각지 못한 것이라. 


쇼짱은 무슨 음식을 좋아해?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차가운 면을 좋아해.

학교에는 항상 왔던 길로 와?

아니. 그 때 만났던 공원에서 조금 빙 둘러 와. 아침 공기가 좋아서 조금 더 몸을 움직이고 싶어.


...

이즈쿠는 왜 부활동으로 도서부를 선택했어?

난 몸치구, 히어로에 관한 책을 잔뜩 읽고 싶어서. 새로 들어온 신간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건 도서부원이잖아.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


이 질문을 할 때에는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손을 꽉 잡았다. 땀 고인 손바닥이 미끌미끌해서. 미도리야는 잡은 손을 깍지 껴 고쳤다. 


많이는 아니구. 내 무개성을 놀리지 않는 아이들이 친구가 돼 주었어. 같이 쇼핑도 가고, 도서관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토도로키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그 모양새를 보고 미도리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쇼짱과도 가고싶어. 근데 남자아이랑 예쁜 가게 가는거 괜찮을까? 그랬더니 들 뜬 표정으로 활짝 웃기에, 미도리야도 깍지 낀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집으로 가는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바닥에 들러붙을 듯이 움직였다.




18


미도리야는 어째서 토도로키군을 애칭으로 불러?

응? 

토도로키군을 쇼짱이라고 부르잖아.

그게 이상한거야?

이상하지.


미도리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한거야?

꼭 둘이 사귀는 것 같잖아.

그냥 친구사인걸. 쇼짱하고는 소꿉친구인데.

N군이랑 Y양도 같은 유치원을 나왔어. 그런데도 성으로 불러.


중학생 정도 됐으면 슬슬 예의를 차리기도 해야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별명을 부를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미도리야한테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토도로키군을 엄청 질투할 걸. 토도로키군한테 여자친구가 생겨도 미도리야를 엄청 질투 할 거고. 서로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제대로 부르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미도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이제껏 저와 토도로키를 귀찮게 했던 질문들이 호칭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토도로키군. 입 안으로 굴리는 발음이 어색하고, 또 이상하다. 이름이 쇼토 인 것을 들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애칭으로만 불러 왔는데.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괜히 쑥쓰러워져서 책상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쉬는 시간 토도로키를 만났다. 이즈쿠, 반갑게 불러오는 것을 침 한번 꿀꺽 삼키고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좋은 아침이야 토도로키군. 이라 불렀더니 잘생긴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즈쿠? 왜? 혹여 자신이 잘못이라도 했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다 못해서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손을 잡고 사람 없는 계단 구석으로 내려갔다. 이름으로 부르면 친구들이 하도 이상하게 봐서. 너랑 내가 사귀는 것이 아니냐고 자꾸 물어서. 어눌하게 이유를 늘어놓는 제 소꿉친구를 내려다보며 토도로키는 그게 싫으냐 물으려다 가까스로 질문을 삼켰다. 잔뜩 곤란한 표정, 그러니까 토도로키군도 앞으로는 나를 미도리야라고 불러줬음 해. 똘망한 눈으로 눈치를 보며 올려다 보는 미도리야에게 탐탁치 않게 입을 다물었다가. 부탁이야, 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미도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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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자의 학교생활을 했다. 토도로키는 바빠졌다. 부친이 다시 영재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는데, 오후 수업을 통째로 빠지고 귀가를 해야 했기 때문에 미도리야와 토도로키가 함께 하교를 하는 날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등교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집은 반대 방향이었으니까. 미도리야도 축제를 진행 한다느니, 운동회 해설 위원을 맡는다느니, 학기 초반 학급 위원 자리를 떠안았던지라 굉장히 바빠져서 토도로키에게 연락할 틈이 닿지를 않았다. 벚꽃은 졌다. 순식간에 중간 시험이 다가와 밤새 꾸벅꾸벅 졸아 가며 공부를 하고 만족 못 할 시험 점수를 보고 더 노력해야겠다 생각을 했다.


하루 일과 중 공부할 시간을 더욱 늘렸다. 때때로 친구들이 함께 쇼핑을 가자기에 초등학교때 입었던 옷들을 대충 차려입고 갔다가 경악한 친구들이 옷을 몇 벌 골라주었다. 여름방학때도 토도로키를 볼 수 없었다. 같은 학교지만 좀처럼 보기 힘들구나.


치마의 밑단이 더 짧아져 한 뼘을 더 늘렸다. 키가 자랐다. 언제나 맨 앞자리를 차지해 콩알이라고 놀림을 받았는데 이젠 앞에서 두 세번째 줄에 앉는다. 속옷 사이즈도 바뀌었다. 하복으로 바뀐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춘추복이다. 때때로 소꿉친구가 보고 싶어 토도로키의 반으로 향하면 항상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 있어서는 제대로 말도 못 붙였다. 어영부영 중학교 첫 해가 저물었다. 새 해 인사를 해야지. 전화를 걸었더니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만 전해 들었다. 겨우내 토도로키 저택 앞을 왔다 갔다 몇번 해 본적이 있는데 토도로키를 볼 수 있다는 대답을 듣기는 커녕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혹시 나한테 화가 났나, 생각을 해 보아도 그런 일을 한 적은 없었다. 잘 모르겠다. 만나면 이야기를 나눠 봐야지.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꿈만은 확실 했기에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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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년이 되었다. 완전히 여자아이 티가 났다. 아침마다 엉키는 사투를 벌이며 열심히 기른 머리카락이 가슴께까지 내려왔다. 제가 좋아하는 히어로 상품인 노란 머리끈으로 올려묶고 총총 돌아다녔다. 슬슬 A반의 남자애가 C반의 여자아이를 좋아하더라, B반의 여자아이가 A반의 남자아이에게 고백을 했더라 같은 소문이 돌아다니는 시기가 되었는데, 당연하게도 인기가 폭발하는 것은 토도로키였던 지라. 주근깨 가득한 못난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던 미도리야서로는 고백이 머나먼 세상 이야기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찬양 일색인 소꿉친구 이름을 듣고 있자니 기분도 묘해지고 약간 자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토도로키에게는 여자아이들이 좀처럼 다가서질 못했다. 무뚝뚝해보이는 표정과 만사에 관심 없다는 듯 한 행동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미도리야는 혼자서 분석했다. 


그런데, 어느날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학년 중에서도 예쁘다고 소문이 난 아이였다. 우등생이라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칭찬도 자자한데다가 약간 옅은 색의 생머리가 인상깊던 아이는 점심시간 토도로키의 반에 직접 찾아가서 새하얀 편지를 건냈다. 토도로키가 그것을 받는 동안 여자아이의 손은 애잔하게도 부들부들 떨렸고, 그것마저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 기다릴게. 말을 남기고 반 밖으로 뛰쳐나간 여자아이의 뒤를 따라서 여러 말이 따라붙었지만 선남선녀, 잘 어울린다가 대부분이었다. 청춘의 소녀처럼 얼굴이 붉게 물든 짝이물었다.


토도로키군이 고백을 받았어 미도리야.

응. 나도 점심시간에 봤어.

소꿉친구가 인기 폭발하는 걸 보는 기분이 어때.

한두번인가 뭐. 토도로키군은 예전에도 인기가 많았는걸.


도서부 예산을 한 땀 한 땀 적어가면서 관심 없이 대답하는 미도리야를 보곤 재미가 식었는지 짝은 곧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금학기 예산이 적다. 필요 부품을 구매하면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책을 신청할 돈이 없어지는데. 한숨을 내쉬면서 턱을 괴고 창 밖을 보았다. 날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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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낸 것이 있으면 포기해야 할 것도 있다.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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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함께 하교할 수 있었다. 주번이라서, 학급의 창문을 전부 잠근 것을 확인하고 출석부를 들고 나오던 길에 기다리는 토도로키를 발견하곤 얼마나 놀랐던지. 악,하고 비명지르는 미도리야를 토도로키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토도로키군. 깜짝 놀랐잖아!

오늘은 함께 하교할 수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뿐인데.


미도리야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교무실에 출석부를 가져다 놓을 때 까지 토도로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정을 나섰다. 하늘이 높았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미도리야는 유독 긴 그림자를 보고 옆에 선 토도로키를 올려다 보았다가, 눈높이가 더 높아진 것을 알게 되었다.


키 컸네. 토도로키군.


토도로키가 미도리야를 내려다본다.


그런가.


그리고 다시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집 방향이 갈리는 골목길 까지였다. 토도로키가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말하듯 화제를 꺼냈다. 나 오늘 고백을 받았어.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 보았다가 다시 늘어진 그림자를 보았다. 응 나도 봤어. 토도로키의 걸음이 느려졌다. 보폭을 맞추어 걷던 걸음이 무너져서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보다 한 발 앞서게 되었다.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소매를 잡았다. 소꿉친구를 뒤돌아 본다. 붉지 않은 흰 색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어 보였다. 토도로키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드물었다. 소꿉친구인 미도리야에게 마저 제 생각을 말하는 일이 적었는데, 바로 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눈을 보고선 그의 마음을 짐작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미도리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토도로키가 시선을 떨구었다. 그림자에 감춰둔 보물이라도 있는지.



넌 어떻게 생각해?

뭘?

오전에 받은 고백.


미도리야를 마주보는 토도로키의 눈이 뜨거웠다. 이제 보니 머리카락 뿐만 아니라 얼굴도 붉었다. 미도리야는 제 얼굴도 붉게 보이진 않을까 생각했다. 토도로키의 뒤로 보이는 빛이 눈부셨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저는 토도로키의 소꿉 친구일 뿐인데.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잘 알고. 다른 사람보다 서로를 조금 더 좋아하는. 오래도록 생각을 하다가, 미도리야는 입꼬리를 끌어올려서 베시시 웃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것 뿐인 것처럼.


응원할게 토도로키군.


그런 여자아이와 함께 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진심으로 네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대답을 듣고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소매를 놓았다. 그리고 미도리야를 따라 웃었다. 갈색 눈이 일렁거렸다. 초록색 눈은 뜨겁다 못해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마주하지 못하고, 갈색 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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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미도리야는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 놓고 교복을 벗어서 차곡차곡 옷걸이에 정리했다. 가방을 열어 내일까지 해야 하는 숙제가 있나 살펴본 다음 침대 위에 앉았다. 머릿속이 멍했다. 고마워. 토도로키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대답이 자꾸만 맴돌았다. 사실은 고백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구실이 없었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건, 영재교육을 받는 토도로키에겐 웃긴 구실이고, 상대 여자아이를 헐뜯는 것은 미도리야의 성격으론 무리였으며 흠 잡을 구석이 없기도 했다. 내가 싫으니까 받지 말아줘, 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문제인지 일일히 집어낼 수도 없을 만큼 대단한 억지였다. 소꿉친구일 뿐이잖아. 그런데 왜? 혼자 묻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아주 어릴 때 처음 만나,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왔다. 사실 함께 보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다.-토도로키가 자주 학교를 빠졌으므로- 몇번 같은 반을 했던 N코와 얼굴을 더 오래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토도로키는 꼭 제 남동생 같았다. 동생이 생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자주 다쳐 와서 걱정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던 아이. 어머니가 밥 먹어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도리야는 네에, 대답을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식탁 앞에 앉아서 깨작깨작 밥알을 집어 입 안으로 넣다가 갑자기 말이 튀어나왔다. 엄마. 토도로키군이 고백을 받았어. 미도리야를 꼭 닮은 어머니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렇구나. 토도로키군이 벌써 다 컸구나. 여자아이한테 고백을 다 받고. 미도리야는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난 응원한다고 말해 줬어. 토도로키군이 행복하면 좋겠다고 말했어. 눈 앞이 희뿌예진다. 흐릿해지다가 선명해지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고 볼을 슥 문질렀더니 눈물이 묻어 나와선 제가 우는 것을 자각했다. 어머니가 당황한 듯 이즈쿠, 너 왜 그러니 하고 물었는데 자신이 왜 우는지 미도리야도 몰랐다. 


속에 꾹 꾹 담아 두었던 말이 고삐가 풀린 말처럼 뛰쳐 나온다. 하지만 사실 쇼짱이 고백같은거 받지 말았으면 했어. 나랑 더 같이 있으면 안되냐고, 나랑 같이 하교하고, 나랑 같이 말하고, 나랑 같이 밥을 먹고, 나랑 같이 웃으면서 예전처럼 놀이터에서 놀자고.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 하고 싶었어. 삼켰던 밥이 목에 걸렸다. 목이 메인다. 말하는 내내 울음이 섞여서 줄줄 눈물과 함께 흘렀다. 당황한 어머니가 딸의 등을 쓸어 주었다. 미도리야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쇼짱이라고 부르고 싶어. 토도로키군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떻게든 더 말을 할 걸 그랬어. 그때 응원한다고 하지 말 걸. 행복해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나랑 있자고 할 걸. 펑펑 울면서 하는 말에는 조각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좋아한다와 좋아한다는 뭐가 다른 거야? 어린 시절 했던 물음에 대한 답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달라. 아주 달라.



토도로키가 고백을 승낙했단 소식이 전해져 온 그 날, 미도리야의 첫 사랑은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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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앞에서 펑펑 울고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또 한 시간이 조금 안 되게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붕어처럼 퉁퉁 부은 눈으로 세면대에 붙은 거울을 봤다가,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밥을 다 먹지도 못했다. 걱정하시는 어머니에게 웃으며 그냥 갑자기 울고 싶었어요. 사춘기가 다 그렇다잖아요. 미안해 엄마. 대충 둘러댔으나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잔뜩 열이 오른 눈에 얼음 팩을 문지르며 필기 노트를 폈다. 차근 차근히 오늘 나간 진도를 요점정리 하고 시험에 나올만한 문젤 풀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고, 튀어나올 것 같이 두근거렸던 가슴도 진정이 되고, 제가 어째서 그렇게 펑펑 울었나 이해가 가지 않기는 무슨. 토도로키의 얼굴을 떠올리자 마자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다 녹아버린 얼음팩을 볼에 가져다 대고 미도리야는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용이 하나같이, N반의 R양과 N반의 토도로키군이 교제를 시작했다는 내용이라. 축하. 질투. 미도리야는 하나 하나 문장을 넘기다가 넌 괜찮냐, 는 질문에서 멈췄다. 그리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볼을 짝 소리가 나게 때리곤 뜨기도 힘든 눈을 부릅 떴다. 창 밖으로 보이는 가로등이 깜박깜박 점멸한다. 아직도 진동이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리고 새 노트를 꺼냈다. 영어 과목 필기가 가득 차 더 이상은 같은 노트를 사용 할 수 없다. 백지를 눈 앞에 놓고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호흡법을 따라 숨을 후, 하고 들이쉬고 하, 하고 내쉬었다. 한참 혼자 진정을 위해 여러 시도를 하는 도중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미도리야의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즈쿠?

응 엄마.

나와서 과일 먹을래?

숙제 다 하고 갈게요. 아, 그리고 얼음 찜질팩 하나 더 있어요?

글쎄. 냉동실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러다간 내일 엄청 못생긴 얼굴로 학교에 가겠어. 놀릴거야. 분명 놀릴거야.


엄마가 퉁퉁 부은 미도리야의 눈을 보고 웃음이 흘러나오는 입가를 가렸다.


우리 예쁜 딸을 누가 놀린다구 그래.

예쁘긴 뭐가 예쁘담. 훨씬 예쁜 애들이 많다구요.


입술을 비죽거리는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까 시장 보러 갔었는데 네가 좋아하는 히어로, 누구였더라?

올마이트!

그래. 올마이트 상품이 새로 나왔더라.

정말?

응. 내일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사가지고 올래? 엄마가 용돈 줄게.


미도리야가 헤헤 웃었다. 마음 한쪽에 조각난 첫사랑을 꽁꽁 감추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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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학년 입시는 정말, 정말로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공부를 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꿈을 위해서니까 어쩔 수 없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난 밤 외워 놓았던 영단어를 복습했다. 밥을 먹으며 단어장을 보고, 길을 가면서도 단어장을 떼어놓지 못해 돌부리에 걸려 자주 넘어졌다. 덕분에 스타킹이 제대로 남아나는 일이 별로 없어서, 가방에 여분의 스타킹을 한 켤레씩 챙겨 넣는게 버릇이 되었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 내내 열심히 필기를 하고 쉬는 시간에는 문제 풀이나 모르는 것을 물어보기 위해 교무실로 왔다갔다 하기 바빴다. 자연스레 부 활동엔 소홀해졌다. 원래 삼 학년은 그런거야. 죄송하다고 고문 선생님께 사과를 드리다가 지나가는 토도로키와 부딪혔다. 토도로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도리야를 본다.


토도로키 군. 오랜만이야. 분명 같은 학교를 다니는데 얼굴 보기가 힘들어.

미도리야. 너, 피나.


입술을 오물거렸다. 뜨끈한 피가 입가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들어올려 틀어막았다. 고, 고마워 토도로키 군. 선생님이 냉큼 미도리야의 손에 휴지를 쥐어 준다. 놀라서 안절부절 못하는 토도로키에게 웃었다. 


요새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봐.

쉬면서 해. 미도리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나는 개성이 없으니까. 뒷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지. 토도로키는 괜찮다는 미도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에가던 길을 뒤돌아 미도리야의 반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고마워. 토도로키가 손을 들어 흘러내린 핏자국을 엄지로 슥슥 닦는다. 


어,  더러울 텐데.

가는 길에 닦으면 돼.


손가락이 입술에 스쳤다. 미도리야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갈 곳 잃은 손이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가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잘 가 토도로키군. 미도리야가 인사했다. 휴지로 반절을 가린 미도리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인사를 받았다. 응. 내일 봐 미도리야. 멀어지는 토도로키의 등을 보면서 휴지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음에 감사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감출 수 있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와선 하루종을 배운 것을 복습했다. 모친이 부탁한 심부름을 나갈 때 에도 옆에서 단어장을 빼 놓지 않았다. 책상 위에 앉아 공부와 취미 생활-히어로 분석-을 병행 하다가 피곤에 지쳐, 가끔씩 정신을 잃다시피 잠이 들고 책상 위에서 아침을 맞이할 때도 있었고.




26


저는 웅영에 지원하고 싶어요. 담임 선생님이 녹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점수를 보면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무슨 과를 지원 할 거니? 일반? 경영? 서포트는 조금 힘들 것 같구나. 미도리야의 생활 기록부를 찬찬히 들여다 보는 선생님의 표정에 망설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히어로과요. 선생님이 푸흡, 하고 마시던 녹차를 내뱉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눈을 꾹 감았다. 세상에. 농담하는 거지 미도리야? 아니요. 전 정말로 히어로과에 가고 싶어요. 선생님이 미간을 짚었다. 미도리야는 흘끔 큰 눈을 굴려 올려다 보았다. 네 성적으로 일반과나 경영은 괜찮은데. 서포트와 히어로는 개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특히 히어로는. 미도리야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젠 개성이 없어도 지원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지원만 하게 해 주세요. 떨어져도 괜찮으니까. 지원 만이라도. 울렁인다. 미도리야의 목소리를 들은 선생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원서는 가져다 주마. 대신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 일반 고등학교 기준보다도 문제 수준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어. 미도리야가 깊숙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히어로는 어렸을 때 부터 생각해두었던 꿈이다. 초등학교 때 미래의 꿈을 그려보라고 하면은, 크레파스로 꾹꾹 도화지 위에 항상 히어로를 그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새 노트를 사야겠다. 베실베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슬슬 문지르면서 교실로 향했다.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옳게 온 건가, 다시 확인했다. 토도로키가 있었다. 상담은 방과 후 였고 덕분에 하교 시간도 늦어 졌는데 이 시간에 있을리 없는 인물이 있었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차근히 읽고 있다.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에게-제 자리로- 다가갔다.

 

어쩐 일이야. 토도로키 군.


토도로키가 올려다 본다.


오늘은 오후 교육이 없었어.

정말? 그럼 같이 하교 할 수 있겠네.


기뻐서 말을 내뱉었다가, 곧 아차 하고 다른 곳에 생각이 닿았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토도로키가 눈을 깜박였다.


여자친구?

토도로키 군 여자친구랑 함께 하교하고 싶지 않아?


미도리야가 물었다. 토도로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노트 위로 시선을 돌렸다. 미도리야는 대답을 기다리다 시간을 확인 하고서 제 자리에 앉은 토도로키를 슬쩍 밀어냈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정리해 가방 안에 넣는다. 툭 툭 가방을 치고 빼 놓은 것이 없나 다시 되짚어 보는데, 토도로키가 한참 늦은 대답을 한다.


괜찮아.

왜?

부 활동이 끝나면 먼저 간다고 했으니까.


토도로키가 미도리야를 본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를 마주 보다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눈이 부시다. 빛 가득 들어오는 창을 등지고 있어서 그랬는지, 토도로키를 바라보기가 힘이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같이 가자.




27


시험이 다가 올 수록 자신감은 떨어졌다. 패기있게 히어로과 지원서를 넣었다고는 하지만 개성 가득한 학생들의 틈 바구니에 섞여 무개성인 자신이 어디까지 실기를 치를 수 있을지도 모르고, 히어로를 양성하는 고교의 유명 학과인 만큼 실기 내용이 만만치 않을 것은 분명했기에. 만약을 생각해서 공부 뿐만 아니라 약간의 운동을 병행하고 있기는 했지만-조깅, 근력운동-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토도로키가 찾아왔다. 미도리야. 널 찾아. 자리에 앉아 단어 삼매경이던 미도리야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얼굴이다. 이제 알맞은 거리가 생기기는 했지만. 왜 찾지. 교과서를 빼 먹고 왔나. 가볍게 토도로키를 대면한 미도리야의 마음이 그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듣고 풀썩, 무거워졌다.


미도리야. 주말에 시간 있어?

어딜 놀러 나가진 않을 것 같아. 왜 그래 토도로키 군?

너희 집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응?


미도리야는 잠깐 말을 잃었다. 주변 시선이 온통 토도로키와 자신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꺼내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은데, 미도리야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자 천진한 얼굴로 다시 물어온다.


안 돼?


결국 또 다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계단 뒷편으로 토도로키를 질질 끌고 가는 수 밖에.


왜 우리집에서 공부를 하고싶은 건데?

아버지,가 이번 주말에 비번이라.


집에 있어. 그의 부친이 어떤 인물인지는 미도리야도 잘 알고 있었다.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도리야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만 같이 공부하자. 나 마침 모르는 것도 있었구. 둘이서 공부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 토도로키가 미소짓는다. 고마워 미도리야. 토도로키는 제 반으로 돌아갔다. 교무실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미도리야는 계단 구석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인지 스스로 수도 없는 질답을 반복해야 했다. 여자친구 있는 토도로키를 과연 제 집에 들여 놓아도 괜찮을 것인가 부터, 응큼한 목적이 아니라 어머니도 있는데 상관없지 않을까. 어릴때 부터 친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결론은 난 양심도 없는 인간으로 끝났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가슴을 꼭 감싸안고 몸을 쪼그렸다. 




28


미도리야의 방이 신기한 듯이 이리 저리 둘러본다. 미도리야는 쟁반 위에 물과 음료수를 나누어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편한 곳에 앉아 토도로키 군. 토도로키가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옆에 앉았다. 미도리야가 작은 몸을 바리바리 이끌고 구석에 놓아둔 앉은뱅이 책상을 꺼냈다. 펴고 먼지를 닦아내니 그럭저럭 공부 할 환경이 되었다. 토도로키는 책가방을 꺼냈다. 그리고 마주 앉아 공부를 시작한다. 


사각사각 연필 스치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처음엔 토도로키과 한 공간 안에서 공부가 되긴 될까 반신반의 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미도리야는 학습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 헤어나오질 못했다. 교과서를 베껴적고, 참고서에 있는 내용으로 보충 설명을 달고, 연습 문제를 풀어나가고, 채점하면서. 오답은 다시 체크하고. 토도로키에게 신경 쓸 틈이 없다. 토도로키는 나름대로 할 일을 했다. 한동안 서로의 얼굴 볼 틈 없이 책에 코를 박다가, 미도리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면으로 토도로키의 눈과 마주쳐 파드득 놀라서 책상에 무릎을 부딪쳤다. 미도리야. 괜찮아? 토도로키가 놀라 묻는다. 미도리야는 아픔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나 이 문제를 잘 모르겠는데. 미도리야가 한창 씨름하던 문제를 토도로키에게 내민다. 토도로키가 제 쪽으로 공책을 끌어당겨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글씨가 거꾸로 보여선 집중이 되지 않아 미도리야가 큰 생각 없이 토도로키의 옆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토도로키가 가까워진 미도리야의 얼굴을 흘끔 내려다 보고 다시 공책 위로 고개를 돌렸다.


~해서 결과적으로 A국가가 B국가보다 더 자원을 많이 차지할 수 있게 된거야.

그렇구나.


미도리야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 부분은 이렇게 해석 할 수 있는 거네?


미도리야가 얼굴을 들었다. 그랬는데. 지나치게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의 머리카락이 스칠 것 같다. 밝은 날에는 푸르게까지 보이던 녹색 눈동자가 약간 짙어지지 않았나 생각했다. 미도리야는 제가 숨을 멈춘 것을 알아챘다.


미도리야.


토도로키가 낮아진 목소리로 미도리야를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 공기가 짙다. 숨이 막혔다. 미도리야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토도로키군?


그렇게 해석 할 수 있는거지? 좋아하면 안 돼.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토도로키의 손가락이 펜을 잡은 미도리야의 손 등을 스쳤다. 개성을 사용했나,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다.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가 애원하듯이 토도로키의 이름을 부른다. 목소리가 떨린다.


응?


파르르 몸을 굳히며 애써 웃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 토도로키가 대답했다. 맞아. 그렇게 해석 할 수 있어. 미도리야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긴장이 풀렸다. 고마워. 토도로키의 손에 잡힌 공책을 빼내어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토도로키의 팔이 움찔 떨렸다. 


그 날 저녁 토도로키는 부친이 자길 찾는다는 전화를 받고 미도리야의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었다. 어머니가 오랜만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밥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 하얀 쌀밥을 담고 반찬 네댓개를 내 놓는다. 차린게 없어 미안하구나. 미도리야과 꼭 닮은 모습이라 토도로키는 웃음을 삼킨다. 반찬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미도리야가 긴장한 얼굴로 토도로키의 입을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려구. 이윽고 토도로키가 슬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밥을 먹다 토도로키를 흘끔 바라보곤 눈이 마주친다. 미도리야가 흐, 하고 웃었다. 




29


시험은 겨울이었고, 미도리야는 초록색 목도리를 꽁꽁 둘러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여리고 작은 딸을 걱정 가득하게 바라보며 다치지만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설마 다치겠느냐며 말하고 집을 나섰는데, 정신이 드니 병원이다. 설마 로봇이 그득한 도심 안으로 집어넣을 줄 상상도 못했다. 필기 시험을 치고 나름대로 만족할 만 한 결과를 얻은 것 같아 뿌듯 했건만-프레젠트 마이크를 실물로 보게 된 것도 기뻤다- 실기장이라면서 뭐가 펑 펑 터지는 도심 안으로 밀어넣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로 되짚어 보면은 옆에서 시험을 치는 여자 아이 위로 부서진 파편이 날라오기에 피하라는 말 대신 밀쳐낸 것 까지가 기억의 전부다. 듣자하니 그 파편을 대신 맞고 기절했다고. 신음을 흘리며 이불을 뒤집어 썼다. 다친것이 아프기보다도 그토록 가고 싶었던 히어로과가 한순간에 날아간 것이 너무나 분했다. 울지 않으려 애 썼는데 속수무책으로 차오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수선한 병원의 응급실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히어로 과가 아닌 일반 과로. 레스큐 포인트가 어쩌고 하는 설명을 들었다. 가산점이라고. 사람을 구한다. 히어로의 본질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미도리야가 편지를 꽉 움켜 잡았다. 비록 원하는 과에 붙지 못했다고 한 들 출발 선에는 설 수 있다. 보고있던 TV 안으로 동경하는 올마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되고싶어. 올마이트 같은 히어로가. 언제나 웃으면서 사람들을 구하는 히어로가. 



~. 문자가 왔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토도로키다. 


미도리야. 결과는 어떻게 됐어?

합격은 합격인데, 일반과 합격.


잠깐의 텀이 있다가 다시 연락이 온다.


그렇구나.

응.

그래도 학교에선 볼 수 있을까.


답장을 보내기 전 잠시 망설였다. 곧이어, 그럴거야. 과는 다르지만 함께 열심히 하자 토도로키 군! 웃는 이모티콘도 곁들여 단어 하나 하나 정성들여 써서 전송 버튼을 누르고 스스로에게 뿌듯해 했다. 갑자기 벨이 울린다. 토도로키였다.


토도로키 군.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

아니야. 괜찮아.

목소리를 듣고 말 해야 할 것 같아서.


토도로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휴대폰을 잡고 기다렸다.


힘, 내자.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힘 없는 목소리다. 미도리야가 그것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래.




30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 날 토도로키는 근 일 년 반 가량을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예쁘장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선 눈물을 펑펑 쏟는다. 토도로키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좋아한다는 아이가 있었다고 그랬잖아. 그래도 난 괜찮았는데.

미안해.

네가 그만큼 좋아서 상관 없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헤어짐을 먼저 통보한 것은 토도로키였다. 입학 통지서를 받고 꼬박 일주일을 고민한 토도로키는 결국 줄곧 생각해 왔던 결정을 내렸다. 짝, 하고 토도로키의 고개가 돌아갔다. 여자아이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토도로키를 노려본다. 추위에 언 뺨이 더더욱 붉어진다. 손이 매웠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난다. 한참을 토도로키의 앞에서 더 울다가 눈물을 슥 닦고 말했다.


때린 건 미안해. 


토도로키가 고개를 저었다. 토도로키를 보고 눈물 자국이 가득한 눈을 휘었다.


네 그런 면이 좋았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되기를 바란단 말을 마지막으로 여자아이는 떠났다. 뺨이 얼얼했다. 맞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추위 때문에 그런지. 발갛게 언 얼굴로 토도로키는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꺼내어 본다. 문자 목록에 있는 미도리야의 이름을 보고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다시 닫았다. 눈이 쌓여간다. 



31


꿈에도 그렸던 고등학교인지라 입학 첫 날에는 긴장을 했는데, 막상 생활의 일부가 되니 중학교 시절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공부하는 내용이 이전보다 훨씬 깊고 심오해 져 이게 일반과에 적용된 웅영의 모토인가, 하고 생각했다. 함께 입학했던 토도로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의외일 만큼 드물었다. 이동 수업을 해도 시간표가 다르고, 점심 시간도 히어로 과는 히어로 과, 일반 과는 일반 과, 이렇게 뭉쳐 있는 통에 오랜 친구와 좀처럼 마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이 같으냐면 그것도 아니다. 


일반과에 입학한 아이들은 처음 미도리야가 무개성이라 담담히 말 했을 때 놀라는 한편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별 일 아닌 듯이 인정을 해 주었다. 개성 없이 웅영 입학을 한 사실 자체가 대단하다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언제나 눈 앞에 드리웠던 베일이 벗겨지는 느낌을 얻었다. 난생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 받은 것 같아서. 울 뻔 했기에 눈물 흘리지 않는 눈을 손등으로 꾹 꾹 문질렀다.


부활동으론 또 다시 도서부를 선택했다. 중학교처럼 없을 서적은 없고, 있을 서적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 아니라 학교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소장 도서를 자랑했다. 시설은 조금 낡았지만 목재에서 풍기는 숲 향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한창 신입 부원 미도리야는 책을 한 아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덩달아 저를 쫒는 근육통은 달가운 것이 못 되어 얇은 팔뚝 가득히 파스를 뿌리고 붙이고 급우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미도리야. 너한테서 파스 향이 나. 라고 말을 한 학기 내내 인사처럼 들어야 했다.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겠다 싶었을 때 책을 위해 비치한 작은 계단에 걸터 앉았다. 도서실 문이 열렸다. 낮 익은 얼굴이다. 도서실 문 닫았어요. 약 한 달 만에 마주한 친구에겐 정 없는 인사처럼 들렸을지 몰라도,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를 발견하곤 안도한 듯 미소짓는다.


네가 반에 없어서.

우리 반에 찾아왔었어?

최근 만나지 못했잖아.

내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어?

네가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도서관이니까.


토도로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 했다. 찌릿, 하고 가슴에 정전기가 일었다. 또 시작이지. 미도리야는 능숙하게 아픔을 감추었다. 


사실은 물어본거지 나 어디 있느냐구.

응. 맞아. 


토도로키가 시인했다. 저 쪽에서 미도리야를 불렀다. 미도리야. 이 책들 좀 A서고에 정리해 줘. 벌떡 일어난다. 토도로키 군 미안해. 나 지금 바빠서 길게는 얘기 못 할 것 같아. 토도로키의 얼굴이 노골적인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그럼 하교는 같이 할 수 있어? 미도리야가 데굴, 눈을 굴린다. 지금 책 먼지랑 땀 때문에 같이 하교하기도 좀 그래. 그런가. 단단한 어깨가 축 쳐졌다. 미도리야가 가다 말고 흠칫거렸다. 처량하게 자신을 보는 것을 견디다 못한 미도리야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늦게 끝나지 않는다면 괜찮을까. 매끈한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단숨에 볕으로 변했다. 토도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졌다. 그치만, 나 몸에서 땀 냄새 날 지도 모르고. 상관없어. 괜찮아. 다시 한번 미도리야를 부르는 외침이 들렸다. 미도리야는 두어걸음 뒷걸음질을 치다가, 슬쩍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책 정리를 위해 뒤돌아 뛰어갔다. 입이 자꾸만 호선을 그린다. 버릇처럼 입꼬리를 꾹 꾹 눌렀다. 




32


함께 가는건 역시 안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고 남은 뒷정리까지 다 자신이 하겠다 떠 맡았다. 선배들은 정말 괜찮겠느냐는 거듭된 물음 끝에 고맙다 인사를 하고 먼저 집에 갔다. 중고로 다 헐어버린 책을 실로 묶고, 남은 신간들을 죄다 제 자리에 정리 하고, 튿어진 곳이 있는 책을 하나 하나 다 정리 하고 책 틈에 묻혀서 시간을 확인하니, 귀가 시간이 한참을 지났다. 이미 해가 졌다. 교복은 땀에 절어 찝찝했다. 먼지를 털어낸다고 털어내기는 했는데, 군데 군데 새카맣게 얼룩진 것은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설마.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부친을 떠올리고 부르르 떨었다. 돌아갔겠지. 가방을 챙기고 문단속 뒤에 나가는 복도가 으스스하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 문을 여는 순간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다. 이미 하교 했어야 할 사람이 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미도리야는 당황해 소꿉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토도로키 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토도로키가 부스스 고개를 든다. 잠깐 졸았던지 헝클어진 머리색이 섞였다.


지금 끝났어?

아니,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냐구.


토도로키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같이 하교하기로 했잖아. 가로등이 켜졌다. 




미도리야는 목이 막히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늦게 끝났네. 토도로키가 일어서려다 다리가 저렸는지 다시 주저 앉는다. 미도리야는 한참 저를 올려다보는 토도로키를 내려 보다가 그 옆에 앉았다.


지금까지 기다리면 어떻게 해.

함께 하교 하고 싶었어.

다음에 할 수도 있잖아.

오늘 하고 싶었어.


토도로키는 고집이 셌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미도리야는 그것을 잘 알았다. 일이 많았어. 책을 고치고 정리하다보니까. 미안해. 미도리야가 사과했다. 토도로키가 고개를 돌려 미도리야를 바라보았다. 손을 잡았다. 움찔하며 쉽게 빠져나가려는 것을 힘 주어 저지한다. 미도리야가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많이 길었다. 틀어올려 묶는것도 거슬린다며 한 뭉텅이로 묶어 고정을 했다. 옆머리 틈 사이로 조목한 콧대가 보인다. 괜찮아.




초저녁 밝은 하늘 속에 별이 떠오른다. 미도리야와 토도로키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일반 과는 어때?

중학교 때 보다 배우는 과목이 훨씬 어려워 졌는데, 학교 생활 자체는 괜찮아.

토도로키 군은?


토도로키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한다.


독특해.


그게 뭐야. 미도리야가 꽃몽우리를 피우는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토도로키 군.

응.

학기 초에 말이야. 내가 무개성이라고 말을 했는데, 놀리는 사람이 없었어. 항상 놀림 받았었잖아. 중학교 내내, 그리고 더 어릴 때도. 그런데 여기선 상관 없다고 해 주고, 오히려 대단하다고 말 해줘서 기뻤어. 행복했어.

나는, 잘 모르겠어.

왜?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될 줄 알았어.

그건 맘대로 되는게 아니잖아.

그래도. 기대했어.


말의 무게에 눌려 미도리야는 어려이 토도로키를 올려다 보았다. 내려앉은 속눈썹이 팔락이다가, 새벽을 닮은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했어.


서글픈 어조에 마른 침을 삼켰다.


미안해. 




33


친구는 미도리야의 생각보다 금방 생겼다. 언제나 그랬지만. 휴일에 함께 쇼핑을 가고, 같이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더불어 히어로 과에 재학중인 몇몇과도 친해지게 되었는데, 점심 시간에 앉을 테이블이 없다며 합석을 요청한 것을 받아들였더니 금새 서로 이름과 성을 거리낌 없이 부르게 되었다.


비교적 평온한 시간이 지나갔다. 때때로 토도로키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대부분은 같이 하교를 하자는 이야기들. 그 때 마다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 했지만-토도로키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듣고 나름 괜찮아 졌다-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면서도 늦게까기 저를 기다렸던 토도로키의 지친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 거절 할 수도 없었다.


조금씩 드물어 졌다. 토도로키는 혼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함께 하교를 하는 일이 드물어 졌지만 공유하는 시간 사이에 나눈 대화도 점차 줄어들었다. 어느 날은 부쩍 어두워진 토도로키의 얼굴을 보다 못해 먼저 물어 보았다.


토도로키 군. 무슨 일 있어? 토도로키가 화들짝, 공상 속을 벗어났다. 아. 토도로키는 거짓말을 잘 못했다. 항상 머릿속에 떠올린 것을 입 밖으로 내뱉거나, 아니면 참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말을 참고 있었다.


무슨일이 있으면 얘기 해 줘.

괜찮아 미도리야.

나, 지금은 토도로키 군이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고 따로 보내는 시간도 많지만 가장 오래 된 친구잖아. 그렇지?

응.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


미도리야가 시선을 내리 깔았다. 앞으로 퍼진 그림자가 길다. 시선 둘 곳이 없어서 괜시리 때가 탄 빨간 운동화만 내려다 보았다. 미도리야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토도로키는 입을 벌렸다가,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다시 다물었다. 고민을 떠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소중한 친구였다. 게다가. 토도로키가 대답했다. 알았어. 미도리야. 고마워. 미도리야가 환히 웃었다. 접었던 눈꺼풀을 펴니 영롱한 초록 눈이 나타났다. 반짝, 반짝. 밤 하늘 아래의 녹색 눈은 은하수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저 별이 비추어 그렇다고만 여겼는데. 벌써 해가 졌나, 멍청한 생각이 들어 아직 창창한 하늘을 보았다. 별은 무슨. 미도리야가 고개를 기울인다. 왜 그래 토도로키 군? 차오른 것이 쏟아질 것이다. 토도로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34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대기실 안으로 들어 왔다. 체육제였다. 서바이벌 형식의 축제에서 개성이 없는 미도리야, 그리고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타 과 학생들이 버틸 수 있을리가 만무한 그들만의 축제였지만. 탈락 한 이후 관중석에서 시합을 관람 하다가 알아챘다. 토도로키의 상태가 이상했다. 제어를 벗어난 개성에서 알 수 있었다. 혹시나, 미도리야는 꽁꽁 얼어붙은 추위에 벌벌 떨면서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토도로키의 부친이 뚱한 얼굴로 자리잡고 있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향한 토도로키의 대기실에선 찾는 이가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미도리야가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거하게 개성을 사용 했으니 피곤했나 보다.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해서 다가간 노력이 무색하게 금새 눈을 떴다.


미도리야.

응.토도로키 군.

무슨 일이야.


경기장에서 살을 엘 것 만 같았던 냉기가 대기실 안에서도 서늘이 가라앉아 있었다. 말 속 담긴 냉기에 내쉬는 숨이 얼어붙는다. 미도리야는 미소를 걸었다. 그냥. 토도로키 군이 걱정되서. 걱정? 걱정. 토도로키의 옆 자리에 앉았다. 토도로키가 관찰하듯 저를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 있었던 거지.

알아챌 만큼 티가 났어?

응. 게다가 너희 아버지가 관중석에 계시더라.


부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토도로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미도리야.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도 한동안 말을 않다가, 힘들게 묵혀둔 말을 꺼냈다. 뛰어넘고 싶어. 그 자식의 개성을 쓰지 않고. 어머니의 힘 만으로 뛰어 넘고 싶어. 그게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이야. 나는, 반드시.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 토도로키 위로 천진하게 웃던 아이가 겹쳐 보였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를 따라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


그게 뭐야.

뭐?

왜 토도로키 군의 개성을 반으로 나누는 건데? 왜 어머니의 개성, 아버지의 개성으로 나누는 거야? 그건 온전히 네 힘이잖아.


체육복 바지에 주름이 져 있었다. 미도리야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눌러 펴며 계속해서 말 했다.


다들 전력을 다 하고 있어. 나는 일찍 탈락했지만 멀리서도 알 수 있었는걸. 토도로키 군만 아버지의 힘 없이 뛰어넘는다, 고 하면서 개성을 제한하는건 굉장히, 비겁하다고 생각해.

미도리야.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맞아. 사실 잘은 몰라. 토도로키 군이랑 떨어진 시간이 길었으니까. 그 시간동안 토도로키 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잘 모르고, 토도로키 군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조차도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토도로키 군은, 그러니까. 우리 함께 가출 했을 때. 토도로키 군이 했던 말을 기억해.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어머니를 지키고 싶다고 했지. 넌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다 하지 않았어. 나와 함께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했지. 모두를 구하는 히어로가.


무릎 위를 메만지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도리야는 겁이 많아. 단지 외적으로 오는 위협만을 무서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고 반응했다. 토도로키에게 상처 입히고 싶단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다만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지. 토도로키는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토도로키 군이 좋았어. 정말, 정말로.


웃는 얼굴을 하기가 힘이 들었다. 미도리야는 애써서 미소 지었다. 문 밖으로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가 안 까지 들려왔다.



너는 항상 내가 품고 있었던 것을 밖으로 꺼내버려.

앗, 미안해.

아니. 그런게 아니라.


토도로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에 가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포물선을 그린 등이 꼭 울고 있는 것 같아서. 토도로키 군 괜찮아? 황급히 토도로키의 어깨를 잡았다. 한 손에 차고 넘치는 어깨를 쓸어 내렸는데, 토도로키가 손 쓸 새도 없이 미도리야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끌어안았다. 토도로키 군? 깜짝 놀라 허공에 붕 뜬 손을 어쩔 줄 모르고 토도로키의 이름만 외쳤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품에 폭, 하고 파고들어선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다음 경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어. 제 품 안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등을 보고 있자니, 어릴 때의 기분이 조금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투정을 부리곤 하던 그 때와 똑 닮아 있어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토도로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리광쟁이야. 손바닥 안에서 색이 섞이는 머리카락은 가늘고 부드러웠다. 어리광 같은거 안 부려. 토도로키가 푸, 하고 미도리야의 품 안에서 웃었다. 긴장을 풀었는지 몸이 편히 늘어진다.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를 따라 흐, 하고 웃으며 감겨드는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헤집었다.그래, 그래.


미도리야.

응.

이즈쿠라고 불러도 돼?

그건, 조금.

사람들이 오해 한다며.

맞아. 오해해.

여기는 우리 둘 밖에 없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미도리야는 방 안에 있는 것이 둘 뿐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토도로키가 고개를 든다. 눈가가 발갛다. 간절한 목소리로 보챈다.


응?


앞머리가 흐트러지고, 항상 날을 새웠던 눈매가 순하게 내려가 꼭 어렸을 적 제 옷을 놓지 못했던 그 아이 같았다. 미도리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응. 불러줘.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지, 토도로키의 얼굴에 천천히 놀라움이 스치더니 곧 햇살이 내리쬐는 것 처럼 환한 기쁨으로 물들었다. 토도로키는 다시금 미도리야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이즈쿠.

왜, 쇼짱.


웃었다. 커다란 소년의 몸이 잘게 흔들렸다. 토도로키의 볼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웃는 거야?

이즈쿠.

사람들 오면 꼭 다시 미도리야로 불러주기야.

알았어 이즈쿠.


말 끝마다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미도리야의 이름이 붙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토도로키는 끈질기게 이즈쿠, 이즈쿠 라고 미도리야의 이름을 읊어대었다. 강아지 풀이 가슴 속에 그득 찬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듯 한 목소리가 시계 분침이 정각을 향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맴돌았다.




35


짝이 은근한 눈으로 미도리야를 툭툭 쳤다.


그러니까 그 때 왜 그렇게 외쳤냐니깐.

소꿉친구라구 몇 번을 말해.

네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외칠 애가 아니잖아. 뭐라고 외쳤더라? 지지 마? 힘 내?

둘 다였지.


I코가 끼어들어서 히죽였다. 미도리야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 말라니깐. 결승전에서 토도로키는 눈에 띄게 둔해진 움직임을 보였는데, 맹수에게 물어뜯기 듯 일방적으로 당하는 친구가 안타까워 비명을 지르듯이 응원 했더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조금, 지나치게 커서. 옆에 있던 급우들이 죄다 놀라 저를 쳐다보았고, 토도로키는 져 버렸고. 미도리야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재잘거린다. 그렇게 적극적인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미도리야는 책 오타쿠란 말이야.

아니야. 미도리야는 히어로 오타쿠야.


미도리야가 조그맣게 제 정체성을 인정했다. 난 네가 히어로 외의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미도리야는 대답하지 못했다. 미도리야가 관심을 보이는 남자아이라. 관심을 보이는게 아니라 토도로키 군이랑은 원래 친구였구, 그냥 그 때 토도로키 군이 지고 있으니까! 다 안다는 듯이 미도리야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싱글대며 웃었다. 얼굴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미도리야는 후, 거친 숨을 쉬면서 손 부채질을 했다.


체육제 이후로 토도로키를 보는 일은 또다시 줄어들었다. 단기간에 자주 봐서 그랬는지 처음엔 약간 쓸쓸했는데, 곧잘 적응했다. 게다가 시험이 있어서. 실컷 즐긴 뒤에 걷는 가시밭길인가.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교과서와 노트를 한 아름 끌어안고 도서실로 향했다. 사람이 없고 통풍이 좋아 공부하기 알맞았다. 그 날은 학교 문을 닫는단 소리를 듣고 가방을 챙겨-끝까지 필기노트는 손에서 떼허놓지 않았다-도서실을 나섰는데,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겠다. 그렇담 다행이고.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부탁할게 있어서. 부탁? 응. 혹시 주말에 괜찮아? 또 같이 공부하자구? 아니. 고개를 젓는다. 최근에 어머니 병문안을 가기 시작했는데. 같이 가 줄 수 있나 해서.




36


토도로키는 마실 것을 사 오겠다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병실 안에는 침대 위에 앉은 모친과 옆에 놓인 의자 위의 미도리야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토도로키는 최근에야 모친의 병문안을 왔다고 했다. 반갑게 아들을 맞이하던 모친이 미도리야를 발견하고서 활짝 웃었다. 들었던 그대로네. 정말 예쁘게 자랐구나 이즈쿠.


어색했지만 모자가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것을 지켜보는게 좋았다. 반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 토도로키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주일간 자신이 경험했던 일을 차근히 모친에게 꺼내놓았고 모친은 드문드문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참 즐거웠겠네. 하고 토도로키의 말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려는 듯이 경청했다. 미도리야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는데, 바로 옆의 토도로키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좋아서. 살짝 곁눈질을 했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열중한 토도로키는 눈치채지 못했다. 미도리야가 듣지 못했던 것도 많았다. 시시콜콜하게, 아침 등교를 하는데 지나가는 길에 고양이가 있어 잠깐 바라보았다가 전철을 놓칠 뻔 했다는 것, 항상 마시는 우유를 사러 가게에 들어 갔는데 동급생을 만났다는 것, 최근 학교 근처에서 꽃 한 무더기를 발견하고 언제 피어나나 기다린다는 것. 미도리야는 모친과 함께 토도로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하나. 


초여름이다. 선선함과 따뜻함의 중간쯤 되는 날씨는 더없이 맑고, 기분 좋고. 창문에 나무가 비추었다. 새 잎이 돋아 푸르게 물들었다. 선풍이 미도리야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모친이 미도리야에게 웃었다. 정말 예뻐졌어 이즈쿠는. 화제가 자신에게 향했다. 미도리야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전혀, 예쁘지 않고. 머리를 길렀구나. 잘 어울려. 모친의 말엔 다정함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괜히 속에서 울컥 하고 감정이 치솟았다. 모친은 토도로키를 꼭 닮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숙이고 시선을 피한 미도리야를 가만히 바라보던 모친이 아들에게 부탁했다. 바깥에서 음료수를 사다 줄래 쇼토? 이즈쿠 목 마르겠다. 토도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37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와는 다르게 순히 내려간 모친의 눈을 마주했다. 아주머니. 꼭 겨울 눈 같아요. 미도리야가 말했다. 모친은 잠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더니, 눈매를 접으며 곱게 웃었다.


이즈쿠는 바다 색 같구나.

바다는 파란색인걸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은 파란색이 아니야. 초록빛이지.


어찌나 다정한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하고 떨어질 것 같다. 모친이 창 밖을 바라본다. 햇빛이 따뜻해 빨래 말리기 쉽겠다. 미도리야는 그렇게 생각을 했고.


이즈쿠.

네 아주머니.

쇼토는 어때?

토도로키 군은, 잘 지내고 있어요. 반이 달라서 많은 얘기를 나누진 못 하지만. 가끔씩은 같이 집에도 가구.

어렸을 적엔 쇼짱, 이라고 부르지 않았었니?

오해산단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토도로키 군, 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건 쇼토가 조금 섭섭해 하더구나.

섭섭해 하나요?

그래. 자기는 너를 이즈쿠라고 부르고 싶은데. 마음대로 부를 수가 없다면서. 그 애도 고집이 있잖니.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를 떠올리곤 웃었다.


맞아요. 고집이 세죠. 거침없고 솔직하고. 그리고, 다정해요.

이즈쿠는 쇼토를 잘 보살펴 준 것 같아.

그렇지 않아요. 토도로키 군 한테 항상 실망만 안겨주는 것 같은걸요.

그 애가 네 얘길 많이 해. 어릴 적부터 차근차근히. 둘이 바다를 보러 갔었다면서.

아, 네에.


그리곤 토도로키가 뺨을 맞았고. 뒤는 헤어짐이었다. 미도리야는 밀어두었던 죄책감이 떠올라 입술을 꼭 깨물었다.


쇼토는 아직도 그 얘길 해. 그 날이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다면서. 전혀 모르는 장소라 무서웠는데, 이즈쿠의 손을 잡으니 전부 괜찮아 졌다고. 추웠지만 이즈쿠가 따뜻한 음료수를 주었다면서. 왜 불을 일으킬 생각을 못 했지. 이즈쿠도 추웠을 텐데. 그런 말을 한단다.


미도리야는 얼굴을 푹 숙였다. 모친 앞에서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네 눈이 꼭, 밤 하늘 같다고도 하고. 모친이 미도리야의 눈가를 훔쳤다. 마른 손이 부드럽다.


나는 쇼토에게 미안한 일 투성이야. 그래서 이즈쿠가 부럽고, 또 고마워.

저는, 저도 토도로키 군에게 미안한 일 뿐이에요.

그 애 흉터를 볼 때 마다 마음이 아파. 얼마나 사랑스러웠던 아이인데. 얼마나 잘생기고, 또 사랑스러웠는데.


모친의 눈이 머나먼 곳을 본 듯 했다. 미도리야도 토도로키의 얼굴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 볼을 쓰다듬던 모친의 손을 꼭 잡았다.


알아요. 토도로키 군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 흉터까지도 전부 좋아해요. 흉터에 가려질 얼굴이 아니잖아요. 있어도, 없어도 토도로키 군 이니까.


일순 눈 앞에 뚜렷이 그려지는 모습에 미도리야가 활짝 웃었다. 복삿빛으로 물든 소녀를 따라 서글프게 물든 모친의 얼굴이 서서히 피어났다.


쇼토는 좋은 여자친구를 뒀구나.

쇼, 아니 토도로키 군의 여자친구는 제가 아니구.

이즈쿠는 쇼토를 좋아하지 않니?

아니, 좋아는 하는데.

그럼 괜찮아.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잖아.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할 땐 정말 아름다워져. 이즈쿠는 지금 아주, 사랑스러워.

정말요? 정말 괜찮아요?


미도리야가 저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럼 괜찮고 말고. 이즈쿠. 괜찮아.  미도리야가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엄마는 제가 눈물이 많다고 했어요. 친구들도. 눈물 많은건 나쁜게 아니야.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미도리야의 등을 모친이 가볍게 쓸어 주었다. 하지만 역시 이즈쿠는 웃음이 가장 잘 어울려.




38


따사롭다. 모친이 검진을 받는 동안 토도로키와 미도리야는 병원 근처를 산책했다. 느릿하게. 둘 사이에 꼭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을 남겨 두고 찬찬히 걸어나갔다.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를 불렀다. 토도로키가 옆에서 나란히 걷는 미도리야를 보았다.


있잖아. 오늘 너희 어머니를 만난게 참 다행인 것 같아.

엄마가 무슨 얘길 했어?

이런 저런. 네 얘길 많이 하시더라.


토도로키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이상한 말은 안 했지.

글쎄.


미도리야가 장난스럽게 입가를 가리며 후후, 웃었다. 토도로키가 푹 한숨을 내쉰다. 별 말 안하셨겠지. 



병원 안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할 텐데, 산책 나온 환자들이 많았다. 휠체어를 끌고 나온 사람, 할머니, 할아버지, 병원복을 입은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 미도리야가 문득 토도로키에게 물었다. 토도로키 군. 얼굴의 흉터 말이야. 지금도 아파? 토도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은 말 없이 걸었다. 등나무 아래로 그늘 진 벤치가 나오자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를 이끌었다. 의자 위로 반 뼘이 안되게 거리를 두고 앉았다. 토도로키가 손을 들어 얼굴 위의 흉터를 쓸었다. 아프진 않아. 기억을 떠올리는 듯 손가락이 파르르 떨린다. 앞머리가 미약하게 흩날려 흉터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만져봐도 괜찮아? 흉터. 만져봐도 괜찮아?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은하수 같다고 생각했지. 미도리야의 눈동자에 자신이 온전히 비춘다. 토도로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야는 조금 들이 마쉬었던 숨을 내쉬고, 토도로키의 얼굴에 손을 가져 댄다. 스친 손가락이 열상 자국 위에 자리잡았다. 오른 눈을 감았다. 미도리야가 흉터 주변을 슬몃 쓴다. 보통 피부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역시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마부터 눈까지 죽 내려 오다가, 볼에서 멈추었다. 열상이 끝나는 경계면을 검지로 살짝 문질렀다. 간지러워 미도리야. 왼 눈으로 미도리야의 궤적을 훑는다. 등꽃잎이 미도리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열상을 어루만지던 손이 토도로키의 볼을 감싼다.


좋아해 토도로키 군. 난 토도로키 군의 맨 얼굴을 기억해. 그 때도 충분히 멋있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멋있어. 네가 내 친구라는게 정말로 자랑스러워.


고운 눈웃음을 지으면서, 활짝 웃는다. 어찌나 눈부신지. 토도로키가 저도 모르게 뺨 위의 작은 손을 잡았다.


네가 사랑스럽다는 얘길 했어. 어리광이 많다는 이야기도.

어리광 같은거 안 부려.

거짓말.


따뜻한 손을 꼭 누르며 토도로키가 눈을 감았다. 너, 머리카락에 꽃잎 묻었다. 미도리야가 왼 손에 쥔 꽃잎을 찬찬히 보다가 말했다. 꼭 너를 닮았어. 토도로키가 작게 속삭였다. 너한테도 너와 닮은 잎이 붙었어. 미도리야가 제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나뭇잎을 떼어내고선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정말이네.




39


벚잎이 눈처럼 내렸다. 나무 아래의 꽃 같은 소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일반 과가 대부분이었고, 히어로과 학생들이 또 몇 명 있다. 미도리야는 그 틈에서 홀로 단어장을 펼쳤다가 꼭 여기서까지 공부를 해야 하겠느냐며 압수당했다. 하지만 곧 있음 시험이잖아. 괜찮아. 하루 공부 안 한다고 성적이 엄청 떨어지진 않을 테니까. 얌전히 앉아서 준비해 놓은 다과를 우물거렸다.


고등학교 이 학년의 봄은 평탄히 나타났다. 작년에 큰 사건이 워낙 많아서 그런걸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차, 싶게 다시 봄이 와서. 눈 앞이 온통 분홍색이다. 히어로 과의 여학생 하나가 미도리야에게 집에서 직접 우려 왔다는 차를 권했다. 이게 바로 신토불이라는거야. 향긋하고 쌉싸름하다. 노곤한 기분이 되었다.



한 참 이것저것 냠냠 주워먹고 있으니 슬슬 양 옆에 앉은 친구들이 미도리야를 놀려왔다.


그래서, 토도로키 한테는 언제 좋아핟다고 말 할 건데? 먹던 과자가 목에 걸려서 한동안 기침을 해야 했다. H코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미도리야의 등을 퍽퍽 쳤다.


아, 아파. 아파.

너를 보는 내 마음도 아파.

정말 토도로키 군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란 말이야.

너흰 아무런 사이도 아니겠지만 보는 우리는 아무런 사이가 맞아. 휴일에는 데이트도 한다며.

그건 가끔씩 숨 돌리러 외출하는 거구. 토도로키 군이 가장 편하니까.


H코가 미도리야의 볼을 꼬집는다. 너 좋아하는거 맞잖아. 미도리야가 입을 다물었다. 끈질긴 침묵이 미도리야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좋아해.


조그만 보온병의 뚜껑을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졌다.계속해서. 중학교 때, 어쩌면 더 어렸을 때부터. 어린 시절의 토도로키와 제 모습을 떠올린 미도리야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잡았다.


그렇담 어째서 말을 하지 않아?

토도로키 군은 여자친구가 있었어.

지금은 헤어졌다며.

맞아. 하지만, 무서워.

뭐가?

우리 둘은 죽 친구였잖아. 만약 내가 고백을 해서, 토도로키 군이 싫다고 한 다면? 내 가장 친한 친구란 말이야.


토도로키 군을 잃는게 무서워. 눈에 뭐가 들어간 듯이 미도리야가 눈을 문지르다 꾹 누른다. 토도로키 군이랑 헤어졌던 적이 있어. 매일매일 집에 찾아갔는데도 만날 수 없었어. 지금도 자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는게 너무 너무 무서워. 함께 있고 싶어. 발간 눈으로 무너질 듯 한 숨을 내쉰다. H코가 미도리야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왜 소심한지 모르겠어. 누구도 너를 이기진 못 할 텐데. 


내 마음 때문에 토도로키 군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미도리야는 밝게 웃었다. 미도리야의 바람을 아는 듯이 벚나무가 천천히 흔들리며 꽃잎을 쏟았다. 투명한 찻물 위로 꽃잎이 떨어져, 둥실 떠오른다. 가는 속눈썹에 식어 매달린 미련이 방울졌다. 미도리야는 따뜻한 찻잔을 끌어안고 말했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충분해.



40


그 해의 여름은 유독 더웠다. 갓 중학생을 벗어났던 일 학년과, 성인이 되기 한 걸음 전의 삼 학년 중간 선상에서 외줄을 타듯이 이 학년은 모두가 어딘가-비록 아무런 꿈이 없더라도- 생각에 잠긴 듯, 혹은 얼마 남지 않은 학생 시절을 웃고 즐기려는 듯 행동했다. 


남녀관계에서도 그 부분은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각 반 사이를 빳빳하게 접은 편지가 오가고 혹은 복도를 걷다 보면 촛불을 하트 모양으로 배치하고 있는 남학생들이 드물게 보이곤 했다. 고백 받을 여학생만 불쌍한 노릇이지. 그러나 여학생들도 설렘의 바다에서 비껴나간 것만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이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간절한 마음을 잘 전달 할 수 있을까에 관한 책이 비밀리에 유통되었다. 도서 부원이던 미도리야는 항상 '그 책은 예약자가 꽉 차서 지금 빌리실 수가 없어요' 혹은 '그 책 말고 다른 책도 잘 나가는데 예약하시겠어요?'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


사랑은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썼다. 미도리야에겐 적어도 그랬다. 그랬는데, 고백을 받았다. 경영 과의 동갑내기 남학생이었다. 점심시간 도서실에서 반으로 돌아오는 길을 따라 향초가 놓여져 있기에 또 누굴 위한 깜짝 파티일까, 하고 대수롭지 않게 걸었었다. 주변에서 자길 보는 눈이 영 심상치 않더라니. 생화 한 무더기를 내밀면서 일 학년 때 부터 좋아했어. 사귀어줘 같이 정형화 된 틀의 고백을 받았다. 나는 널 본 적이 없는데. 꽃 무더기를 내미는 손이 달달 떨리는 것이 보여, 안타까워서 꽃을 받았다. 어디선가 휘파람이 들려온다. 미도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저기, 미안해. 나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사랑을 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아 최대한 간곡히 돌려 말했다. 자신을 올려다 보는 눈이 너무나 뜨겁고 열정적인지라. 내가 토도로키를 볼 때에도 똑같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미도리야는 황급히 고갤 저었다. 실례가 따로 없다. 남 학생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거절해도 괜찮고, 아니 거절하면 슬프지만, 아니 네가 싫다면 따위의 말을 휭설수설 하다가 수업종이 치자 기겁을 하며 창가를 따라 놓인 향초를 정리했다. 미도리야는 손 안에 가득 담긴 꽃다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향이 좋았다.




41


꽃 무더기는 교실에 비어있던 작은 유리병 안으로 안착했다. 생화를 힐끔 힐끔 훔쳐보는 급우들의 시선이 신경쓰여선 자리에 놓았던 것을 뒤편 사물함 위에다 올렸다. 그럼에도 묘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 아.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또 다시 쉬는 시간엔 삼삼오오 몰려들어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해댔다. 


그래서 받을거야?

아직은 잘 모르겠구.

그녀석 꽤 하잖아. 경영과에서도 존재감이 없었는데. 일 학년 때 네 어떤 점을 보고 반한거래?

아. 그걸 안 물어봤네.

바보야. 그걸 물어 봤어야지.


시끌벅적 떠들던 아이들 틈 사이로 누군가가 돌을 던졌다. 그런데 미도리야. 토도로키는 어떻게 할 거야?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아니. 뜨거운 물이다. 다들 앗 뜨거라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으니까. 미도리야는 손 안에 남은 향기가 모양이라도 갖고 있는 듯 손바닥만 만지작 거리다 아연히 웃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42


토도로키는 화를 냈다. 얼굴을 보고 알아온 세월이 길었건만, 싸웠던 경험은 곰곰히 생각을 해 보고, 두 사람의 역사책을 뒤져 보아도 날카롭게 찢어진 페이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에게 목소리를 높혔던 적도, 무언가를 명령하듯 말 꺼낸 적도 없었다.


그 날은 달랐다. 경영 과의 향초-혹은 생화-고백 소식은 히어로 과 까지 빠르게 퍼졌다. 토도로키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토도로키는 일반 과에 찾아왔다. 다짜고짜 말했다. 고백은 받지 말아달라고. 아직까지 자신이 그 때 어째서 그렇게 말 했는지 미도리야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미도리야는 질문했다.


왜? 


급하게 달려온 토도로키는 숨을 몰아 쉬다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왜냐니. 미도리야는 죄없는 손바닥을 꼬집었다. 이런 멍청이. 


고백같은거 안 받아도 되잖아.

그러니까 왜.


생각해보면 다시 그 상황이 온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이게, 간결하게 전달 할 수 있을까 싶다. '고백을 받지 마' '왜' 라는 질문이 형태를 달리 하고선 두사람 사이를 오고갔다. 오고갈 때마다 열이 그득한 감정이 하나 둘 씩 밀려나가 서로에게 화상을 입히고 어딘가를 불태웠다. 언성이 높아졌다. 두 사람을 보는 시선에 불안함이 섞였다. 토도로키는 분을 참지 못해 옆에 있던 문을 쾅, 하고 내리쳤다. 창문에 서서히 서리가 옮겨붙는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개성을 보고 숨을 삼켰다. 토도로키는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도대체, 토도로키 군이 왜 나를 막아. 나는 너를 막지 않았잖아. 예쁘장한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눈 앞을 스쳤다. 꽃 향기가 났다. 지나가는 길 재잘재잘 사랑을 말하던 여자아이는 분명 눈이 부셨다.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다. 못 들은 채 했던 것 뿐이지. 토도로키 군과 그 여자친구를 번화가에서 봤다더라, 둘이 손을 잡았다더라, 어제 가로등 밑에서, 해묵은 감정이 치솟았다. 소중하고 또 소중해 단 한 번 일그러트려 볼 생각 못했던 추억이 녹아 발 밑으로 떨어졌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미도리야는 꽃 향기를 우그러트린 손바닥을 폈다. 토도로키를 보고 말했다. 


토도로키 군이 나를 막을 권리는 없어. 우리는 그냥 친구일 뿐이잖아.


토도로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창문에 서렸던 서리가 가셨다. 미도리야를 난도질 하기 위해 벌린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우습게도 토도로키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너를 먼저 좋아한건 나야.


깨진 유리에 베인 손에서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줄곧 숨겨서 미안해.


미도리야는 말을 잃었다. 토도로키도. 둘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미도리야는 그 소리가 오랜 친구의 끝을 알리는 지표임을 알았다.




43


미도리야는 경영학과 아이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안해. 지금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럼 나에게 기회가 또 있을까?


그 질문을 받고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마 없을거야. 


아이는 미도리야의 앞에서 조금 울다가, 고맙다며 자리를 떴다.



처음엔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날이 마른다 어머니가 걱정을 하시기에 음식을 입게 퍼 넣고 맛있어요, 맛있어요를 연발하다 보니 살이 조금 쪘다. 토도로키는 더 이상 미도리야를 찾아오지 않았다. 반에도, 도서실에도. 늦은 시간 서적을 전부 정리하고 잡무를 끝낸 다음 현관문을 열었을 때 옆을 보는 것은 버릇이 되었다. 버릇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미도리야도 굳이 토도로키를 찾진 않았다. 고민하며 수학 문제를 풀고있던 미도리야에게 가위바위보에서 희생당한 친구가 머뭇대며 물었다. 두 사람, 싸웠어? 미도리야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안 싸웠어.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고개를 갸웃거린다.


샤프심이 부러졌다. 필통을 뒤져 보아도 여분의 심을 찾을 수가 없어 조금 서러워졌다. 미도리야는 책상 위에 쿵, 하고 머리를 찧었다. 큰 소리를 듣고 놀란 몇몇이 쳐다본다.




44

 

빌런의 유에이 습격. 사상자 다수. 사망자 없음. 실종자는 한 명.



일반과의, 눈이 유독 컸던, 노란 머리끈의, 주근깨가 사랑스러운.




45


미도리야는 실종 된지 삼 일째 되던 날 인근의 폐공장에서 구출되었다. 미도리야를 품에 안은 올마이트의 사진이 신문 일 면을 장식했다. 미도리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별 일 없었어요. 저는 괜찮아요. 딸을 향해 달려온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가엾은 딸의 오른 손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 제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선, 빌런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상세하게도 말했다. 몇 몇 간호사가 응급처치 된 오른 손의 붕대를 갈아주다가 헛구역질 하며 병실을 뛰어나갔다. 미도리야는 평온했다. 자세한 정황이 나왔다. 납치 되었던 시간은 하교를 하던 중. 빌런 사태가 전부 소강이 되어 -히어로 과 이외에는 휘말린 이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안심했고, 교사들도 평소대로 행동했다. 하교시간을 조금 앞 당겨서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미도리야는 도서실에 들렸고, 잔무를 조금 더 하다가 현관을 나섰다. 현관 옆에 있었던 것은 기다렸던 사람이 아니었다.


폐공장에서 삼 일을 굶으며 고문에 시달렸다. 빌런이 원했던 것은 학교 내부의 사정과 사소한 것이라도 생활에 관련한 것 전부였다. 자신은 일반 과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을 하다가 발길질 몇 번에 토악질을 하곤 자신은 공부만 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을 바꿨다. 요망한 계집애. 팔이 참 예쁘구나. 페티시라도 있었던 것인지. 처음엔 울음을 터트렸던 미도리야도 뼈가 보일만한 상처가 몇 개 생기자 다부지게 행동했다. 오른 팔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이할 정도로 깨끗해 치료를 받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였다. 다만 오른팔은.


미도리야는 잠을 자다가 빈번히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오른팔 위로 달군 바늘이 지나갈 때의 감각이 생생했다. 그런 밤이면 이불을 꼭 깨물고 소리 죽여 울었다. 오른 손 손톱 다섯 개 중에 세 개가 없었다. 남은 두 개도 그나마 너덜너덜했다. 빌런은 미도리야의 손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미도리야를 담당한 의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치료는 할 수 있겠지만 흉터가 남을 것이라 말했다.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활칵 울음을 터트렸다. 내 고운 딸 손에 이게 무엇이냐고.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고개를 숙였을 때에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다 무슨 소용이에요. 이미 내 딸한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겼는데. 


기자들이 찾아왔다. 찾아와서 묻는 질문의 수준이란. 올마이트에게 구출 받았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습니까? 빌런에게 납치된 삼 일 동안 다른 짓은 당하지 않았습니까? 올마이트는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해 주었습니까? 올마이트는, 올마이트가, 올마이트. 올마이트. 올마이트.


미도리야는 귀를 막았다. 낮에는 사람들이 병실 앞, 혹은 병원 앞에 진을 치고 있어 산책을 나가기도 힘들었다. 외치는 올마이트 소리에 귀가 멍멍하다. TV를 켰을 때, 올마이트가 나왔다. 이전의 폐공장 소녀를 구해낸 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여쭙고 싶은게 있는데요, 미도리야는 TV를 껐다.




46


올마이트가 찾아 왔다. 어린시절부터 줄곧 동경해 왔던 사람의 실물에 -올마이트는 대부분 히어로과의 실습 수업을 담당했으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에도 늠름한 거구의 뒤를 따라 오는 것은 읍습한 악몽의 일부분이라서 미도리야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올마이트는 말 없이 미도리야의 옆에 앉아있다가, 정수리가 보이도록 푹 숙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주었다. 미도리야 소녀.


그 말이 어찌나, 정말 어찌나. 미도리야는 참아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앞에서는 혹여 자신보다 눈물이 많은 어머니가 상처받을까 드러내지 못했고, 기댈 곳이 없어 홀로 삭혔던 공포였다. 미도리야는 멋들어진 정장에 눈물이 묻으면 어쩌지 콧물이 묻으면 어쩌지 생각 하지도 못한채 한동안 올마이트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얼추 진정이 되었을 때 미도리야는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냈다. 빌런에게 납치가 되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 히어로가 꿈이라 입버릇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무력하고 또 무력한 자신을 얼마나 경멸했던지. 한쪽 팔이 망가지는 고통에도 덤비고 물어뜯는 것 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제가 히어로가 된다니 참 우습지요 올마이트? 저는 히어로가 될 수 없겠지요?


올마이트는 미도리야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히 듣고 나서, 언제처럼 하하하, 웃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도리야 소녀. 히어로란 단지, 억센 힘으로 악에 맞서는 것만이 아니라고. 너는 무력하지 않았다. 너는 분명히 악에 맞서서 스스로의 힘으로 싸웠어. 그리고 너를 둘러싼 세상의 시선과도 싸웠지.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했지? 너는 그 순간부터 이미 히어로인거야.


제게 말을 해주는 올마이트는 다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두컴컴했던 병실 안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미도리야의 침대 위까지 손길을 드리웠다. 미도리야는 한동안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눈물을 감당해내야 했다. 올마이트는 미도리야를 토닥여주었다.


세상이, 온통 빛으로 물들어간다.




47


매스컴의 관심이 조금씩 식어 갈 때 즈음 면회가 허가되었다. 친구들은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오다가 밖에 있던 간호사에게 혼이 났고, 마른 미도리야의 몸을 붙잡고 꺼이꺼이 울다가 지나가는 의사에게 또 한소리 들었다. 수업 진도를 못 따라가서 어쩌지. 비교적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미도리야를, 아까까지의 감동은 어디 갔는지 사라진 친구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구. 너는 여전하구나. 정말로. 필기노트 빌려줘야 해. 꼭이야.




48


늦은 오후 토도로키가 찾아왔다. 미도리야는 어머니가 가져다 준 책을 읽다가 살며시 열리는 문에 시선을 옮겼다. 언성 높았던 고백 이후 첫 만남일 것이다. 토도로키는 눈가가 발겠다. 느릿하게 침대 앞으로 걸어왔다.


미안해.


첫마디는 사과였다. 얼굴이 수척하다. 불과 몇 주 새 사람이 그렇게까지 수척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미도리야는 처음 알았다. 언제나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푸석하다. 마른 눈엔 피로로 인한 핏발이 섰고, 눈 밑에 그늘이 졌다. 뺨이 꺼칠했다. 토도로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차마 미도리야를 볼 수 없다는 듯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제 눈가를 가렸다. 병실 안의 공기가 습해졌다. 조용하기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디오 겸해서 작게 틀어 놓았던 TV소리가 소음으로 변했다. 토도로키는 이를 악물었다. 미도리야가 읽던 책을 표시 없이 접었다.


토도로키는 줄곧 고민했다. 미도리야와 마지막 말을 나누었던 날부터 그녀 앞에 선 지금까지 줄곧. 어디서부터 문제였는지 계속해서 원인을 찾았다. 미도리야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렸던 즉시 혼자서라도 온 시를 샅샅이 뒤져 찾아내야 했을까, 함께 하교를 하기 위해 기다렸으면 되었을까, 남아있는 빌런이 있는지 순찰이라도 했으면 좋았을까. 생각하고 생각해서 얻어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창문이 얼어붙던 그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갔던 말이었다. 홀로 생각하던 토도로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토록 명료하고 간단할 줄이야. 한줄기 무언가가 깨져나갔다. 모든 원인은 저한테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지 마.


검게 떠도는 생각을 찢고 미도리야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마. 난 기뻤어. 정말로 기뻤어.


울고싶을 만큼 기뻤어. 미도리야가 손을 뻗었다. 토도로키의 시선이 다친 미도리야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짐짓 평화를 가장한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 토도로키 군. 진짜야. 미도리야가 베시시 웃었다. 토도로키에게 항상 웃었던 그 때 처럼. 아니, 더 후련한 얼굴로.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를 끌어안지 못했다.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이 미도리야를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미도리야가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오른손이 아니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맨 발에 닿는 바닥이 차갑다. 토도로키는 뒤로 물러났다. 미도리야가 한발짝 다가설 때 마다 토도로키는 한 발짝씩 물러났다. 마치 닿아서는 안되는 것처럼. 신발을 끄는 소리와, 찰딱이며 맨 살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떠밀린 것 처럼 미도리야가 두 발짝 앞서 걸었다. 토도로키의 팔을 잡았다.


아프지 않아?


얼굴에 물안개가 내려앉는다. 붉고 하얀, 천진한- 미도리야는 불편하지 않은 왼 손을 들어 토도로키의 오른 흉터를 매만졌다. 


이젠 괜찮아.


몇주나 되었다고 올려다 보던 시선이 아주 조금 더 높아진 것 같아서, 미도리야는 발꿈치를 들어올려야 했다. 동그란 머리통을 끌어내려 품에 안았다. 푸석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속삭였다. 친구가 끝나버리는게 무서웠어. 지금도 무서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쇼짱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충분해.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등을 끌어안았다. 토도로키 만큼이나 미도리야도 수척해져선. 등이 말랐다. 뼈가 만져졌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머리카락-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즈쿠. 나를 좋아해?

응. 좋아해.

친구로서의 좋아해가 아니야.



...

너를 끌어안고 싶었어.

나도 그랬어.

네게 입맞추고 싶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행복했으면 했어.

우린 정말 똑같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49


새 해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파티를 하려 하는데, 혹시 선약이 있느냐며 물어온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두꺼운 코트를 껴 입고 눈을 맞아 가며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상기된 뺨을 하고 문을 열어준 것은 미도리야였다. 집 안쪽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오히려 두 아이보다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더 설레어 하는 것 같았다. 여럿이서 다 함께 특별한 날을 맞이한 적이 드물다며. 탁상 위에 작은 케이크가 올라갔다. 생크림과 딸기가 토도로키를 꼭 닮았어서 남 몰래 웃었다. 나름대로 힘을 준 티가 나는 저녁을 먹고, 한 조각씩 케이크를 나누어 들어 소파 위에 앉았다. TV를 켰다. 한창 특집 쇼 중이었다. 아, 올마이트다. 미도리야가 한 스푼 떠서 입 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네.

올마이트, 엔터네이너라니까. 프로 히어로는 연예인까지 병행한다며?

그렇게 들었어.

신기하다. 그럼 토도로키 군도 언젠간 저 쇼에 나올까.

기회가 된다 해도 출연하고 싶지는 않아.


TV속의 올마이트가 껄껄 웃는다. 출연자 몇 명이 준비된 세트장 안에서 징검다리를 건너다 풀 안에 빠졌다. 미도리야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특집 쇼는 올마이트의 인사와 함께 끝났다. 밤이 늦었어. 돌아가야지. 옷을 입고 집 밖으로 한걸음 나선 토도로키가 멈칫했다. 바람이 불어도 너무 불었다. 툭툭 눈을 털고 들어온 토도로키와 미도리야는 오늘밤은 폭설이 내리니 외출을 삼가달란 뉴스를 들었다. 어머, 어머니가 입가를 가린다. 그럼 오늘은 자고갈래? 토도로키가 미도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미도리야가 동그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응. 자고 가. 토도로키 군.




미도리야는 푹신한 이불을 들고 와 토도로키에게 건내 주었다. 소파지만 이불을 깔면 괜찮을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소파의 사이즈가 모녀에게 맞추어져 있어 그대로 누웠더니 다리가 비죽이 튀어나왔다. 미도리야는 그것을 보고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네 키가 너무 큰거야.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옆에 앉았다. 뉴스에서는 도심 상가의 거대한 트리가 비춰진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내버려두고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미도리야도 마찬가지로. 

자정이 넘었다.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다. 리모컨으로 재방송 채널을 돌렸다. 음량이 크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의 손에서 리모컨을 받아들어 소리를 줄인다.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토도로키 군. 나 잠와.


나른하게 눈을 깜박이며 말한다. 토도로키는 잠깐 망설이다 미도리야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마주 기대었다. 나는 별로. 토도로키 군은 잠이 별로 없구나? 미도리야의 말에 간질거리는 웃음이 섞였다.


밖에 눈이 많이 오네.

응.

사실 토도로키 군이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었어.

나도 그래.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어.

항상 그랬어.


미도리야의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에 제 머리를 부볐다. 간지러워. 몸을 움츠린다.


꼭 옛날같아.

옛날.

응.

너랑 나랑 전철 타고 멀리 갔을 때에. 그렇게 멀리도 아니었는데.


맞아. 커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 토도로키와 미도리야가 동시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불 아래로 손을 꼭 맞잡는다.


사실 조금 무서웠어. 처음 보는 곳이었잖아. 그랬는데, 토도로키 군이 내 손을 잡아줘서.

네가 내 손을 잡아줬지.


토도로키는 먼저 잠이 들었다. 미도리야는 저에게 기대어 잠 든 토도로키의 몸을 조심스레 소파 위로 뉘였다. 내려온 이불을 목 위까지 올려 덮어준 뒤에 드러난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아무도 모르게. 


잘 자. 토도로키 군.




50


해가 지났다. 겨우 달력이 한 장 바뀌었을 뿐인데. 미도리야는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책상 위엔 그간 정리해 놓은 히어로 노트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젠가처럼. 한 조각 한 조각 지지대가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간다고 한 들 끝까지 붙들어매었던 꿈이다. 히어로가 되고 싶어. 올마이트처럼, 사람을 구하는 히어로가.


미도리야는 일반 과의 삼 학년이 되었다. 성적은 반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개성은 여전히 없는 그대로였다. 히어로 관련 교육을 삼 년 받아야 비로소 프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 다음은 사이드 킥, 그 다음은,


미도리야는 히어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저 꿈 만을 간직하고 지금까지 왔다. 이전 같았다면 스스로를 다그치며 울었을 것이다. 헛된 꿈을 꾸었다면서. 노트 첫 권의 맨 앞장을 펼쳤다. 비뚤배뚤, 어린 아이의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쓰여져 있는 것은 올마이트의 히어로 이름이었다. 미도리야는 어린 자신의 흔적을 쓸어보았다. 정말 잘 해줬어. 어린 시절 흙투성이의 아이가 바로 곁에 서서 웃고 있는 것 같다. 꿈을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사람을 구하고 싶고, 좋아하는 토도로키의 옆에 선 히어로가 되고 싶고, 올마이트처럼 정말 멋진 히어로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전부 이룰 수는 없어. 현실의 갈림길은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장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도리야는 낡은 노트들을 정리해서 원래 있던 장소에 소중히 넣어 놓았다.




51


일월 달이 생일인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보다 먼저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춥긴 춥지. 녹색 목도리와 장갑을 둘둘 둘러 매고 길을 나섰다. 익숙한 초인종을 두른다. 예의 그 고용인이 나왔다. 이번 고용인은 세 번째 였는데, 미도리야가 중학생이 되고 열 아홉이 된 지금까지도 토도로키 저택의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능숙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고용인의 얼굴에 미소가 먼진다. 집에 들어오는 건 이게 처음인가? 네. 항상 대문만 봤었는데, 이제야 안을 보게 되네요.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토도로키의 부친은 아들의 생일 날 긴 출장 일이 생겼다며 집을 비웠다. 언제나처럼 공원에서 만날래? 미도리야의 질문에 토도로키는 잠시 망설이더니 집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관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벼운 옷차림의 토도로키가 집 안을 찬찬히 안내해 주었다. 으리으리한 내부를 보고 있자니 괜시리 손 안에 든 케이크가 점점 더 조막만해지는 것 같다. 미도리야는 입술을 비죽였다. 정말로 도련님이었어 토도로키 군. 항상 도련님이란 말을 들었을 거면서. 자주 듣다 보니 괜찮았지만 집을 보니까 별로 괜찮지 않네. 미도리야가 둘둘 말았던 목도리를 풀었다. 집 안엔 토도로키 혼자였다. 형제들은 모두 분가를 했고 남아있던 누나는 작년에 나왔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케이크 위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냈다. 토도로키가 기쁘게 웃었다.




토도로키의 방 안에서 히어로 잡지 최신판을 읽던 미도리야가 말을 꺼냈다.


있잖아 토도로키 군. 히어로가 되고싶단 말 기억해?

응 기억해.

그럼 히어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 


토도로키는 잡지를 들고 당연한 말을 했다. 공식 기관에서 삼 년 교육, 사이드 킥 경험, 그리고. 말을 멈추고 미도리야를 보았다. 미도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잡지를 허벅지 위에 거꾸로 펼쳐 놓고 고개를 들어올려 천장을 보았다. 계속 생각했어. 나도 조금 있으면 성인이잖아. 계속해서 같은 꿈을 꿀 수는 없어.


기억나? 나 분명 올마이트 같은 히어로가 되고싶다고 했잖아.

기억 나. 너는 내 옆에서, 손을 잡고, 히어로가 되겠다고 했어.

그 전에 내가 말했지. 개성도 없고 여자아인에 과연 될 수 있을까? 하고.


토도로키가 의자에 앉아 미도리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힘들게 시선을 떨구었다. 입술을 짓씹는다. 작은 입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든 결코 자신이 바랐던 것이 아니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반드시 옳을 것이다.


그 때 네가 말해 줬어. 누군가를 구하면 이미 히어로라고.


미도리야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겨우내 내리는 눈처럼 가슴이 아리도록 아름다워서. 토도로키가 눈시울을 붉혔다. 고개를 끄덕였다. 올마이트 처럼은 될 수 없어. 하지만 분명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거야. 미도리야가 어느새 토도로키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토도로키는 눈을 꾹 감았다. 마른 눈물이 볼 위로 구른다. 잘게 떠는 토도로키를 끌어안았다. 항상 옆에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나와 너는 분명히 괜찮을거야.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작은 등을 감싸안았다. 숨이 막히도록.




52


삼 학년은 글쎄, 중학교가 그랬듯이 특별한 추억을 새기자면 별로 기억할 만한 것이 없다. 히어로 과 아이들은 일, 이학년 때 보다 더욱 현장 실습을 많이 나갔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것 보다 매스컴에서 얼굴을 자주 볼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 양치를 하다가 TV에 나온 토도로키의 얼굴을 보고 미도리야는 양칫물을 그대로 삼킬 뻔 했다. 화면 속에서도 잘생겼네 토도로키 군. 웃음을 참으며 문자를 보냈다. 히어로 관련한 뉴스에서는 넘버 투 히어로 엔데버의 뒤를 이을 토도로키의 소식을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토도로키의 소식을 가끔씩은 등교 도중 지하철 안에서 보기도 하고, 커다란 전광판에 비춘 것을 보기도 했다. 문자는 꾸준히 이어졌고, 전화도 때때로.


토도로키는 항상 미도리야를 걱정했다. 정작 다칠 일은 토도로키가 더 많으면서도. 공부 할 때에는 항상 휴대폰을 꺼 놓았기 때문에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연락을 받는 것은 밤 늦은 시간일 때가 많았다. 부재중에 온 문자를 확인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답장을 하면, 그때까지 자지 않고 깨어있던 토도로키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 내용조차 사랑스러워 침대 위에서 웃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목소리를 많이 듣고싶을 때에는 먼저 전화를 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 토도로키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미도리야?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혹시 자고 있었어?

응. 오늘은 조금 힘들어서 일찍 잤어.

미안해. 그럼 내가 괜히 깨웠네.

아니야. 괜찮아.


...

공부는 힘들지 않아?

힘들지만 삼 학년에 와서야 간신히 생각해 낸 미래인걸.


그럼 토도로키는 낮게 웃었다. 힘 내. 그 말은 더 이상 처연하지 않았다.




53


미도리야는 진로를 재고했다. 히어로 외에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자신의 미래를 긴히 생각하고, 주변의 의견을 듣고, 가장 본래 꿈에 가깝다 생각되는 길을 골랐다.


경찰이 될까 해. 내 성적으로는 약간 아슬아슬 하지만 해 볼 가치는 있다고 하셔. 연말까지 꾸준히 성적을 올린다면 관련 학과에 들어갈 수 있을거야.

경찰이라면, 행정직으로 갈 거야?

아니. 그건 아니구. 현장에서 일 하고 싶어.

그건 위험한데.

토도로키 군이 할 말은 아니지. 히어로가 제압한 빌런을 인계받는 일인걸. 그리고 재해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싶기도 하고.

미도리야. 네 결정이라면 말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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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과의 학생들은 수험 스트레스를 푸느라 학교에서 작은 일탈을 만들어냈다. 남학생들은 참고서-뒤에 플레이 x이-를 즐겼고, 여학생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자유를 기대하며 가벼운 화장을 하고, 또 지워보는 것을 즐겼다. 미도리야는 그 와중에 좋은 도화지가 되어서 이런 저런 시험을 받았다. 암기해야 하는 공식을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눈을 감으라면 감고, 입술을 벌리라면 벌리고. 나중에 제 얼굴을 보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준비해 준 사탕을 으적으적 씹으면서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하교길에 가끔씩 히어로 잡지를 샀다. 토도로키 방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것으로.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의 기사를 찾아 읽으며서 히어로 노트 옆에 작은 스크랩 북을 만들었다. 하나 하나 정성들여 오리고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집어 넣고 참고서를 펴고.




55


소식을 들은 것은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토도로키는 실습을 나가 빌런과 대치하던 도중 크게 다쳤다. 프로 히어로 몇 명이 중상을 입을 정도의 큰 사고였다. 한참 반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이야기를 나누던-단어장을 놓지 않고- 미도리야의 손에서 툭, 하고 책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 쪽 다리는 부러지고, 전신은 크고 작은 타박상이란다. 학교의 정규 수업이 끝나자 마자 병원으로 달려온 미도리야는 잠이 든 토도로키의 옆에 앉았다. 히어로라면 많이 다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옆에 앉아 교복 치마를 꽉 움켜 쥐었다. 눈 앞이 흐릿해서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이불 밖으로 비져나온 손이 안타깝기만 해 그 손을 꼭 쥐었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꺼칠해져 있었다.


선생님께 사정을 해 학교가 끝나면 보충 수업 대신에 교과서와 공부거리를 들고 토도로키의 병실로 향했다. 토도로키의 누나 되는 사람과도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미도리야의 존재에 퍽 안심을 하는 눈치였다. 직장과 가정이 있기 때문에 항상 남동생의 옆에 있어줄 수는 없다며 미안해 하기에 미도리야가 괜찮다 달랬다. 토도로키는 잠에서 깨자 마자 옆에 미도리야가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놀랐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말을 해서 그런지,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미도리야. 말랐어. 미도리야는 제게 말을 건내는 토도로키에게 인사했다. 잘 잤어?


토도로키는 미안해 했다. 자신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미도리야는 알면 몸을 아꼈어야지. 하고 투박을 주었다. 토도로키 군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펜이 손에 안잡혔어. 미안해. 미도리야. 토도로키 군이 다친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슬퍼할 사람이 많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정신을 차려 다행이야. 토도로키는 말 없이 미도리야가 깎아준 사과를-몸이 불편해 미도리야가 입 안에 넣어 주어야 했다-우물거렸다.


더 이상 병원에 오는 것도 조금 힘들었지만, 미도리야는 아랑곳 않고 주말이 되면 토도로키의 병문안을 들렀다. 와서 학교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저런 일이 있었다. 하면서 도란도란 토도로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친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말도 안돼.

올 해 들어서 너와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내잖아.

그래도 나는 더 이상 다치는 건 사양이야.


엄하게 말하니 토도로키가 넓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 미도리야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56


열 여덟번의 가을을 지나왔지만 통틀어 이번 해의 가을이 가장 떠들썩 하고, 소란스러웠다. 급우들은 최종적으로 본 모의고사의 결과에 기쁨 또는 안타까움과 절망을 표출했다. 미도리야는 그 혼란의 틈 속에서도 제 예상보다 조금 더 잘 나온 성적표에 만족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H코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도리야. 너는 무슨 과?

생각을 해봤는데 역시 가고 싶은 건 경찰 쪽.

호오. 경찰인가. 어울리는 듯 하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어째서 어울리지 않는거야.

그야 너, 빌런은 때려잡을 것 같지만 동정에 호소하면 속수무책일 것 같은걸. 의외로 마음이 약하잖아.


미도리야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차근 차근히 바꿔 나가야지. 적당히 바꿔. 생각보다 장점에 가깝거든. 이후 의미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데 L코가 다가와 묻는다.


대학은 어디로 갈 건데?

Y시에 있는 대학교가 괜찮을 것 같아서. 여건 좋고 시험을 잘 보면 장학금도 주니까.

Y시는 여기서 멀잖아.

응. 하지만 합격하면 한 학기는 기숙사에서 생활야해 해.

토도로키는?

토도로키 군은 졸업하면 히어로 사무소에서 사이드 킥을 할 거래.

그게 아니라, 토도로키 군은 여기에서 히어로를 할 거잖아.

그렇겠지?

너는 Y시에서 대학을 다니구.

맞아.

토도로키 한테 이야기는 했어?




57


마지막 학창 시절의 겨울날, 눈은 오지 않고 쌓인 눈만 부는 바람에 가루가 되어 흩날렸던 날에, 목표로 했던 대학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다. 뛸 듯이 기뻐하는 딸을 위하여 어머니는 마찬가지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조촐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모두가 잠든 밤, 거실 소파 위에 누워서 수신함이 넘치도록 도착한 축하 메세지에 휴대폰의 뜨끈한 발열을 즐기며 문자를 보냈다. 그럼 이젠 경찰관 인거네. 아직은 아니지. 


오고가는 메시지를 훑던 도중 켜 놓은 TV의 심야 프로그램에서 토도로키의 소식이 흘러나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히어로 사무소에 사이트 킥이 될 예정. 미도리야는 휴대폰을 얼굴 위로 뚝 떨어트렸다. 묵직한 것이 코에 정통으로 떨어져 소리없이 아픔을 호소했다.




58


그 해와, 앞으로 일년간을 다 합쳐서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미도리야의 어머니는 토도로키를 만나러 간단 말에 비교적 쉬이 외출을 용인해 주었다. 미도리야는 걸음을 빨리했다. 거리는 불이 꺼졌다. 영업시간을 한참 넘겨서, 이십 사 시간 불이 켜진 가게를 제외하곤 죄다 셔터가 내려가 있다. 그 와중에도 커다란 반딧불이마냥 점점히 켜진 가로등을 따라 토도로키를 찾아냈다. 토도로키는 발개진 뺨을 하고 웃었다. 개성 탓인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차림새가 워낙에 가벼워 보여 미도리야는 본인이 두르고 온 초록색 목도리를 토도로키의 목에 둘러주었다. 괜찮다, 네가 춥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에 몇 달 전만 해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라며 부득부득 장갑까지 벗어 손에 끼웠다. 자국 없는 눈 위로 발을 디딜 때 마다 가루 눈이 소리없이 피어올랐다. 토도로키는 장갑 낀 손으로 미도리야의 손을 잡았다. 미도리야는 깍지를 꼈다.


토도로키 군, 아버지의 사무로소 들어간다며.

어디서 본 거야?

밤 늦게 하는 뉴스에서.

빠르구나.

괜찮아?


토도로키가 미도리야를 보았다. 아버지로서는 최악이지. 하지만 히어로로서는, 나름대로 인정할 만 해. 미도리야는 유독 혼자서만 색이 다른 가로등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뒤로 연인을 태운 자동차가 지나간다. 토도로키가 손을 들어 차가운 미도리야의 뺨을 쓸었다. 걱정하고 있는거 알아.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지낼지. 그렇지?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로키가 곱게 눈을 휘었다.


십 년을 기다렸어.


자신보다 한 마디 하고도 반절은 더 커다란 토도로키의 손을 잡았다. 미도리야가 눈을 내리깔았다.


반 년이 길지 않다는 소린 못 해.


장갑이 작아 손목과 엄지가 이어지는 부분부터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온 손을 달큰한 과자 부스러기가 박힌 볼 위로 문질렀다. 토도로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미도리야의 그것과 꼭 같은 높낮이로. 하지만 돌아올 거잖아. 물기 어린 눈을 하고 토도로키를 올려다 보았다. 컴컴한 밤하늘 아래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눈발에 가린 푸르른 눈동자 색이 시시각각 다른 빛을 띄었다. 아이는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꼭 같은 것이 여전히 있구나. 미도리야가 토도로키를 따라 서서히 웃음을 그렸다. 한 밤중에 빛나는 태양처럼. 바다에 잠긴 숲이 흔들리는 모양새로- 머리카락이 눈발과 함께 흩날렸다. 앞 말은 생략했다. 토도로키라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으므로. 




59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세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에 미도리야의 대학교가 있었다. 성인이 되어 듣는 강의와 과제는, 그리고 시험마저도 이전의 그것과는 형태가 아주 달라서 적응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룸메이트는 좋은 사람이었다. 겁 없이 아침 일 교시를 신청했다가 고등학교 시절 어떻게 수업을 일일이 따라간 걸까, 체력의 한계를 체험하기도 하고, 신입생이라는 이유로 여러 술자리에 불려나가 선배들 눈치를 보면서 입에 대지 않던 술을 조금씩이나마 마셔도 보았다.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범위와 작년에 나왔다는 시험 문제를 보고 기함하며- 도서관 열람실 한 칸에 전세를 낸 듯 틀어박혀 에너지 드링크로 이틀을 연명했던 날도 있었다.


만남의 자리라는-흔히들 미팅이라 말하는- 주선이 기말고사를 앞두고 들어왔다. 앞머리를 고무줄로 틀어 올린 미도리야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미도리야는 남자친구 없잖아. 미도리야나 잠시 고민을 하다 대답한다. 사귀자는 제안을 받은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모두가 기함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그 뒤로 미도리야는 시시때때로 붙들려서 토도로키와 미도리야의 유구하고 장대한 역사를 최대한 간추려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이 세상의 순애보가 아니라는 감탄은 덤으로 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사귀자는 말을 들은게 아니잖아. 미도리야의 둥그런 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남자 선배-평판이 좋지 않다-가 억지를 부렸다. 모두가 눈을 흘기는 와중에 미도리야는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저도, 그 애도. 친구로서가 아니라 다른 좋아해, 라고.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종강이 왔다. 한 학기동안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학생들이 나는 자취를 해볼까 해, 나는 조금 힘들더라도 집에서 통학을 하고싶어, 그것보단 알바가 문제인데, 등등 다음 학기와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미도리야. 너는 방학 여기서 보낼거야? 동기 U코가 물어왔다. 미도리야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돌아갈거야. 집으로.




60


학교는 외곽에 있었고, 집은 도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조금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건가, 점점 습해지는 열기에 고민을 하는 사이 전철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도리야는 구깃구깃 짐을 우겨넣은 캐리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집을 지나치고-어머니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어린시절의 추억이 빼곡히 깔린 놀이터를 지나쳐, 언젠가 함께 걸었던 길가에 멈추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너머로 그가 보인다. 미도리야는 캐리어 손잡이를 놓았다. 햇빛이 강렬하다. 아지랑이 때문인지 눈 앞이 뿌예서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토도로키가 두 팔을 벌린다. 미도리야는 뛰었다. 온 힘을 다해 짧은 거리를 달려간다.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쳤다. 토도로키가 잠시 뒤로 휘청이더니, 곧 중심을 잡았다. 날개뼈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바닷물 속에 잠긴 숲처럼, 바람에 흩날리듯, 아니지, 또는 파도에 흔들리듯 나풀거렸다. 토도로키는 쏟아져 내리는 미도리야를 잡았다. 


기다렸지.


목소리에 온갖 감정이 새기어져 있어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미도리야는 당연한 수순인 듯 토도로키의 목에 손을 감았다.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났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그 말을 듣고 미도리야가 토도로키의 볼에 손을 올렸다. 열상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더없이 조심스럽고, 또 사랑 그 자체를 표현하는 듯 애정이 뚝뚝 묻어 떨어진다. 미도리야는 열상을 사랑했다. 열상을 가진 제 소꿉친구를, 천진하게 입술 위로 입 맞추는 어린 시절 속의 그 아이를.



두말이 필요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춘다.



서툴고, 열렬하게.








귓가를 스치며 사랑한다고 말 했을 때

나는 그만 햇살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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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

캇데쿠 유곽 AU

개인작 2016. 6. 4. 20:50

1.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만난 것은 나이 아홉이 되던 해 봄이었다.



유곽의 아침은 한산하다. 간 밤, 방과 방 사이를 오가던 유녀들의 콧소리와 손객, 객주와 시종의 아첨이 수런히 떠돌다 시정 잡배의 고함을 마지막으로 모두 가라앉은 아침이면 거리는 이곳이 질나쁜 유흥가라는 것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바쿠고가 빗자루를 들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유곽 안의 시동 중에서도 가장 어린축에 속한 그는 자연스레 모든 잡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좀 더 높은 급의 시동들에게 배운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슬슬 빗자루를 하던 바쿠고가 주변 눈치를 보았다. 앞섶에서 화과자 하나를 꺼냈다. 손님을 배웅하고 남은 상을 치울 때 슬쩍 한 것이다. 한입 베어무니 단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서있던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하릴없이 잡초를 뽑았다. 아침잠을 줄이는 대신 초록색 풀때기 하나 보이지 않도록 잡초를 정리한 다음 빗자루로 뒷마당을 깨끗하게 쓸어야 했다. 유녀와 손님은 앞문으로 오지만 점원을 포함한 시동이 뒤로 온다.



뒷문이 열렸다. 바쿠고는 먹다 만 과자를 황급히 옷 섶 사이로 감추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안간다고 버티던 그의 손을 잡아채 질질 끌고와 창고에 집어 던졌던 몇 급 위의 처녀애였다. 그녀의 손에는 또래의 남자아이가 붙들려 있었다. 조그만 보따리가 구세주인것마냥 꼬옥 붙잡고 있는 꼴이 보기 한심스러웠다. 여자애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여자애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마당의 상태를 둘러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더러우면 뺨을 쥐어 터질것이 뻔하다. 맞지 않는 날이 더 드물었기에 다리를 삐딱히 서서 여자애를 노려 보았다. 그녀가 흥흥거리며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저를 본다.


“너 할 일 없지?”


눈 앞에 불이 화끈할 각오를 했는데 얄미운 입에서 나온 소리는 영 헛단 말이라 바쿠고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할 일 없느냐구 물었어.”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물어본다. 입술을 앙다문 모양새가 뺨은 몰라도 머리를 쥐어박힐 것 같았다. 바쿠고가 얼른 대답했다.


“보면몰라? 일하고 있잖아.”

“이게 누나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마당도 다 쓴 것 같은데 아침 먹기 전까진 할 일 없잖아. 모를 줄 알아?”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있다고 한들 없다고 한들 이미 그녀의 마음을 정해졌는데 더 대답을 해 무엇하랴.


“이 앨 데려가서 챙겨.”

“뭘 챙겨.”

“씻기구 옷 갈아 입히구 너 데려왔을 때 내가 했던대로 하면 되어.”

“뭘 챙기냐구 내 한몸 보전하기도 벅찬데.”


이후는 뭐 간단하다. 툭 던진 말이 심기에 거슬렸던지 여자애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얼얼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바쿠고에게 혀를 내밀고 앞으론 쟤를 네가 돌보라는 말 만 남긴채 마루 위로 올라서 유곽 안에 들어가버렸다. 마당에는 독이 올라 씩씩거리는 바쿠고와 가엾게도 제 또래의 아이가 얻어터지는 것을 보고 덜덜 떠는 소년만 남았다. 소년이 바쿠고의 눈치를 보았다. 바쿠고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땅바닥으로 빗자루를 집어 던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소년이 히익 소리와 함께 재빨리 눈을 피했다. 사람 하나 잡아 죽일 눈빛이다. 바쿠고가 퉷, 하고 침을 뱉었다.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곤 마지못해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성큼성큼 유곽 안으로 거침없이 걸어들어가는 아홉 살배기 또래의 뒤를 잔뜩 겁 먹은 채로 따라들어갔다.



“넌 이름이 뭐냐?”

“......”

“아 입 없어?! 이름이 뭐냐고!”

“미, 미도리야 이즈쿠...”

“그럼 이즈쿠로 부른다. 여기선 앞 이름 까발려봤자 좋을게 하나 없어.”

“으응, ...근데 넌 이름이 뭐야?”

“그게 왜 궁금한데?”


그거야 네가 내 이름을 물어봤으니까. 소년이 웅얼거렸다. 바쿠고의 기세가 워낙 흉흉해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한다. 시팔, x같은, 얼추 걸러 듣기에도 결코 곱진 않은 말이 남자아이 입에서 나왔다. 소년-미도리야-의 어깨는 점점 움츠러 들었다. 얼기설기 기운 천쪼가리들로 창문을 가린 유곽은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컴컴했다.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등에 더 바싹 붙었다.


“카츠키.”

“어?”

“생각해보니까 니가 내 이름 모르면 날 못 찾잖아.”


그럼 내가 또 얻어터져. 미도리야가 잘 따라는 오는지 흘끔 뒤를 곁눈질 한 바쿠고가 멈춰서 커다란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유녀의 시중을 듣는 하인들이 널부러져 잠을 자고 있었다. 좀 똑바로 자지, 미친. 그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이불을 둘둘 감고 있었기에 어디로 발을 디딜지 몰라 한참 우물쭈물 거리던 미도리야가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넌 오지 마.”


멈춰섰다.


“깨면 골치아파져.”


바쿠고가 퉁퉁 부은 제 뺨을 가르켰다. 미도리야가 침을 꼴깍 삼켰다. 벽장 문을 열고 한가득 쌓인 옷을 뒤적거리는 모양새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유곽 안에서는 기묘한 향기가 맴돌았다. 분내와 살냄새, 그리고 설명하기 애매한 그 무엇이 불화음을 내며 제각기 본인이 이곳에 있다 소릴 지른다. 어둠이 잡아먹을 것 같다. 복도 저 끝을 보며 생각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문짝을 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찾았다. 야 너 거기 똑바로 서있어!”


바쿠고가 제 몸보다 조금 큰 옷을 휘두르며 미도리야에게 소리쳤다. 







2.

한 치수 더 크다곤 해도 헐렁헐렁하게 남는 소매를 질질 끌고다니는 꼴이 영 볼썽 사나워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불러 세웠다.


“칠칠치 못하잖냐.”


소매를 걷으니 가느다란 팔뚝이 드러난다. 한 손에 잡기 모자람이 없어 이놈은 이곳에 팔려오기 전에도 밥을 못 얻어먹었나 생각했다. 참 못 얻어먹었으니까 팔려왔겠지. 속으로 자문자답을 하고 걷어올린 소맬 대충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니 그나마 일을 좀 하겠다 싶다. 미도리야는 꿈뻑꿈뻑 저를 잘도 올려다보았다. 멍청한 표정이 보기 싫다. 새로운 곳이 낮선 것인지 원래 겁이 많은건지 달달 떠는 다리를 모른 척 했다.


바쿠고는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능숙했다. 부모와 함께 집에서 살던 시절부터 변함이 없었다. 가족이 있어 보았자 배곯는 소리와 먹을 것 축내는 입만 하나 더 는다. 산과 들판으로 쏘다니며 나무 껍질을 긁어다 씹거나 핀 꽃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면 굶주림이 어느 정도는 가셨다. 집을 떠나게 된 날에도 붙잡은 자식의 손을 계집아이에게 넘겨주며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부모에게 눈길 하나 건네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미도리야는 할 줄 아는게 정말, 정말로 없었다. 물통을 엎질렀다 했다. 걸레질을 하라 천쪼가리를 쥐어 줬더니 멀뚱멀뚱 서있었다고. 등짝을 후려치며 독촉을 해야 비로소 허우적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면 괜찮다. 그것 뿐이면. 미도리야는 눈치가 남들보다 조금 모자랐다. 남이 화를 내면 어, 하다 얻어맞았고 급 높은 시종들이 하는 말에 제 때 대처하지 못해 또 얻어맞았다. 그것이 바쿠고의 눈에는 많이 모질라 보였다. 모질이 새끼. 혀를 쯧쯧 찼다. 그는 몸도 작고 일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려운 환경에서 곱게 자란 모양이지, 처음 왔던 뒷마당에서 멍하니 땅바닥만 파는 것을 엉덩일 발로 차며 밥값은 해야한다 말했더니 울먹이다 눈물을 쓱쓱 소매로 닦았다.


퉁퉁 부은 눈과 볼때기를 달고 옆에서 걸레질 하는 자신을 따라했다. 기가 찼다. 내가 그렇게 움직이디? 허리를 세워서 온 몸의 무게를 실어 닦아 나가야 한다. 몸짓까지는 그럭저럭 따라한다 싶더니만 앞으로 조금 가다 넘어지고 넘어지고, 바쿠고가 마룻바닥 두 줄을 왕복하며 깨끗이 만들 동안 미도리야는 한줄도 채 끝까지 가지 못했다. 흘끗 본 무릎팍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 시간이 되었다. 유녀를 제외한 종업원들이 우루루 몰려들어 제각각 바삐 자신의 밥그릇을 챙겼다. 옆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


“배고프냐?”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진짜 입이 없나”

“배고파서 말 할 기운도 없는걸.”

“식충이네 이거.”


한사람 몫도 못하는 주제에 밥은 무슨 밥이야. 느낀 바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미도리야가 풀죽어 제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맨 발을 꼼질거린다.


“기다려야 해.”

“무얼?”

“우리 차례는 저 인간들 다 배식 받고, 윗방으로 밥 갖다 주고 나서야.”



밥통에 남은 것이 있을리 없다. 바쿠고는 익숙한 듯 주걱으로 남은 밥풀을 싹싹 긁어 모았다. 미도리야가 입을 헤 벌리고 꽁보리밥이 잘게 쌓인 주걱을 바라본다.


“거기 하나 더 있지?”


미도리야가 주변을 둘러보다 빈 밥통을 하나 발견하고 화색을 지었다.


“가끔가다 뼛조각이 있을때도 있다고.”

“정말?”


그럼. 그 날은 오랜만에 고기로 몸보신 하는거지 뭐. 두 아이가 얼굴보다 커다란 밥솥에 머리를 처박고 우억우억 굳은 밥알을 씹었다.


미도리야는 저를 캇짱, 캇짱, 별 거지같은 애칭을 가져다 붙이며 잘도 따라다녔다. 몇 번 챙겨주었다고 헤죽헤죽 얼굴 가득 멍청한 웃음을 짓고 쫒는 꼴이 퍽이나 우습다.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일을 덜 손이 늘어 느긋이 슬쩍한 과자를 씹으면서 미도리야에게 빗자루를 넘겨 주어도 되었으니까. 붉게 부풀어 오른 무릎의 상처가 유독 거슬릴 때엔 과자를 반절 뚝 쪼개어 (물론 바쿠고의 것이 더 크다) 건네주기도 했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고마워 인사를 받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넌 뭐가 좋다고 실실 웃냐?”

“네가 과자를 줬잖아.”

“그게 좋아?”

“응. 좋아.”




“그리고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아.”

“누가 니 친구래?”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3.

일반적으로 시종들이 머무는 곳과는 천지차이로 달랐다. 바쿠고의 등쌀에 못 이겨 윗층으로 올라온 미도리야가 생각했다. 결이 두꺼운 천으로 널찍한 창문은 죄다 틀어막혀 있었고 컴컴한 복도를 불그스름한 등이 비춘다. 고요한 분위기가 섬찟해 쉽사리 한발짝 내딛지 못했다. 간단한 아침 요기를 든 손이 서서히 저려오기 시작한다. 미도리야가 머리를 굴렸다. 혼자서는 못 하겠다 다시 내려갔을 경우, 아침이 늦어진단 타박과 함께 등짝을 얻어맞고 다시 올라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서 있기엔 아침상을 든 손의 힘이 부족했다. 분명히 엎지를 거야. 두어대 볼기짝을 맞는 것으론 끝날 일이 아니다. 미도리야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제 어두움 보다는 현실적인 아픔이 더 깊게 다가왔다.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너 최근에 온 아이니?”


미도리야가 몸을 움츠린다.


“네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는 것을 유녀는 용케 알아들은 듯 했다.


“빗질이 능숙하지 않아 물어보았어”

“죄,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 모두 처음은 서툴잖아”


거울로 흘끔 뒤편의 미도리야를 보며 살풋 눈웃음 친다. 어린 가슴이 울렁거렸다. 미도리야가 화르륵 불이라도 붙은 듯 요사스러운 눈초리를 피했다. 조막만한 새끼 사슴처럼 구는 것을 참다못해 유녀가 까르르 소리 높여 웃었다. 참, 귀엽기는.


“이곳 생활은 어떠니? 밖보다 나아?”

“굶지는 않아 좋아요”

“너두 그러는구나. 밖이 참 살기 힘든가보네”

“올해도 흉년이라 그랬거든요”

“그래? 그런데도 손님은 좀체 줄지를 않네”


유녀가 새빨간 연지를 새끼손가락 끄트머리에 펴발랐다.


“앞으로 와서 거울좀 들어주련”


미도리야가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뒤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을 훔쳐 보았을 적보다 훨씬 눈부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본 것 같았다. 침을 꼴깍 삼켰다. 분내 향기가 좋다. 향나무 기름을 펴바른 머리가 반질반질 윤기 돈다. 달덩이처럼 동그랗고 새하얀 얼굴에 핏방울 같이 붉은 연지가 호선 그리는 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티끌 한점 묻지 않은 소년의 얼굴에 장난기가 동한 것인지 여인이 손을 뻗었다. 정돈된 손톱이 미도리야의 얼굴에 닿는다.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빼는 것을 다른 손으로 꼭 붙든다. 마른 손이 눈 앞에 아른아른 맴돌았다.


“내가 무서워?”

“아니, 아니..”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꼭 맹수 앞의 먹잇감 꼴이다.사내를 상대하는데 이골이 난 손길이 능숙하다. 미도리야가 잘게 숨을 떨었다.


“그럼?”

"손이, 참 고와요.."





“재미 좀 봤나보다?”


바쿠고가 괜시리 심술어린 말투로 물어왔다. 미도리야는 아직도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쭈. 한숨쉬는 것 봐.”

“선녀를 본 걸거야 캇쨩.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봐..”

“선녀? 웃기네 저 여자들이 선녀면 우리는 신선인가”

“또 만날 수 있을까?”


미도리야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유녀가 있는 방을 돌아보았다. 정신팔린 미도리야의 엉덩이를 바쿠고가 걷어찼다.


“아야, 아파 캇쨩!”

“아프라고 때렸지 웃으라고 찼겠냐? 꿈은 꿈이나 꾸라고 있는거야 임마.”

“그치만”

“여차하면 영원히 꿈 꾸게 해 줄수도 있고”


계단을 내려가는 길이다. 위협적으로 말하며 미도리야의 뒷덜미를 움켜쥐자 그제서야 쓸데없는 소릴 지껄이던 입이 조용해 졌다.


“쓸데없는 생각마라 등신아”


식을 줄 모르는 얼굴에 쉼없이 부채질을 하는 미도리야에게 바쿠고가 한심한 듯 말한다.


“저 여자들은 사내 다루는게 일이야”





달이 높게 뜬 밤 미도리야는 술 심부름을 나갔다. 한방울이라도 흘릴까 조심조심 걷던 미도리야는 강물 위로 비친 그림자를 보고 말았다.

넋이 나가 돌아온 미도리야는 고열이 끓어올라 삼 일 밤 낮을 앓았다. 열에 들떠 가끔씩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빼곤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미도리야의 간병은 온전히 바쿠고의 몫이 되었다. 밥알을 넘기지 못해 뜨거운 물에 불려 먹였다. 그것도 삼키지 못한 날엔 다 때려치고 죽게 놔둘까 싶다가도 고맙다며 웃던 얼굴이 떠오르니 차마 그 짓도 못하겠던 지라, 딱딱한 밥을 꼭꼭 씹어 미도리야의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미도리야가 술 심부름에서 돌아온 날 유곽에선 유녀 하나가 사라졌다. 소문에는 손객과 눈이 맞아 달아났다 했을까. 미도리야가 무엇을 보았는진 뻔하다. 몸값도 지불하지 않고 패물을 챙겨 달아나는 유녀에겐 칼침도 아까웠을 터다. 아침나절엔 골이 부숴진 채 물에 퉁퉁 분 시체가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뭐 그깟게 대수라고. 등신이. 술 좀 흘리면 어때. 모가지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모질이. 모질이새끼. 바쿠고가 검지로 미도리야의 미간을 문지른다. 열이 제법 내렸다. 옆에 놔두었던 물수건을 한번 짜 내고 식은땀에 절은 얼굴을 닦아내었다.


"등신. 일어나면 진짜 가만 안 둬."






4.

털고 일어난 이후에도 종잇장처럼 비실비실 거리는 것은 변함이 없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마른 등을 걷어차려다 말았다. 여름 더위가 성가시다. 얇은 옷임에도 불구하고 더위를 많이 타는지 밑단을 죄다 걷어붙여 속 살이 훤히 드러난다. 몸 쓰는 일이 대부분이니 움직임을 편히 하기 위해 허벅지쯤 조금 보여도 거리낌 없는 것이 유곽이었다. 허리끈을 헐렁하게 묶은 여 시종의 젖가슴을 보는 것이 바쿠고에겐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미도리야를 보는 것은 조금, 그래 아주 조금 불편했다. 봉긋한 가슴도, 토실토실한 엉덩이도 없이 빼빼 말라 비틀어져서 볼 것도 없는 몸에 왜 자꾸 흘끔흘끔 눈길이 가는지. 주저 앉아 바닥을 닦으니 옷이고 뭐고 새하얀 둔부가 드러난다. 며칠 앓더니 진짜 실성했나? 바쿠고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저편에서 소곤소곤 웃는 목소리가 괜시리 거슬린다. 빽 소릴 질렀다.


“별꼴이야, 흥”

“시끄럽다고 계집애야. 떠들 시간 있음 옷이나 여며”

“카츠키 설마 내 가슴이 신경쓰여?”


여시종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모아보였다.


“볼게 뭐가 있다고”


어이가 없어 얼굴을 찌푸린다. 바쿠고의 말에 앳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물들었다.


“뭐라구? 너 지금 말 다했어?!”

“마룻바닥 같은 가슴 관심 없다”


미도리야가 어깰 움직여 뺨을 흐르는 땀을 닦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여름엔 예전부터 약하다. 막 앓다 일어난 참이라 이번 여름은 더 했다. 누워 있을 때 바쿠고가 간병 해 주었단 말을 들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축축한 이불 위에서 눈 뜨니 바쿠고가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일어났냐. 넌 하여간 사람 귀찮게 하는데 뭐가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바쿠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도리야가 아직도 시끄럽게 다투고 있는 유곽 한쪽을 본다. 머리채를 잡혀 이거 안 놓느냐 버럭버럭 소릴 지르면서도 주먹은 휘두르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종들이 깔깔 웃었다.





봄에는 몰랐는데. 뒷마당 쪽문 옆에 뭔갈 심어놓은 모양이었다. 그새 자란 넝쿨이 잎을 피워내 문을 가려놓고 있다. 미도리야가 이파리를 살핀다.


“뭐하냐”


바쿠고가 머릴 문지르며 다가왔다.


“응. 캇짱 여기 누가 뭘 심었나봐”

“아 그거”

“알고 있었어?”

“유녀로 막 팔려온 애가 심었는데, 슬슬 꽃 필 때가 됐나”


유녀가 심었다는 말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유녀님이 심으신 거야?”

“이젠 존칭까지 붙이냐”

"그래도 우리보단 귀하신 분들인걸"


미도리야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린다. 왜 때리냐는 미도리야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래. 어디 귀한집 딸이라고 그랬었지"


바쿠고가 심드렁하게 이파리를 툭 툭 친다.


“그러지마 캇짱”


가냘프게 버티는 이파리를 바라보며 미도리야가 말렸다. 쳇, 바쿠고가 혀를 찬다.


“이젠 주인도 없다구”

“응?”

“그 유녀, 얼마 안 있어서 병 걸려 죽었어”


미도리야가 얼얼한 머리통을 감싸쥐고 바쿠고를 바라보았다.


“성병이었지”




미도리야는 말이 없다. 한참을 흙바닥 위에 주저 앉아 꽃 없는 넝쿨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쿠고가 툭, 어깨위로 머릴 떨군다. 슬쩍 고갤 돌려 비죽비죽 거침없이 자란 머리통을 보았다. 제 몸이 작아 불편하진 않을까 생각한다. 바쿠고가 눈을 깜박였다. 여자아이 것만큼이나 긴 속눈썹이 팔락인다.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아 볼록함 뺨에 불그스름한 빛이 물들었다. 벌써 해 질 무렵이 되었나 싶다.


“이즈쿠”


바쿠고가 드물게 미도리야를 이름으로 부른다.


“응 캇쨩”


미도리야가 작게 대답했다. 불러놓고선 한참이나 말이 없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어 놓았다. 뺨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간지럽다. 서서히 어깨가 저려 온다. 피해달라 말을 해야 할 까, 미도리야가 제게 기댄 바쿠고를 보았다. 그 새 눈을 감았다. 규칙적으로 몸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잠이라도 자나 싶다. 이름 불러 놓고, 멋대로 기대어놓곤.

가벼이 뺨을 치려 들어올렸던 손길이 도중에 멈춘다. 늘상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콧 날을 스치듯이 만져본다. 생각보다 뾰족뾰족, 꼭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은 아프지 않고 부드럽다. 바쿠고는 저한테 친절히 대한 적이 없었다. 나눴던 대화의 절반 이상이 면박과 욕설일 것이다.


“캇쨩”


그럼에도.


“역시, 혼자는 무섭지?”


기댈곳은 오로지 서로밖에 없다. 미도리야가 서글프게 웃었다. 마주 기대오는 머리를 바쿠고는 피하지 않았다.






5.

늦여름의 습기가 몸에 눅눅히 감겨 들었다. 낮이 저문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좀체 가시질 않는다. 저만치서 쉬고 있던 미도리야의 이름을 누군가가 부른다. 벌떡 일어나 달려간다.


“이건 서점에 가져다 주구, 잃어버리면 경을 칠 줄 알아라”


종이 꾸러미를 내밀며 여주인이 신신당부를 했다. 미도리야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물어 보았자 대답해 줄 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둑하게 켜진 불빛 아래를 지나 쪽 복도 밖으로 길을 나섰다. 밤 길은 영 달갑지 않다. 바쿠고에게 동행을 요청할까, 생각했지만 그 또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어. 야 너 어디가?”


바쿠고가 용케 밖으로 향하는 미도리야의 머리꼭지를 발견했다. 망자를 추모하는 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야, 야 등신! 이즈쿠!”


다시금 크게 불렀지만 이미 쪽 문 밖으로 발을 내민 후였다.




유곽 뒤편의 일층은 그토록 시끄러웠는데 밖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미도리야는 굳게 닫힌 문을 뒤돌아보았다. 문을 가린 덩굴에 꽃 봉오리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위로 붉은 등이 걸렸다. 앞 문도 이럴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긴 담벼락을 돌아 낮처럼 환한 앞문을 훔쳐본다. 다른 의미로 사람들이 분주 했다. 먹고 살기 위하여 한순간의 즐거움을 파는 사람들이 그득하다. 토악질과 욕지거리, 교성이 들려온다. 훔쳐본 여인네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담을 따라 취객들이 우수수 몰려오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황급히 길을 돌아 심부름 장소로 향했다. 어둑한 길이 끝이 나지 않을 듯 이어진다. 그러나 망자의 마지막 길을 밝혀 줄 붉은 등은 어딜 보아도 찾을 수 없다.





“그 집 여자가 하나 죽었다지?”


서점의 주인은 늦은 밤 문을 두드리는 미도리야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않았다.


“네에”


미도리야는 컴컴한 가게를 구경한다. 서책 냄새가 좋았다.


“시름 시름 앓더니 결국”

“병에 걸리셨었나요?”

“병 같은게 아니었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주인이 낄낄 웃는다.


“죽을 때가 되니 마음을 앓았지”


눈을 찡그리며 미도리야가 가져온 서신을 한번 들여다본 주인은 종이를 서너장 꺼내 베껴쓰기 시작했다.


“이게 무언지 아니?”

“아니요”

“글을 몰라?”

“배운 적이 없어요”

“이게 뭐냐면 말이지, 그 여자가 자기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미도리야가 물어보지 않았음에도 주인은 혼잣말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시신 옆을 지킬 사람이 하나 없거든. 생각해보렴. 어린 나이에 팔려와 부모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하다못해 마음 터놓을 주변인 하나 없었다. 인연이라곤 하룻밤 상대한 사내들 밖에 없는 게야. 그러니 편지를 보내는 거지. 그간 모은 패물이 있으니 이것으로 괜찮은 땅에 묻어 달라 청하는 거야”


주인은 잠깐 붓을 놓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사내들은 오지 않을 거야”





장례식은 삼일도 아니고 이틀로 끝났다. 장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이틀간, 그녀를 찾는 사람은 서점 주인의 말마따나 단 한명 나타나지를 않았다. 틈이 날 때마다 미도리야는 유녀의 시신이 안치된 방 앞을 서성였다. 때로는 앉아있기도 했다. 살아 있을 적 말을 섞어본 일 조차 없음에도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어린 마음이었다.


늦은 여름, 비가 온다. 장마철이 지났음에도 구름은 마지막 남은 물기를 짜내고 싶은지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바쿠고는 뒷마루에 누워 있었다. 지난 밤 손님이 먹지 않고 남겨둔 찐 빵 한접시를 몰래 숨겨왔다. 다 식었지만 단 맛은 충분하다. 하날 집어 우적우적 씹는다. 팥이 혀 위를 뛰논다. 옆에 앉은 미도리야에게 접시를 쓱 내밀었다. 고마워. 미도리야도 하나 집는다.

비 오는 날은 밤 손님이 드물다. 뼈마디가 노곤한 시종들도 귀찮음에 몸을 담그는 날이다. 덕분에 좀 체 누리기 힘든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한낮임에도 날은 어두컴컴했다. 딱 자기 좋네. 식은 찐빵을 마저 삼키고 바쿠고가 눈을 감았다. 미도리야는 한참 물 고인 마당을 내려다 본다.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면 웅덩이 위로 파문이 일다 잔잔해지고, 다시 물방울이 떨어지고.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화들짝 놀라 고갤 들었다. 그러나 다시 들리지 않는다. 빗소리에 섞여 들어 왔을까, 누군가가 또 사람들의 곁을 떠났나. 조그마한 주먹에 차고 넘치는 빵을 한입 더 베어물었다. 팥은 모래같이 까끌하면서도 더없이 맛나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있잖아. 캇짱”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냐”

“내가 죽으면 캇짱이 내 무덤을 만들어 줘”


이건 무슨 개소리인가 싶다. 바쿠고가 한쪽 눈을 떴다.


“몸 전부 묻지 않아도 괜찮아.”


생각은 말을 앞선다. 미도리야는 마루 바깥에 내민 다리를 달랑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 한 줌 잘라다 두꺼비 집처럼 작게 만들어 줘도 좋아”

“지랄하지마”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바쿠고가 말을 자른다.


“캇짱”


보채 듯이 미도리야가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 흔든다. 들어줘.


“뒷마당 쪽문 옆에다 묻어줘. 그리고 가끔씩 보러 와 주면 충분해”


그럼 내가 모아둔 보물 다 너 줄게. 쓸모 없는 것만 있는게 아냐. 동전도 몇 개 있어. 바쿠고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지랄맞은 새끼가 요새 좀 잘 해줬다고 기어올라? 당장이라도 한 대 쥐어박을 듯 주먹을 꼭 쥐는 것을 미도리야는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평소라면 맞기 싫어 당장에 도망을 쳤을 텐데도. 마주하는 눈이 맑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바쿠고가 묻고 싶은 말을 삼켰다. 미도리야는 마음이 약했다. 쉽게 울고 쉽게 웃었다. 


“넌 안 죽어”

“그래도, 만약에 말이야.”

“계속 그딴 소리 지껄일거면 지금 당장 뒤지던가”


속에 고인 독이 형태를 띄고 튀어나온다. 바쿠고는 비로소 답답함을 해소 할 수 있었다. 미도리야를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인 오물이다.


“....”

“안말려. 가서 목 매달고 뒤지라고!”


바쿠고가 벌떡 일어서 미도리야의 멱살을 잡는다. 쏟아질 듯 일렁이는 녹음이 뚜렷한 분노를 간신히 마주했다. 미도리야가 눈을 피한다. 그래, 넌 결국 그렇지. 바쿠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켁켁, 숨을 뱉는다. 괴롭다. 정말 성을 내야할 것은 누구인지. 미도리야가 손톱을 세워 바쿠고의 손 등을 긁는다. 얕게 난 상처에 핏방울이 고였다. 눈꼬리를 타고 빗방울을 닮은 눈물이 또르르 굴렀다. 미도리야가 입을 열었다. 공기 빠지는 소리만이 날 뿐이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언젯적 빗자루를 집어 던졌던 것처럼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물 고인 마당에 집어 던졌다. 씩 씩 숨을 고른다. 진흙에 얼굴을 쳐박히고 숨까지 막혔던 미도리야는 한참 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약해서, 금방이라도 뒈질 것 같은 주제에.


“죽어”


미도리야의 귀로 파고든 것은 바쿠고의 비수다. 바쿠고는 속에서 날뛰던 독을 꺼내어 놓고 허전함을 뒤로 했다. 내리던 비는 더욱 알이 굵어져 쏟아진다.


“캇짱”


울음섞인 미도리야의 부름이 길게 울린다.


“카츠키-”



끈덕지게 달라붙는 목소리를 모른 채 했다.






6.

낙엽이 유곽 주변으로 빙 둘러 쌓인다. 유곽에는 힘깨나 쓴다는 귀족들이 드물게 행차를 납시었다. 여주인은 돈을 들여 담벼락 주변에 계절따라 때깔이 변하는 나무를 심었다. 유녀를 사러 오는 주제에 자연과 운치를 찾는다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뒈질 노릇이지. 그래도 날이 겨울을 향해 갈 수록 오색빛으로 물드는 나무들을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누렇게 변해 바닥에 떨어지는 부산물들을 치우는 것은 귀찮았다. 매우. 아주 많이.

계절이 바뀌는 태동기다. 날이 추워진단 말이다. 바쿠고는 버석버석 소릴 내는 낙엽을 신경질적으로 밟았다. 이까짓 것 얼른 치워버리고 부엌에라도 숨어 들어가 몸을 녹일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새 곱은 손을 문질렀다. 올 해는 유독 추위가 빠르다. 발길질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시도 때도 없이 희번뜩 눈알을 굴리며 제 밑 시종들의 흠을 찾는 종장이 근처에 없다. 외에 지켜보는 사람도 드물었다. 부엌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나마 밤 새 불을 피웠던 곳 근처에서라도 몸을 녹일 생각이었다.


"요새 말이야"


닫기 무섭게 문 앞으로 두엇의 그림자가 진다. 바쿠고는 벌렁이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자리를 잡았다. 달갑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신경 안 쓰는 것 같던데"

"그 놈 성격에 끼고 산게 용하지"


가만히 있을 작정이었는데. 얼핏 듣기에도 제 흉을 보는것이 뻔한지라 추위고 뭐고 뛰쳐나가 흠씬 두들겨 패 줄까 생각했다. 바쿠고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마저 발까지 움직이기에는 자리잡은 곳이 지나치게 아늑하다. 남들보다 조금 모자란 참을성으로 들어찬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말려야 하지 않아?"

"내비 둬. 재밌던걸 뭐"


계집아이 둘은 미닫이 문을 하나 사이에 두고선 잘도 입을 놀려 댔다. 대부분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나 두서너급 위의 시종에 대한 불평이었지만 중간중간 흘려 들을 수 없는, 괴롭힌다느니 운다느니, 질 나쁜 장난 따위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흘러나왔다. '새로 왔었던 그 애 상처가 아물만 하면 생기고 또 생기더라' '뻔하지 뭐' '놀잇감 대하듯이 하던데' '가끔은 조금 불쌍하더라' '그럼 말리지 그래?' '내가 미쳤어?' 가만 듣고 있자니 미도리야의 이야기였다. 언제부터 관심이 그리 많았다고. 괜시리 짜증이 난 바쿠고가 문을 주먹으로 쾅 쳤다. 바깥에서 소스라치게 놀란 비명소리가 들린다. 계집아이들의 그림자가 황급히 사라졌다.





쾅. 거한 소리와 함께 미도리야가 넘어졌다. 안 그래도 성치 않던 무릎 위로 움푹 패인 상처가 하나 늘었다. 딱지 덮었던 살점이 또다시 까져 덜렁거린다. 썩 보기가 좋진 않은 모습이었다. 비위 약한 시종 몇 명이 헛구역질을 했다. 와중에 발을 걸어 넘어트린 아이가 놀란 척을 한다.


"세상에. 거기 있으면 어째?"

"미, 미, 미안해"


아픔을 참고 미도리야가 사과를 한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모질아.


"하마터면 윗층에 갖고 올라갈 그릇을 놓칠 뻔 했잖아."

"정말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마룻 바닥 위로 무릎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제서야 아이가 미도리야의 무릎을 보곤 인상을 찌푸린다.


"병신같이 할 줄 아는거 하나 없으면 눈 앞에 띄지도 말란 말이야"

"...."


혀에서 튀어나온 가시가 아프게 박힌다. 미도리야가 있는 힘 껏 제 손을 쥐었다.


"뭐. 할 말 있니?"

"아냐, 미안해. 미안해"


흥. 아이가 콧방귀를 뀌곤 자릴 떴다. 소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시종들도 제각기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길이 막혀 지나가지 못하던 바쿠고 또한 아이들 틈에 섞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음에도 도울 수 있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나름의 고집이었다. 입술을 깨문 자리가 미도리야의 무릎처럼 불그스름이 부풀어 오른다.




바쿠고는 때때로 괴롭힘 당하는 미도리야를 발견 했다. 사실 발견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이기에도 애매하다. 마치 보라는 것 처럼 바쿠고가 지나가는 길목 앞엔, 저를 골려먹을 기쁨에 들떠 히죽히죽 웃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덜덜 떠는 미도리야가 있었으니. 처음 몇 번은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눈에 잘 뵈지 않는 곳을 몇 대 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점점 옷 바깥으로 드러나는 곳에 검푸른 멍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 바닥에 질질 끌리는 옷을 몇 번 면박 주자 우물쭈물 소매를 걷어 올렸다. 여전히 가느다란 팔 뚝 위로 보랏빛 멍이 그득하다. 작게 비명소리가 들린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눈치를 살피곤 배시시 웃었다. 우는것만 못한 얼굴이어서 차마 미도리야를 볼 수 없었다.


줄곧 곁을 맴돌던, 혹은 미도리야가 스스로 떠나지 않던 바쿠고의 비호가 사라지자 시종들 아래로 진득히 흐르는 감정의 이물질이 온전히 미도리야를 향했다. 한뭉텅이가 걸리면 몸 어딘가가 작살이 났고 아물 즈음에 다시 한군데가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 나날이 얼룩져 가는 미도리야를 분명 지켜 보았음에도 바쿠고는 막지 않았다. 물론 제 성정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분풀이로 미도리야를 괴롭혔든, 괴롭히지 않았든 한 놈 골라잡아 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기는 했지만.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도 그것이 미도리야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눈이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빨랫감을 한 아름 둘러매고 복도를 통해 걸어가던 길이었다.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렸다. 찾이 않아도 되었다. 자랑스러운 것을 걸어 놓듯 미도리야는 엎어져 맞고 있다.


"바쿠고. 어디가?"


미도리야의 어깨에 발을 올린 시동 하나가 물었다.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해 바쿠고는 가만히 미도리야를 훑어 본다. 그리곤 이질적인 부분을 찾아 내었다. 기괴한 모양새로 어깨가 비틀려 있었다.


"알아 뭐하게"


바쿠고가 짐짓 심드렁한 듯 대답했다.


"안 바쁘면 좀 도와 달라고"


능글한 목소리에 몸을 웅크린 미도리야가 움찔거린다. 바쿠고는 흘러내릴 것 같은 빨랫더미를 고쳐 들었다.


"대가리에 든 거 없는 새끼들이. 내가 지금 한가해 보이냐?"

"아니, 뭐, 그럼 가던가"


대장격 사내아이는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말을 어눌하게 삼켰다. 바쿠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별 볼 일 없던 시동이다. 미도리야가 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바쿠고가 이를 악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던 미도리야가 고갤 든다. 바쿠고와 시선이 마주쳤다. 붉디 붉은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찾듯 한참을 정처없이 헤메인다. 이내 체념한 듯 아래로 내리깔렸다. 무수한 폭력이 장대비처럼 자그만 몸 위로 쏟아진다. 바쿠고는 묵묵히 그 광경을 보다가 두어걸음 걸어 그 곳을 지나쳤다.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걸어갔다.








7.

"그 새 질렸어?"

"뭐가"
"새로 들어왔던 앨 지극정성으로 돌보더만"

"내가 보모냐? 미쳤다고 돌봐?"
"한달도 전엔 잘만 챙겼으면서"

"알 바냐 그딴거"


미도리야가 잠깐 걸레 빤 구정물을 버리러 간 사이 옆에 잠자코 서있던 아이가 바쿠고에게 말을 걸어 왔다. 성격 모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꼭 들었던 놈이 한참 어리바리한 새 시동을 챙기는 것도 신기했는데, 얼마 안 있어 데면데면 본 채 만 채 구는 것도 신기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는 통에 퉁명스레 대답을 했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도리야가 바닥에 흩어진 물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비웃음 소리가 울린다. 헛손질은 빨라지고 물이 손틈새로 빠져 나간다.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런 말은 귀신같이 찾아듣냐. 이유 모를 화가 치밀었다.


"염병한다"


미도리야의 손이 멈추었다.


"씨팔. 없느니만 못한 게"


덜덜 떨리는 손을 밟고싶단 충동이 일었다. 비굴하다. 새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도 웃는 모습이 그랬다. 혹시나 화를 낼 까 어거지로 웃는게 뻔히 들여다뵈는 속내다. 금방이라도 쓴 물을 줄줄 흘려낼 것 같은 눈이 용케 엎지르지 않고 버텨낸다.


"병신"


옆구리에 멍이 들 정도로 찔러대던 아이가 시작이나 하듯이 욕설을 내뱉었다. 뒤이어 병신, 병신 하고 노랠 부르듯 목소리가 드높아 진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뒤돌았다. 뒷꽁지를 놓치지 않는 노랫소리가 비 오는 날 따라붙었던 미도리야의 목소리 만큼이나 지독했다.





가을비가 길게 내렸다. 하늘은 맑았다. 허리가 휜 초승달이 뚜렷이 보일 정도였지만 비는 멈추지 않았다. 여우비네. 누군가 중얼거렸던 소리를 들은 듯도 하다. 그 날은 유독 피곤했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온 몸에 손 하나 들어올릴 기운이 남지 않았음에도 잠은 오지 않아 눈을 말똥히 뜨고 천장의 무늬만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밝다. 딱히 거슬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더없이 깨끗했으니. 한참 그렇게 누워 있자니 바깥에서 인기척이 난다. 깨어있는 모습을 보이면 밥값 하라 끌려나갈 것이 뻔했으므로 바쿠고는 재빨리 자는 채를 했다.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기척을 가늠했다. 발을 옮기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인물은, 방을 조심 조심히 건너 제 옆에 살풋 주저앉았다.


"자?"


알 수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안에 있는 사람이 깰 까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조심이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미도리야가 망설이다 조심스레 바쿠고가 덮은 이불 위로 손을 올린다. 그것을 못내 견디지 못한 바쿠고가 휙 하니 요를 머리 끝까지 덮었다. 순식간에 손을 내쳐진 미도리야가 잠시 멍하니 바쿠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조용했다.

바쿠고가 이불 속에서 껌벅껌벅 눈을 깜박였다. 미도리야의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방 밖으로 내쫒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팔이 저려올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미도리야가 옆을 떠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캇짱"


결국 다시 말 문을 튼 것은 미도리야다.


"나 밉지?"


대꾸하지 않았다. 미도리야가 잠시 숨을 삼킨다.


"미우면, 아니, 아니, 미워해도 괜찮아. 나 정말 괜찮아"

"......"

"난 본래 남한테 도움이 못 되니까. 미움받는게 당연한 일인걸"

"......"

"미우니까 때려도 돼. 캇짱 우는거 싫어하잖아. 나 안 울어"

"......"


미도리야의 말이 점점 빨라진다.


"예전에는 많이 울었잖아. 근데 앞으론 절대 안 울게"

"...너,"

"캇짱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안 울거야"


절박하기까지 느껴지는 문장을 숨가삐 이어 나간다. 뼈대를 숨긴 뜻이 무색하게 말 끝은 서서히 무너진다.


"하지만, 그러니까, 부탁이니까, 없는 사람 취급만은 하지 말아"


애원에 가까운 마지막 말은 한 동안 둘 뿐이 없는 방 안을 맴돌았다. 말의 뒷 맛이 쓰다. 바쿠고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속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수를 셌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들려야만 할 것 같은 울음도, 다른 말도 전혀 밖으로 기어나오질 않았다. 수렁에 잠긴 듯 방 안을 채운 침묵이 끔찍이도 불편하다. 뒤집어 썼던 이불을 치웠다. 걷어내고 뒤를 돌아보니, 내리는 달빛에 선연히 비치는 것이 눈물을 줄줄 쏟아내는 미도리야였던 지라. 바쿠고는 꼼짝없이 말을 잃었다. 그마저도 혹여 바쿠고가 시끄럽다 성을 낼 까 소매를 꼭 입 안에 물고 울고있다. 눈물이 한 줄기 볼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고이고, 지나간 눈물자욱을 메우듯이 또 다른 한줄기가 턱에 매달렸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뚝 뚝 떨어진다. 바쿠고가 저를 보는것도 모르는지 미도리야가 마냥 서럽게 운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를 멍이 그득한 제 손으로 꾹 잡아 누른다. 작은 몸짓도 바쿠고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몰라 죽일 듯 잡아 누르는 모습이 처절하다.


바쿠고가 입을 열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른다. 입술 끝까지 맴돌았던 말에 물기가 가득한 것을 깨닫곤 다시 다물었다. 목이 메인다. 이윽고 미도리야가 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꿈에 나올까, 진창위로 뛰놀아도 저리 엉망은 아니겠다 싶을 정도로 처연하기 그지 없는 얼굴이다. 바깥으로 떨구는 비처럼 줄줄 끊임없이 쏟아내는 눈을 하고선 뻐끔 뻐끔 입을 연다. 그러나 알맞은 모양의 목소리는 내지 못한다. 아, 나 어, 따위의 말을 내뱉곤 제 풀에 놀라 다시 틀어막기를 반복한다. 결국 바쿠고가 말을 꺼냈다.


"넌, 밤 잠 없냐?"


대답치고는 더없이 초라했으나 미도리야는 대꾸를 듣고 목 놓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캇짱. 미안해. 다시는 죽는단 말 안 할게. 묻어달라는 말도 안 할게. 네가 싫어하는거 절대로 안 할래. 날 두고가지 마.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마. 내가 필요 없다고 하지 말아줘. 우느라 숨이 차 발작을 일으키듯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두가질 한꺼번에 하지 말란 말야. 넌 그런거 못하잖아"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면서도 제 뜻을 전하고 싶은지 필사적으로 미안하다, 잘못했다 따위의 말을 지껄여댄다. 내용을 들을 지언정 무슨 뜻인지 파악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밤이었다. 숨이 차 괴로워하는 미도리야의 손을 바쿠고가 잡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훌쩍이는 미도리야를 잠깐 내려다본다. 

망설이다 힘 있게 끌어 당겼다. 미도리야의 머리가 가슴에 부딛힌다. 안고선, 저도 당황했다. 버르적대는 등에 손을 올렸다. 한참은 더 작다. 미도리야가 움찔 한다. 그제야 이 등 위로도 상처와 멍이 그득할 것임을 깨닫는다. 바쿠고가 제 딴에는 조심한다고 천천히 미도리야의 등을 쓸어 내렸다. 씰룩거리던 등이 천천히 내려 앉는다.




앳된 뺨에 눈물 자욱이 그득하다. 짓무른 눈가를 만졌다. 따가운지 슬쩍 찌푸린다.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보았다. 붕어처럼 퉁퉁 부었음에도 변함없이 큰 눈처럼 커다란 초록 눈동자에 붉은 기미가 졌다. 이게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다 알아챘다. 아, 내 눈이구나. 미도리야가 동그렇게 눈을 뜨고 바쿠고의 눈을 요리조리 살핀다. 두 아이가 마주 누웠다. 바쿠고는 어색하게나마 미도리야에게 팔을 빌려 주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쪽 팔을 들어올려 느릿하게 미도리야의 등을 도담도담 두드려 준다. 그제서야 미도리야의 눈매가 살풋 접힌다. 어찌나 오랜만에 보는지. 미도리야의 몸에서는 분내가 났다. 유녀가 지나간 자리에선 항상 맡을 수 있는 향이다. 그리고 분내 외에도, 몇가지 체취가 섞였다. 상처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비린내, 그리고 비 오는 날의 축축한 습내. 미도리야는 물기가 가득하다. 눈에도, 몸에도. 모든 것에.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번진다. 어깨를 두드리던 바쿠고의 손이 미도리야의 볼로 옮겨갔다. 엄지로 주근깨를 문지른다.


"야"

"응. 캇짱"


하도 울어 목소리가 쉬었다.


"넌 나 없음 안돼?"


바쿠고가 나직히 묻는다.


"응. 없으면 안돼"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미도리야의 숨결이 목덜미 언저리에 느껴진다. 훤한 달빛이 바쿠고의 머리카락에 비춘다. 미도리야가 바쿠고 너머로 달을 보며 생각했다. 캇짱은 달빛이구나.


"캇짱이, 없으면 안돼 


확언하듯 다시 한 번 대답한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등을 감싸온다.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머리통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문지방 너머로 사라진 두 아이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부퉁켜 안고 한참을, 한참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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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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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AU

*체질 판정 이후 성년이 지나서야 가이드와 센티넬은 서로를 감지할 수 있게된다






 토도로키 쇼토는 센티넬이다. '센티넬'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주변에 큰 피해를 입히고 종국에는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희귀 질병으로 분류되는 체질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러한 체질을 알게 된 것은 평균적으로 14세에 실시하는 신체검사보다 2년 앞선 12살 때 였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 되는 엔데버가 토도로키의 목덜미를 끌고 병원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센티넬이던 가이드던 상관 없다. 그 어떤 것도 너를 끌어내리지는 못할 테니까.

 호언장담을 했음에도 본인의 아들이 희귀병에 걸렸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듯 하다. 센티넬 양성반응이 적힌 검진표를 들고 담담히 자신에게 걸어오는 아들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어렸던 토도로키는 아무도 없는 병원 로비에 홀로 앉아 TV에서 아이들을 위해 틀어놓는 아동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친구들, 오늘도 즐거웠나요? 오늘의 종이접기가 어렵다면 엄마와 같이, 여성MC의 발랄한 목소리를 빼고 들리는 것이라곤 미세한 기계소리가 전부인 주변이 마치 다른 세상인 것 같았다. 토도로키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버지가 흔히 말하는 '실패작'이 된다면 더 이상 괴로운 훈련을 하지 않아도 되고, 형제자매들과 어울려 놀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만남이 금지된 어머니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상상에 들떠 토도로키는 남몰래 웃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바라는 정상에 이르르기에 아들의 체질이 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평범한 개성을 가진 보통 사람보다 배를 넘는 체력과 신체 능력이 토도로키라는 이름을 톱으로 올려 놓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완전한 밸런스의 개성에 멋들어진 신체 능력이라니, 더말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 않은가. 단,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집으로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토도로키는 창문 밖으로 건물과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생각보다-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구나. 어쩌면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무 의미 없이 따라붙는 또 하나의 꼬리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유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조그만 입술을 꼭 깨무는 아들의 옆에서 엔데버가 찬란한 미래 계획을 늘어놓았다. 

 최고의 가이드를 붙여주마. 아니, 가이드가 따라붙으면 당연히 눈치채겠지. 다른 방법을 써야 겠군. 걱정마라 쇼토. 

 토도로키의 명성에는 흠 하나 나도록 놔두지 않겠다. 자신의 방에 돌아오기까지 토도로키를 둘러싼 주변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의 체질판정을 걱정하는 형제도, 어머니도 없었다. 집에서 가사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 또한 토도로키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정말로 변하는 것이 없구나. 12살 토도로키 쇼토의 센티넬 판정일은 서글픈 정적 속에 조용히 지나갔다.


 14살의 여름이 막 지나갈 무렵 토도로키는 처음으로 센티넬의 발작을 겪었다. 원인은 아마도 아버지와의 충돌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느낌을 다시 한번 떠올릴라 치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동반한다. 평소라면 그냥 흘려 듣고 혼자 분을 삭혔을 말을 그 날 따라 도저히 넘길 수 없었다. 말 한마디, 음절 하나, 숨소리 하나하나 모든 것이 곤두선 신경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시야 속으로 들어오는 풍경이 이질적이었다. 색을 받아들이는 시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해졌기 때문임을 알았다. 원색에 가깝게 변한 광경이 기괴히 구겨졌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숨을 들이킬 수는 있지만 내쉴 수는 없었다. 가슴이 터질듯이 부풀어 손톱을 세워 가슴팍을 긁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아 무릎을 꿇고 구역질을 했지만 먹은 것이 없어 위액과 헛구역질 밖에 뱉어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뚱이 안에 다른 것이 들어있는 것 같다. 도와 달라, 살려 달라, 자신도 모르게 애원을 했지만 스스로의 목소리마저 끔찍한 소음이 되어 돌아와 고막을 긁었다. 쇼토. 쇼토? 가족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마저 끔찍해 토도로키는 닥치라며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렀다. 상황이 미쳐 돌아가는 와중에도 생각나는 단 한사람은 그 옛적 이후로 한 번 얼굴을 본 적 없는 어머니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나좀 살려달라고,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피가나도록 머리통을 쥐어 뜯으며 신음을 흘리던 토도로키는 무엇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토도로키는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볼을 타고 뜨끈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이게 무엇인가 얼굴을 만져보니 손 한가득 피가 묻어나왔다. 혈관이 터진 눈에서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피를 목격한 이후는 기억에 없다. 건너 건너 전해 듣기로는 집을 반파 시켜 놓았다고 했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신체능력으로 인해 마땅히 말릴 사람 하나 없었다. 불이고 얼음이고 상관없이 난사해 거실과 이어진 형제의 방까지 박살을 내놓고 큰 부상을 입었다. 물론 토도로키가 입은 부상이다. 어느 곳은 동상, 어느 곳은 화상, 얼음보단 불로 인해 입은 상처의 비중이 더 컸고 심각했다. 병실에 들어온 형제가 무심코 '아버지가 막지 않았다면 다 죽었을 것'이라 흘린 말을 들었을 때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나에게 개성을 썼구나. 개성으로 나를 제압했구나. 비교적 평온한 기분이었다. 다만 아쉬움을 느낀 한 가지는 정신이 나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은 아버지를 넘어 설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날 이후 엔데버는 비밀리에 가이드를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했다. 토도로키의 비밀을 지켜줄 수 있으면서도 첫 각성을 끝내고 불안정한 토도로키의 곁에 항상, 24시간 자신의 개인시간 없이 붙어 있을 수 있는, 본인보다 타인이 우선인 사람을. 그러나 쉽게 구할 수 있을리가. 가이드를 찾기란 하늘을 별따기였고 그 엔데버의 재력, 사회적 능력을 총 동원해도 가이드 몇 명 구하기 힘들었다. 차라리 뒷세계에서 납치라도 해 볼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명색이 히어로인지라 그것도 기각. 결국 그가 자신의 아들이자 최고에 이르르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인 토도로키에게 내린 처방은 단순하게도 하얀 알약 몇개였다.

 "현재 임상실험 단계에 있는 약이다."

 "...."

 먹어라. 엔데버가 자신의 아들에게 건넨 약은 센티넬의 발작, 또는 폭주를 막기 위해 국가에서 제작중인 진정제 프로토타입이었다. 인간에게 해는 없을 것이라 했어. 하얀 알약 몇개를 손에서 굴리던 토도로키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엔데버가 어서 먹지 무엇하느냐는 얼굴로 눈짓했다. 토도로키는 약과 함께 그에게 걸었던 마지막 기대를 씹어 삼켰다.

 나름대로 약이 효과는 있었다.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 지지도, 이유 없이 치고 올라오는 분노나 슬픔도 싸그리 사라졌다. 그러나 임상실험 단계의 프로토타입이니 만큼 부작용 또한 빼 놓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피험자를 안정시킨다는 목적으로 첨가된 진정제 성분이 그를 무기력 하게 만들었으며 극소량 포함된 수면제 성분은 약을 투입한 직후 몽롱함을 느끼게 했다. 더 큰 문제는 과효능이었다. 약은 센티넬이 가진 문제의 원인 되는 감정을 억제 했으나 단순한 수준을 넘어 일상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감정들까지 느끼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토도로키의 세상은 점점 무미건조해지고 있었지만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감정의 원천은 기대였고 세상은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주지 못했으므로.



*



"......일단 수업에 늦었으니까, 수업부터 가자."

미도리야가 힘들게 침묵을 깼다.

"미도리야."

토도로키가 애처로이 미도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미도리야는 그 목소리에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서로가 다른 것을 얘기 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토도로키 군의 비밀을 본 것은 사과할게. 하지만 토도로키군이 어째서 내가 가이드인 걸 알고있는지 궁금해."

"......."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들 집에 돌아가면 그 때 다시 이야기 하자."

토도로키가 어깨를 움츠리고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야는 흐트러진 물건을 마저 정리했다. 문 앞에 선 그를 지나쳐 교실을 나와, 자신을 따라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토도로키를 돌아 보았다. 어깨가 쓸쓸히 쳐져 있었다.




*



아침부터 쓸데없이 날씨가 좋았다. 토도로키는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풀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적당히 색이 나뉜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먼저 교실을 나간 미도리야의 뒷 모습을 뒤쫒지 못하고 텅 빈 교실 안에 남겨져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자의로 수업에 빠져본 적은 없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한 걸음 자신에게서 떨어지던 미도리야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은 명백한 두려움과 분노였다. 자신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었던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토도로키는 퍽 소리가 나도록 옆에 있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자니 괴로워진 탓이다. 눈을 감았다.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그 날로 되돌아가보자. 처음으로 너와 마주 선 날이다. 아니지, 조금만 더 뒤로. 처음으로 너와 마주 섰던 시간은 널 불러 세워 내게 내가 존경했던 사람의 사생아냐 물었던 순간이다. 당시엔 머리속에 있던 의문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은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게 굉장히 무례한 일이었고 너에게 미안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의 일은 사과하고 싶다. 

 너는 내게 있어 수단이었고 넘어서야 할 장애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을 텐데. 그래야 했는데. 그 날 네가 내 앞에서 보여준 행동을 나는 아마 평생의 시간을 다 보낸다고 한 들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자신을 찢어놓을 듯이 돌진하는 얼음과 함께 손가락을 부수었다. 멀리서도 검붉게 부어오르는 손가락이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아픔에 눈물을 떨구는 것을 보았다. 이를 악무는 네 입이 보였다. 그럼에도, 너는 그 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이깟 얼음, 이깟 분노 몇번이고 부수어 주겠다며, 부러진 손가락을 쳐들고 고통에 버물린 미소를 지었다. 그런 네 모습을 보고 나는 말을 잃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질문이 혀 끝까지 넘어 왔지만 결코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었다. 대신 몇번이고 갈무리 된 분노를 끼얹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조금은 네게 공감했을지도 모른다. 너처럼 나는 위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존재했기 때문에. 하지만 멍청하지, 아버지의 개성 없이 뛰어넘겠다며 제한한 반쪽이 나를 잡아세울 줄이야. 그 날 얻어맞은 배는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아픔이었다. 아마 당시 네 손이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있던 탓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주먹을 얻어맞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과용한 개성으로 인해 반신이 얼얼했고 네 손이 부서지던 광경과 어린 시절 어머니와 보았던 TV속의 한 장면이 섞여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나는 내 개성도 너도 별 것 아니라 생각했다. 그 날 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네 외침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내가 지금까지 끌어왔던 가치가, 붙잡았던 삶의 목표가 사실은 썩은 동앗줄이었음을 일갈한 너의 외침은 잊고있던 내 틈을 온전히 메웠다. 참 이상하지. 분명히 네 손은 괴사 직전으로 보였는데. 분명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아픔에 울고싶었을 텐데, 너는 얼굴을 찡그린 채 웃고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몸의 좌반신에서 불길이 끓고 있었다. 과용한 반쪽에 앉은 서리를 불꽃이 앗아간다. 너는 일그러진 입매를 잘도 끌어올렸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 나는 고통만이 가득해야했을 네 얼굴에서 기쁨을 알아챘다. 

 너는 누군가를 구하고싶다 했지.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수렁속에 잠긴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 상처로 뒤틀린 손을 잡았다. 네 손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나다. 쓰러질 것 같은 너를 보고서도 멈추지 않은 내 판단이 불러온 결과다. 나는 이후 네 손을 볼 때마다 후회할 것이다. 동시에 해방감을 느낄 것이다. 너는 나를 구하고 병실 안에서 홀로 슬퍼했다고 했다. 남에게 전해들은 말이다. 자신의 바람보다 남의 구원을 우선시한 네가 다정하다고 느꼈고 네 꿈의 결말을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 더 나중에 생각하게 된다. 


 아, 사랑이었구나. 그 날 나는 너에게 반했었구나.



 인생에 있어서 예기치 못한 일은 종종 찾아온다. 나에겐 너를 사랑하게 된 일이 그랬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여겼지. 모든게 바뀐 그 날 이후로 나는 아무말 없이 네 옆에 서있는 일이 많아졌다. 그 전까진 좀 처럼 드물었던 일이기에 너는 처음 당황하는 듯 싶었으나, 이내 스스럼없이 옆자리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내 주었다. 네 곁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도 너의 다정함에 반해 다가온 사람들이겠지. 내가 그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그 다정함에 반한 정도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왜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 깨닫지 못했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변명이나마 지나온 세월 간 묵혀둔 응어리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형제 자매와의 관계,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한 번 외면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해야 했다. 그래. 이것도 결국 다 네 덕택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때도 없이 네 생각을 했느냐면 그것 또한 아니다. 우리는 엄연한 히어로 지망생이었고 하루가 멀다하게 몸 성히 돌아오기 힘든 수업으로 내몰렸다. 그 때마다 네 생각에 빠져들었다면 나는 내 몸 건사하지 못하고 몇 번을 죽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해야지. 일상의 대부분은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지경으로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불을 전투에 사용하지 않은 시간이 길어 이 반신의 힘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러나 문득문득 네 생각이 나는 것 만큼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나날히 성장하는 네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아서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히어로 살인자 사건을 기억 하는가? 한참 아버지를 따라 순찰을 하던 중 네 연락을 받고 향한 곳에서 본 광경은 참혹했다. 왜 조금 더 빨리 네 메세지를 받지 못했을까.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네게 미안했는데, 그럼에도 너는 웃었다. 알아채고 달려와주어 고맙다고 거듭 내게 인사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휘말리게 해 미안하다 머리를 숙였다. 

 아니야. 네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과를 해야할 것은 나였는데.

 생각이 말로 정리 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네 모습을 몰아내려 한들 나는 순간순간 너의 모든 것에 빠져들었다. 불가항력이다.



 조금 시간을 앞서 가보자. 살인자와 대치 한 날 이후 나는 우연히, 정말 어쩌다 보니 너와 개인적인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도서실에 네가 자주 출입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가 책을 빌려주었을 때의 네 얼굴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습다. 히어로 지망생 치고 유순하다 생각되었던 눈매가 아무 거리낌 없이 곱게 휘어지던 모양새란. 푸르른 녹음을 머금은 두 눈이 쏟아질 듯 빛났다. 마치 그 날 같았다. 내가 너에게 반했던, 그 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어찌나 가슴이 설레던지. 주근깨가 자리한 뺨을 발그레 붉히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네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읽고 싶었던 책을 양보한 그 날 네 문자를 받은 나는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말 기뻤다. 글자에서도 소심한 네 말투가 떠오르는 것 같아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주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가다 툭툭 내뱉는 말이 상대방을 상처입힌다는 평가가 왜 그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네 메세지를 보고 나서도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고 반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단어를 고르고 골라 답을 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를 조금씩 이어나가며 나는 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순찰 겸 동네를 한 바퀴 돈다는 것, 아침으로는 빵보단 밥 종류를 더 선호한다는 것, 붉은 색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붉은 운동화는 익숙해서 좋아한다는 것(여기서 그는 나의 머리카락 색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며 장문의 메세지를 보냈다.), 사람들이 붐벼오는 거리의 순간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는 것, 처음으로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를 사귄 것이 정말로 기쁘다는 것 까지.

 그런데 나는 너무 내 얘기만 하는 것 같아. 괜찮아?

 조심스럽게 보낸 질문에 웃음이 나왔다.

 상관없어. 네 얘기를 듣는 것 만으로 충분히 즐거워.

 답을 보내고 혹여 이상히 생각하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너와 나누는 대화는 내 작은 낙원이었다.



 이건 아마 죽을 때 까지 묻어갈 비밀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될. 미약한 열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온 날이었다. 그 전날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너는 피곤해 했다. 점심 시간 나는 네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서 쓴 약을 어거지로 삼켰다. 돌아온 교실에는 곤히 잠든 네가 있었다. 순간의 충동이었다. 넘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단지 바람에 실려온 나뭇잎을 떼내어 줄 생각이었다. 녹빛이 돌았던 네 머리카락에 마른 나뭇잎이 붙어있는 광경은 우스우면서도 썩 잘 어울렸다. 아쉬움을 삼키며 네 머리카락에 손을 대는 순간 네가 뒤척였고 책상에 눌려 발갛게 물든 볼이 드러났다. 아이의 분내도 여자아이들에게서 풍기는 달큰한 향도 나지 않았다. 그저 네가 자주 쓰는 브랜드의 샴푸 향기가 났다. 그럼에도 입술에 닿는 네 살결의 감촉은 놀랍도록 부드럽고 달아 나는 순수하게 놀랐다. 찰나의 접촉이 끝나고 나는 서서히 숙였던 허리를 폈다. 네가 알게 된다면 분명히 혐오스러워 할 테지. 다시는 나를 가까이 두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새어나오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미도리야. 좋아해.

 입이 바르르 떨리고 자신도 모르게 꽉 쥔 손에는 땀이 고였다. 볼품없었던 고백을 부디 네가 듣지 못했길 빈다. 



 이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엔 센티넬과 가이드가 존재하고, 내가 전자에 속해있는 이상은 언젠가 반드시 꺼내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 스스로 센티넬인 것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야 철 들 당시부터 집안에서 준비해 준 약을 섭취해 왔으니 센티넬이라는 체질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던 탓일 것이다. 나는 삶의 질을 따지지도, 불편함을 느끼지도 못했다. 불만을 토로할 위치가 되지도 않았다. 

 여느 날과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관해 둔 약 봉지를 찾아 부엌에 들어 갔을 때 아버지가 내게 말을 건냈다.

 학교 생활은 잘 하고 있겠지.

 ...응.

 잘 지내야지. 힘들게 가이드와 한 반을 만들어 놨는데.

 뭐?

 몰랐나. 요새 네가 어울린다는 올마이트의 꼬마.

 머리가 멍해졌다. 망치로 있는 힘 껏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이드와 센티넬이 같은 학교에 입학한 경우는 천운이야. 인맥을 유지해라 쇼토.

 나는 정신이 나간 것 처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잊어버리려 해도 아버지의 말이 귓가를 끊임없이 맴돌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네가 가이드라는 것은 충분히 놀라웠으나 슬퍼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대로라면 기뻐했을 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너와의 공통점이 간절했고 네가 가이드라는 것은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공통적인 요소였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슬펐다. 관계의 유지 그 이전에 이제까지 이어왔던 모든 것이 전부 센티넬-가이드의 관계로 설명된다는 것이 싫었다. 원망스러웠다. 내가 느낀 모든 기쁨, 설레임, 만족, 다정함, 내 손 안에 들어왔던 반짝이는 것들이 신기루처럼 잡으려 하는 순간 헛손질만을 남긴 채 느낌이라 나는 바닥을 긁으며 울음을 참았다. 그럼에도 확신 할 수 있었다. 이 감정만은 진짜다. 약의 효과가 무색하도록 나를 뒤흔들어 놓은 다정함, 기쁨, 설레임, 안타까움, 슬픔, 씁쓸함만은 모두 진짜가 틀림없다고.

 나는 봉지에 들은 약을 모두 손에 담아 단숨에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약은 썼다. 고통에 가깝게 쓴 그 맛에 다짐했다. 절대로 너를 상처입히지 않기로, 나로 인해 네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감정이 너에게 닿기도 전에 뻗는 가지를 자르고 감히 네 영역에 침범 하지 못하도록 비틀어 종국에는 서서히 말라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종종 너에게로 다가가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놀라기도 하겠지. 하지만 반드시 포기해야 할 날이 온다. 나 스스로 상처입는 것은 상관 없었다. 이미 충분히 경험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네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몽롱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나는 몇번이고, 몇번이고 소원을 되짚었다.




*




"데쿠 군.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어두워."

개성 발동 탓에 공을 세개째 저 하늘 너머로 날려버린 우라라카가 다가와 물었다.

"아니, 그냥.."
"또 빌런에 관한 일이야?"

우라라카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정말? 그럼 다행이지만. 데쿠군은 자주 그런일에 엮이더라. 신기해."

아아. 내 이미지는 어디로. 미도리야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말해줘. 저기, 친구니까!"

네번째로 굴러오는 공을 집으며 우라라카가 말했다. 미도리야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그녀라면 털어놓아도 괜찮겠지. 

"저기 우라라카 양."
"응!"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A에게는 숨기고 있던 비밀이 있었어. 근데 사실 B는 그걸 알고 있었고, 숨기고 있었어. 어떻게 생각해?"
"그러니까 상대방의 비밀을 알고있었는데 그걸 다시 비밀로 한거야?"
"응."
"나쁜사람이네!"
"그런데 B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어쩌다 보니 A도 알게되고..."
"그건 뭐여?! 쌍으로 나쁜놈들 아닌겨?"

우라라카가 포효했다. 커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급우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미도리야와 우라라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미도리야는 당황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어 달라 신호했다.

"그렇지? 역시 나쁜놈이지...? A...?"

쌍방으로 못된 놈들이라는 대답에 자조적으로 머리를 숙였다.

"A랑 B는 무슨 사이였는데? 철천지 원수? 복수만을 꿈꾸는 사이?"
"아니, 그건 아니고 친구였어."
"그럼 비밀을 알게 되어서 친구가 아니게 되어버리는거야?"
"그걸 잘 모르겠어."
"흐음."

우라라카가 네번째 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앗 그러면 또 하늘 위로 날라갈 텐데. 미도리야가 움찔했으나 그녀는 생각에 잠긴 탓에 그것까진 생각 못한 듯 했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비밀을 알았다고 해서 친구가 아니게 되어버리는건 슬프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
"응. 나도 어렸을 적에 친구랑 놀다가 자주 싸우기도 하고, 별 것 아닌 일을 선생님한테 일렀다며 다시는 안 놀거라고 말한 적도 있었거든. 하지만 곧 화해했어."

우라라카가 베시시 웃었다.

"당연히 그때의 일과 지금 데쿠군의 고민은 무게가 다를거야."
"A는 내가 아니.."
"그냥 내 이야길 한 것 뿐이야. 데쿠군이 고민하는 것 만큼 B군도 많이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아. 그럴거야."

그와 문자를 했을 때, 미도리야는 토도로키가 생각보다 섬세한 구석이 있음을 알았다. 타인과 어울리는 것이 익숙치 않아 무뚝뚝하고 직설적인 편이었지만 미도리야가 무심코 흘렸던 말도 기억하고 배려해 주는 모습은 분명 섬세함을 근원으로 한 다정함이었다. 그런 토도로키가 한걸음 물러섰던 미도리야를 보고서 상처입지 않을리가 없다. 틀림없이 고민하겠지. 그리고 자책할 것이다. 체육제 때 보았던 토도로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산처럼 솟은 얼음을 불꽃으로 녹여가던 그 모습이 슬퍼보인다 생각했다. 나로 인해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싶지 않다. 웃어주는 얼굴이 참 멋있다 생각했는데.

"말 해야 겠어."
"응? B군한테?"
"아니! 나는 A가 아닌걸!"
"나는 데쿠군이 A라 말한 적 없는데?"
"....."
"아! 공이 또 날아간다! 저기, 얘들아, 그것좀 잡아줘!!"

은근히 미도리야를 놀리던 우라라카가 분명 손 안에 들어있어야 할 공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급우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까. 미도리야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또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



 빈 교실의 뒷문을 열고 미도리야가 들어왔다. 교실의 끝 뒤편에는 토도로키가 멍하니 서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토도로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사그러지는 빛을 받아 토도로키의 색 다른 머리카락이 붉게 빛났다. 토도로키는 미도리야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찌를듯이 다가오는 시선을 마주하려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미도리야가 침을 삼켰다.

 "토도로키 군."

 "응, 미도리야."

 토도로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덕분에 미도리야는 말을 꺼내기 전 조금 안심했다. 그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문드러진 것도 모르고.

 "나, 생각을 해 봤어. 토도로키군이 센티넬인 것에 대해서."

 "응."

 "뉴스에서는 센티넬이 무섭다고 이야기 하잖아. 거의 빌런과 비슷하다는 듯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듯이."

 예상했던 말이라 토도로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한번도 센티넬을 본 적이 없지만 틀림없이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내가 가이드라서 그럴지도 몰라."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제대로 마주하고 자신의 체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도리야는 '가이드'라는 단어를 말하고 잠깐 말을 쉬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하고싶은 말이다. 자신을 한점 흐트러짐 없이 곧게 바라보는 토도로키의 시선을 쉽사리 마주할 수 없어 바닥으로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보였다.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미도리야는 분명히 보았다. 그는 일렁이고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발치를 보았다.

"하지만 토도로키군은 전혀 무섭지 않아."

미도리야가 숨을 들이키고 단숨에 말했다.
 
"그건 네가 센티넬인걸 알기 전에도, 센티넬 인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난,"

 괜찮다고 생각해. 네가 그 무엇이든. 말을 끝내며 미도리야가 쑥쓰럽게 웃었다. 대화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토도로키가 미도리야의 눈을 피했다. 그가 방금 한 말을 곰곰히 되짚어보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토도로키는 눈을 크게 뜨고 미도리야를 바라 보았다. 방금 네가 무슨말을 한 것인지 알고는 있냐는 눈치였다. 단정히 다물렸던 입이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버끔거리다 서서히 모양새가 무너졌다. 어린아이 같아. 미도리야는 토도로키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길을 잃고 미아가 된 아이를 데려다 주었을 때 지금과 꼭 같은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토도로키는 한참을 방황하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것인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미도리야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센티넬이었다면 토도로키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개성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어머니 모습을 기억했다. 미안하다며 펑펑 우셨지. 무개성으로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어머니는 자식이 무개성이길 바랬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미도리야는 토도로키를 혐오하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대신 공감했으며 걱정했다. 센티넬인 것을 숨기면 어떠한가, 자신도 가이드인 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특별함을 가지고 싶어했던게 아니다. 태어나 보니 제 손 안에 들어있었을 뿐. 때문에 미도리야는 토도로키를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센티넬-가이드의 관계로 볼 때에는. 어떻게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알았는지도 궁금했지만 조금 생각을 해 보면 쉽게 답이 나왔다. 토도로키 가의 위상과 엔데버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가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개인 정보가 알려진 것은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잘난 친구를 둔 업보려니 했다.

 "울지마. 토도로키군."

 ".....안울어."

 "하지만 얼굴이 빨개졌는걸."

 "노을 빛 때문이야."

 토도로키는 어느새 자신의 앞 까지 다가온 미도리야를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전의 일은 확실히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웠으나 동시에 이제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눌러 죽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평온함을 가장한 채 미도리야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어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그 입으로 나를 베고 찢어 다시는 헛된 희망 품지 않도록 해 달라고. 그러나 미도리야 네 다정함은 다른 방식으로 내게 비수를 꽂는다.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너를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토도로키, 그래도 혹시, 나는 가이드고 너는 센티넬이니까, 음, 필요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만약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니 역시 주제넘은 말일까...?"

 횡설수설 하고싶은 말의 반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빙 돌아 갈피를 잡지 못했음에도 나는 거짓말처럼 말의 핵심을 찾을 수 있었다.

 "....난 괜찮아."

 "어, 으응. 역시 그렇지?"

 미도리야가 무안하게 웃었다. 꼼지락거리는 그의 손이 보였다. 일그러지고 굳어서 지나가는 말로도 예쁘다 말 할 수 없는 손이다. 그럼에도,

 "손이면 괜찮아."

 "응?! 아."

 나는 그 손을 놓을 수 없다. 내게 낙원이자 구원이 되어준 네 손을 이제 더 이상은 뿌리칠 수 없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 미도리야는 부끄러운 듯 눈을 깜박이며 내 손을 마주잡았다. 그와 내가 나누어가진 감정은 명확하고, 또 당연한 듯 다르다. 웃음이 나올만치 슬프고, 울음이 터질 듯 기뻤다. 














同床異夢 동상이몽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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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쓰고싶었던 부분은 토도로키가 사랑을 한 부분. 토도데쿠는 사랑을 했어.

센티넬버스 세계관을 사용했지만 별거없이 두 사람의 공감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쉽다.

손잡기-포옹-키스 삼부작으로 계획했던 글인데... 힘이....빠진다.... 많다 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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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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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넬버스AU

*체질 판정 이후 성년이 지나서야 가이드와 센티넬은 서로를 감지할 수 있게된다





Q 가이드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어, 글쎄요. 역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센티넬의 감정을 조절해 줄 수 있는 억제력 같은게 아닐까요? 책에는 그렇게 나와 있던데.

Q 가이드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는?

네? 어어.. 그렇게 눈에 띈다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냥 일반인에 가깝지 않은가? 싶을때도 많고.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 아야. 아파 엄마!

Q 마지막으로 센티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센티넬은 주변에서 본 적 없는데, 음, TV에서 나오는 센티넬이라면 조금 무서울 것 같아요. 뉴스에선 대부분의 센티넬이 사고나 범죄를 일으킬 확률이 높다고 말했으니까. 게다가 관련 기사도 많이 나오구요.

Q 잠깐, '센티넬은'이라면 가이드는 주변에서 본 적이 있다는 말씀이신지?

네? ...아니, 저 지금 좀 바쁜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Q 바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저기. 저기요!

죄송합니다!!



"이즈쿠.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말 했잖니!"

미도리야는 침통하게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쾅 소리가 나도록 식탁에 얼굴을 박은 미도리야를 흘끗 돌아본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을 질책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기다렸던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난 미도리야와 모자지간이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대학생 취재팀이라는 사람들에게 붙잡혀 잠시 인터뷰를 했고, 그녀의 아들이 허둥거리다 발설해서는 안되는 비밀을 까닥 입 밖으로 내뱉을 뻔한 것이다. 사실 미도리야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가이드를 주변에서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없는 밥상을 뒤집어 엎고 옆에서 잠시 말을 멈춘 아들을 한 대 쥐어박은 후 (좀처럼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질질 끌어왔으면 싶었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냉수를 한사발 들이키는 어머니의 뒤로 미도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부루퉁했다.


'가이드'. 미도리야 이즈쿠는 가이드였다. 현 세상은 태어나 1차적으로 개성이라는 체질을 선사받고 부가적으로 '센티넬','가이드'라는 체질이 발현된다. 본인이 센티넬인지, 가이드인지, 아니면 보통 인간인지는 14살을 전후로 병원에서 받는 건강검진에서 알 수 있었다. 누구나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개성과는 다르게 센티넬과 가이드는 희박한 확률로 나타났다. 워낙 희소한 나머지 세간에서 보는 시선은 거의 희귀병 취급이었다. 센티넬은 개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또다시 강력한 신체능력을 얻는다. 처음 그 사실이 밝혀졌을 때에는 진화한 인류가 아니느냐, 새로운 격동기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으로 시끄러웠지만 곧 얻는 것 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사실마저 밝혀지면서 정말로 희귀병 취급이 되어버렸다. 

센티넬은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한번 분노나 슬픔, 기쁨과 같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일정 상한선을 넘기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주변에 피해를 입히고 종국에는 온 몸의 혈관이 터지고 뇌가 녹아내려 사망한다. 그들이 세상에 등장한 이후 벌어진 각종 문제 탓에 센티넬에 대한 인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가이드. 가이드는 센티넬의 감정조절을 도와줄 수 있는 역할이었다. 곁에 있거나 간단한 신체 접촉으로 활활 타오르는 센티넬의 감정에 물을 부어줄 수 있는 것이 가이드다. 희귀한 센티넬 이상으로 가이드는 정말 드물었고, 덕분에 센티넬의 표적이 되는 일이 왕왕 일어났다. 미도리야의 어머니는 바로 그 점을 걱정했다. 그러나 아들이 해코지를 당하진 않을까 한걱정을 하는 어머니와는 달리 미도리야는 가이드인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인식이 좋지 않은 전자와는 별개로 가이드는 일반인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으므로 가이드라는 체질은 미도리야에겐 일반인이 RH- 혈액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정도와 비슷한 문제거리였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엄마."

"엄마는 항상 걱정이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주변에 센티넬도 없는걸."

그러나 본인의 생각 이전에 걱정이 많은 어머니를 달래드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미도리야는 부딪혀 얼얼한 코를 문지르고 의자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웬만해선 네 체질을 남한테 얘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응. 그럴게."

빙그레 웃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마주 웃어 주었다. 


*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언제나처럼 하루의 일과 중 하나인 히어로들의 활약상을 정리하기 위해 채널을 돌리는 도중 미도리야는 관심을 끄는 기사의 자막을 보았다. 새로 가이드 등록 법안을 제시, 잇따른 반발이 이어져- 잠시 리모컨을 누르던 손가락을 떼었다. 무미건조하게 소식을 전하는 앵커의 말이 들려왔다.

국가에서 주도해 센티넬과 가이드를 매칭시키자는 내용의 법안이 제시되어 화제에 올랐습니다. 본 법안은 차별받는 센티넬의 인식을 상향 시키고 가이드라는 재원을 유용히,

완전히 물건 취급 하네. 남 일인 듯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미도리야가 채널을 바꾸어버렸다. 뉴스보단 일단 오늘의 히어로 활약상. 분명히 놓친게 있을 테니까. 미도리야에겐 그것이 더 중요했다.


*


"이즈쿠, 오늘도 조심하고, 다쳐오지 말고!"

"알겠어. 조심 한다니깐!"

"말로만 조심한다고 하지 말고! 너는 바닥에 돌멩이가 몇개 있는지도 잘 봐야 해. 안 다쳐서 오는 날이 생긴다면 엄만 정말 기쁠거야."

"다녀올게!"

"빼먹은건 없는지 다시 살펴봐!!"

"엄청 늦었단 말예요. 오늘 주번이야!"

현관 밖까지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배웅을 나오며 끊임없이 조심하라고 외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미도리야는 생각보다는 꽤 늦어진 등교길을 나섰다. 정말 어쩔때면 걱정도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효막심한 생각이지만, 어머니의 애정어린 등쌀에 한숨을 폭 내쉬고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날이 맑았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기 전의 하늘은 물빛을 머금은 듯 청명했고 오후가 되면 조금씩 더워지기는 했으나 이른 아침 등굣길의 온도는 알맞게 서늘했다. 수백번을 지나가 새로울 것이 없는 거리가 등교하는 학생들로 서서히 부산스러워지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새빨간 운동화를 신고 걷는 걸음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올마이트가 자주 나오는 tv프로그램의 오프닝 곡이었다. 어제의 작은 소동이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괜찮다고 되뇌었지만 조금은 가라앉았을지도 모르는 마음이 익숙한 선율을 타고 몽실몽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도리야 이즈쿠가 살아온 지난 십 몇년은 지극히 평범했다. 아니 조금은 좋지 않은 의미로 특별했을지도 모른다. 올마이트와의 극적인 만남을 떠올리며 미도리야가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개성이 없는 것만 빼면, 무시당했던 것, 괴롭힘 당하고 얻어맞았던 것만 빼면, 친구도 있고 부모님고 계시고, 큰 사건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평탄히 보내지 않았는가. 물론 웅영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그 전의 시간들이 잔잔한 호숫위를 부유했던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거친 풍랑에 휩쓸렸지만 그것도 모두 제가 받은 축복이려니 생각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니까. 받은 개성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개성의 틈바구니에 끼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풍족하다 못해 넘쳐나며, 스타트 지점에 설 수 있는 권리를 받아 타인을 따라잡아 나가기에 여념이 없는 삶이라 가이드라는 체질이 자신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들로 미루어보아 그리 대수롭지 않을 듯도 하고.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안에서 올마이트와 히어로라는 꿈이 차지하는 비중보다는 작을 테니.

지잉-

성찰에 가까운 생각에 잠겨있던 미도리야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소리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주변에 있던 몇몇이 굉장히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피하다. 얼굴에 열이 올라 미도리야는 걸음을 빨리 하며 주섬주섬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침에 연락이 올 사람이 있던가? 의아한 표정으로 발신자 표시를 본 미도리야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도리야. 화단에 꽃이 피었어.

발신자는 최근 부쩍 가까워진 토도로키 군이다. 히어로 살인자 사건 이전에 연락처를 주고받긴 했지만 연락을 하기에는 아직 어색한 사이라 느껴져 전화번호부에서 잠을 자고있던 번호였다. 그러나 얼마 전 도서실에 히어로 관련 신간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가 토도로키를 만났고, 한 권 남았던 신간을 그가 먼저 양보해 준 이후로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연락이 트이게 되었다. 지금은 사소하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간단한 안부 문자도 주고받을 수 있다. 그와 나누는 대화는 생각보다 굉장히 즐거웠다. 친구랑 연락을 주고받는 건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거구나.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문자를 확인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히어로 과에 입학을 하고 나서도 드물었으니 함께 책을 읽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며 잡담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도로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때때로는 마악 잠이 들기 직전 주고받은 문자가 새벽까지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어질 때도 있었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가슴위에 올려놓은 채 답장을 기다리거나 전에 왔던 문자들을 죽 읽고 있으면 어김없이 진동이 울렸고 그에게서 온 답장을 찬찬히 읽고 다시 단어를 골라골라 답장을 보내길 반복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걱정이 조금씩 즐거움을 앞서기 시작하면 언제나 토도로키 쪽에서 먼저 오랜 시간 미도리야를 붙잡아 두어서 미안하다 사과를 했고, 미도리야는 그렇지 않다 황급히 답을 했다. 서로가 사과를 나눈 뒤는 잘 자라는 인사였다. . 토도로키군도 잘 자. 내일 보자. 답을 한 뒤 눈을 감아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것일까 퍼뜩 불길한 예감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용기를 내자, 해낼 수 있어 따위의 자신을 응원하는 말을 되새기다 잠의 수마에 빠져들며 잊어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이드나 센티넬이니 하는 골치아픈 문제는 문자 하나로 머릿속에서 저 멀리 떠나간지 오래였다.

-그래? 지금 학교 가는 길이니까 곧 볼 수 있겠다.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닫으려 했으나,

-기다릴게.

빠르게 온 답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닫았다. 토도로키 군 생각보다 답장이 빠르니까. 교문에 들어서는 길에 그가 말한 화단이 어디인가 둘러보자 저만치 구석에 정말로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었다. 이걸 말해주고 싶었을까. 미도리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


미도리야 군. 오늘 아침에 센티넬 뉴스 봤어?”

보송해진 기분으로 교실에 들어왔을 때 난데없이 미도리야의 안면을 강타한 것은 기억 너머로 날려버릴 뻔 했던 센티넬 사건에 대한 질문이라 미도리야는 웃는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또 사고쳤더라. 어디냐, B시에서 난동부렸다며.”

, 출근 시간대 아니야?”

히어로 몇 명 출동했던데. 센티넬을 몇 명이서 배겨낼 수 있으려나.”

지로가 귀에서부터 늘어진 이어폰 잭을 손가락 끝으로 꼬면서 말했다.

요즘 부쩍 느는군.”

빌런도 힘들어 죽겠는데.”

토코야미가 대화에 끼어들었고 뒤이어 키리시마가 우는 소리를 했다.

국가에서 가이드랑 센티넬을 법적으로 매칭시키자는 이야기도 나왔더군요.”

야오요로즈까지 대화에 등판했다. , 이런 이야기는 조금 꺼려지는데. 히어로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에 끼고싶어 안달복달 못했던 미도리야가 교실 한가운데 모여 열을 내는 친구들을 슬금슬금 피해 교실 뒤편에 위치하는 본인 자리로 향했다. 가방을 올려놓고 보니 등교하면 언제나 먼저 인사를 건네 주던 토도로키가 보이지 않았다. 교실을 두리번 거리며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미도리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이드는 무슨 죄야. 현대판 노예같잖아.”

그럼 히어로는 노예 아니냐. 야근에 3D업종으로 분류되는데다 목숨은 담보고, 욕도 얻어먹고.”

위험한 만큼 벌잖아.”

유명해지고.”

“TV에도 나오고.”

참으로 불순한 목적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지닌 힘에 책임을 지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히어로를 하는 것이야!”

한마디씩 던지는 급우들의 흑심어린 발언을 듣다못한 이이다가 열렬히 외쳤다.

“TV에 나오고 돈도 많다면 여자들에게의 인기는 따놓은 당상이겠지...”

이이다의 외침이 무색하게 미네타가 음흉한 얼굴로 치고 들어왔다. 이이다는 짜게 식은 얼굴로 미네타를 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히어로 지망인게 아니냐.”

이런 자본주의의 돼지들...!”

낄낄 웃는 카미나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반의 누군가가 절규했고 곧이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들 제각각 한마디씩 던지느라 교실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미도리야는 가방에서 천천히 교과서를 꺼내 쌓아놓고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수신메세지 0. 기다린다고 했는데 어디를 간 걸까. 수업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이드와 센티넬에 이어서 히어로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로 심도있고 욕망에 거리낌 없는 대화가 이어지던 중 뒷문이 열렸다.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툭툭 터는 주인공은 토도로키였다.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던 나는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슬쩍 반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 하더니 미도리야를 발견하자 반갑게 다가왔다.

미도리야. 좋은 아침이야.”

. 좋은 아침이야 토도로키 군. 교실에 있을 줄 았았는데 없어서,”

어디 있는지 궁금했어. 말을 마저 이으려던 미도리야는 어라? 자신이 토도로키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게 아닌가 해 말을 삼켰다. 연락 좀 한다고 친한척한다 생각하면 어쩌지.

잠깐 화장실에 갔었어.”

토도로키가 입꼬리를 올린 듯 아닌 듯 애매하게 미소지으며 끊어진 미도리야의 의문에 대답했다. 무안해진 미도리야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이거, 어제 다 읽었어.”

, '히어로의 108번뇌’! 다 읽었구나. 우와 내가 이걸 얼마나 읽고싶었는데!!”

옆에서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들은 아시도가 상당히 마니아틱한 책의 제목에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 먼저 읽게 해줘서 고마워.”

, 아냐. 저번에는 네가 양보해줬잖아. 아아.. 드디어 읽는구나.”

점심시간에 반납하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갈래?”

. 좋아! 기대된다!!”

흥분한 듯 붕붕방방 팔을 흔들어대는 미도리야에게 토도로키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시끄럽다 이것들아. 여기는 광장이 아니라 학교다. 그리고 수업종 친지 424초 지났어.”

피곤에 쩔어보이는 아이자와 선생님이 피곤에 쩔은 몸짓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문을 닫았고 보는 사람이 집게 가고싶게 만들어지는 발걸음을 질질 이끌며 교단 앞에 섰다. 본격적인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

 

*


썩 기분이 좋았다. 점심시간에는 후딱 식판을 비우고 먹는 속도가 느린 토도로키를 마저 기다렸다가 함께 도서실로 향했다

책은 어땠어? 재미있는 내용이 많을 것 같았는데.’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어. 최근 새로 발견된 개성에 대해서도 분석이 있을줄은.’‘으아아. TV 방송이나 인터넷 만으로는 전국과 세계의 히어로들을 보기에 너무 부족하니까. 1달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1달이나 기다렸어? 그럼 네가 먼저 봤으면 좋았을걸.’‘아냐아냐. 한달을 기다렸는데 일주일을 못 기다릴까봐? 게다가 토도로키군 책 읽는 속도 빠르니까 괜찮아. 빨리보고싶다아.’‘그렇게 보고싶으면 지금 보지 그래?’‘아니지. 이런건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한 곳에서 한글자 한글자 탐독해야 하는 거라구.’‘하하.’‘뭐야. 왜 웃는거야 토도로키군.’‘아니, 변함없이 너 다워서.’ 

본질적인 내용은 결국 책을 빨리 읽고싶다였지만 나름대로 농담을 섞어가며 도서실로 가는 길에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도착해 토도로키가 책을 반납하는 것을 지켜보고 떨리는 손으로 신간을 받았다. 그 와중에 잠깐 사서 선생님한테 붙잡혀 요즘 책을 제 반납 기일에 맞추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는 푸념과 함께 A반 연체자 목록을 전해받아 부디 말을 전해달라는 신시당부를 들었다. 남은 시간 동안은 학생들이 잘 찾지 않아 조용한 도서실에서 책을 읽기로 했었다. 정숙해야 하기에 서로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말은 반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하교시간, 정 안되면 밤 늦게 문자를 해도 되니까. 책을 읽어도 되겠느냐 조심스레 건넨 질문에 토도로키는 조금 고민하더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도 받았겠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통통 튀어나갈 듯 안절부절 못하면서 의자에 답싹 앉은 미도리야의 옆에 토도로키 또한 제목이 거의 지워질락 말락한 오래된 책을 한권 골라들고 앉았다.

 

책을 펼쳤을 때 까지는 정신이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은건 온통 책 내용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 약 10분 전이었다. 시간을 보고 내가 잠시 잘못봤나 눈을 비빈 미도리야가 곧 경악에 물들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도로키군, 수업시간이..!”

토도로키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걸까? 그러나 당연히 옆에 있을 줄 알았던 토도로키가 없었다.

토도로키군...?”

이름을 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책꽂이 사이에 있을까 찾아 봤지만 도서실 어디에도 토도로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설마 먼저 반으로 돌아간거야? 토도로키 군이 말 없이 놔두고 가버릴 사람은 아닌데. 내가 불러도 대답을 안했나? 아니면 무심코 먼저 가라고 말해버렸나? 복잡하게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미도리야는 황급히 짐을 챙겨 반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오후 첫수업은 운동장에서 하는 체육 수업이었다. 망했다. 게다가 자신은 주번이었기에 문을 단속하고 출석부도 선생님께 드려야 했다. 정말 망했다. 달리듯이 교실에 도착해 주섬주섬 체육복을 꺼내다가 갈아입을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미도리야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바지에 급하게 다리를 끼워 넣고 상의를 챙겼다. 나머지는 복도에서 갈아입자! 교복 위에 껴입어 버리자!

교실을 나섰던 미도리야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출석부를 챙기는 것을 빼먹었다. 워낙 급하게 행동한 탓에 교탁 위에 놓여있는 노란색 출석부를 집어들다 체육복을 놓치고 출석부를 포함한 나머지도 우수수 떨구어 미도리야는 울상을 지었다. 점심시간 때 까지는 분명 행복한 하루였는데..! 주섬주섬 집어들다보니 마음이 허허로워 졌다. 어차피 지각이다. 게다가 문서를 고정하는 철이 풀렸는지 출석부 안에 있던 학생들의 기록부도 눈발 날리듯 흐트러져 정말 되는 일이 없구나, 미도리야를 자조적으로 읊조리게 만들었다. 한 장 한 장 친구들의 개인적인 기록이 담긴 종이를 줍던 미도리야의 손에 익숙한 한 장이 걸렸다. ‘토도로키 쇼토토도로키 군의 생활 기록부구나. 훔쳐볼 마음은 없었다. 타인의 개인적인 사정을 보는 것은 엄연히 실례였으니까. 간단한 신체 프로필과 기록사항이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음 종이를 줍기 위해 아무생각없이 시선을 내렸을 뿐이었다.

“....?”

특이사항을 기록하는 항목 맨 밑에 붉은 글씨로 적혀있는 것은 분명,

말도 안돼.”

사람은 너무나 당황스러우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생각한 것이 튀어나와버린다. 몇 번을 보아도 적혀있는 글구는 똑같았다. 토도로키 쇼토. 특이사항/센티넬 현재 매칭된 가이드는 없음. 주기적으로 약물을 복용중. 체질의 발현 시기는- 자신도 모르게 기록을 읽어나가는 미도리야의 손이 떨렸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매스컴에서 문제의 씨앗이라 떠들어대는 센티넬이 본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었으며 친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게다가 미도리야 자신은, 미도리야는 떠오르는 불쾌한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미도리야가 가이드인 체질을 숨기듯이 토도로키도 분명 자신의 체질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말을 해주지 않는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불보듯 뻔했으니. 미도리야가 입술을 씹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자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비밀로 하자. 그렇게 결정하고 마저 출석부를 정리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교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미도리야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부술 듯 큰 소리를 내며 교실 문이 열렸다. 뒤이어 토도로키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들어왔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교탁 앞에 있는 미도리야를 발견한 토도로키가 그에게 다가오다 손에 들린 출석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황망한 눈동자가 비져나온 종이 뭉치로 향했고 마침내 미도리야가 손에 든 자신의 기록에 머물렀다. 미도리야는 토도로키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미도리야.”

, 토도로키군. 미안, 이러려던건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미도리야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센티넬은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 미도리야의 머릿속에 퍼뜩 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한발짝 토도로키에게서 물러섬과 동시에 미도리야는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다.

“......”

사고였어. 실수로 봐 버렸어. 정말 미안해 토도로키군.”

“......미도리야. 나는,”

한참 입술을 씹으며 바닥을 내려다보던 토도로키가 힘들게 입을 뗐다.

네가 가이드인걸 몰랐어.”

어?

맹세코 몰랐었어. 정말이야 미도리야. 너를 이용하려던 것이 아니야.”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 미도리야와 토도로키는 분명히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네 비밀을 훔쳐 보았으니 나에게 화를 내야하는 것이 아니야? 미도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토도로키를 바라보았다. 토도로키의 말이 절박함으로 인해 점점 빨라졌다.

정말이야. 믿어줘. 아버지같은, 그런 목적이 아니야. 나는 그저. 그저 네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그게 결국 이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든 용서를 빌어 보려던 토도로키는 자신의 말 끝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교실 안에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감정으로 인한 정적이 가라앉았다.






-

?? 이렇게 길게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쓰고싶었던 부분은 아직 쓰지도 못했다.

합작, 원고 이외에 개인작은 오랜만이라 재미있게 썼다.



토도로키 쇼토는 미도리야에게 퍽 호감이 있었다. 아니, 호감이라는 작은 단어로 표현할 것이 아니었다. 이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 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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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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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하일은 어린시절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하일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우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던 기사였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구두쇠 악덕 상인에게 맡겨져 이름도 없고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만이 전부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 당시의 미하일은 요상한 방향의 될성부른 싹을 보였다. 일단, 물건 배달가는 집의 주인이 여자일 경우 미하일은 그곳에서 한동안 붙들려 여자들의 수다를 들어주곤 해야 했다. 나이를 먹은 중년의 여성들은 여리한 미소년같이 부드러운 미하일의 외모를 좋아했고 소년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녀들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유 한잔 따라 놓아주고 남편과의 이야기나 옆집 여편네의 흉을 한참 보고 있으면 밖에서 미하일의 보호자를 자처한 상인이 미하일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고 헐레벌떡 달려나가는 미하일의 뒷모습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미하일이 나이 많은 여성에게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또 아니다. 한창때의 처녀들 또한 미하일을 놀려먹는 것을 좋아했다. 고의인 듯 아닌 듯 제 몸집보다 더 큰 배달물건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미하일의 옆을 지나갈 때에면 무르익은 몸을 일부러 소년에게 부딪히기도 하고 들으라는 듯이 소리높여 까르르 웃기도 했다. 때로는 노골적인 추파에 소년이 얼굴을 붉히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한동안은 소년에 대한 저질스런 농담과 이야기들로 마을의 은밀한 구석구석이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물론 상인에게 혼나는 것도 싫었고 끝이 없는 남의 험담을 듣는 것도 불편했던 미하일이 자신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일일이 피해다니려 노력을 해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이는 그대로, 행운인지 불행인지 미하일은 또래 아이들이 보기에 귀족같다는 수식어가 어울리게 하는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 금색의 고수머리는 정돈할 시간도 없어 뒷목을 아슬아슬히 덮을 정도로 내려왔고 누구도 그에게 무언가를 배우라 말한 적이 없지만 온갖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쪽빛 눈은 왜곡없이 세상을 온전히 담았다. 뭘 제대로 먹은 적이 없어서인지 체구는 작았지만 지속된 노동 때문에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자신의 신체를 쓰는 요령도 붙어 있었으며 날렵했다. 웃음을 짓는 일이 좀처럼 없기는 했지만 때때로 마을 근처에 거주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는 날에는 그와 더 놀고 싶다고 떼를 쓰는 자식을 달래려 애쓰는 어머니들이 마을에서 미하일을 탓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와는 관계 없이, 또한 자신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도 구애되지 않고 미하일의 관심은 자신이 드문드문 상인이 들여오는 짐 구석에서 발견해내는 낡은 책들에 있었다. 글을 알고 싶다. 그것이 미하일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어렸던 미하일에게 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당연히 상인은 미하일이 문자를 알게 된다면 더 성가실 것이라 여겼으므로 미하일의 눈에 비치는 문자는 단지 기묘한 형태를 가진 그림으로 밖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미하일은 그 기묘한 그림에서 규칙을 발견해 냈다. 낡은 책에서 발견한 기묘한 그림의 덩어리는 그것이 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미하일에게 알려 주었고 그것이 미하일의 내면에 있던 무언가에 불을 질렀다. ‘더 알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자신도 지식을 손에 넣고 싶다.’ 차마 그럴 용기가 아직은 생기지 않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바람이었지만 미하일의 마음 속에서 배우고자 하는 욕구는 차근차근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렇기에 어느날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 손을 내미는 시그너스와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나인하트의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2. 나인하트의 첫 번째 갈굼

처음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난 미하일은 그들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고귀한 출신이 무색하게 불우했던 잠깐의 어린 시절은 그를 밑바닥의 사람들마냥 비굴하게 만들어 놓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나인하트는 그런 미하일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등짝을 때렸다.

여제의 옆에 서있게 될 사람이 비굴하게 남의 눈치만 보아서야 쓰겠습니까. 아마도 말입니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세상에 당신보다 쓸 만한 인재가 없다면 당신은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라 오금이 저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의 곁에서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 정말 최악의 경우로군요. 당신만한 인재가 없다니. 정말..”

나인하트는 혀를 찼고, 미하일은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듯이 독설을 줄줄 내뱉는 나인하트의 말에 넋이 잠깐 나갈 뻔 했다. 그리고 얼굴을 붉혔다. 창피했다. 미하일을 뭐라 대꾸를 하려 입을 벌렸지만 뒤이어 책사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미하일의 입을 틀어 막았다.

당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가짐이죠. 뻔한 말을 제가 왜 입에 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 시간은 도매가로 넘어갈 정도로 싸구려가 아닙니다만,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의 질문을 들어줄 가치가 있다면 저는 기꺼이 당신에게 제 지식을 전달해 줄 것입니다.”

“..가치는 누가 정합니까?”

미하일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실은 책사의 말 중간에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다가 간신히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야 내 앞에서 멍청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당신이지요.”

질문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요?”

하하. 이미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질문은 가치를 잃었네요. 미하일, 저는 지금 당신이 한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나인하트를 본 미하일은 마음 속으로 이를 갈았다. 후에 에레브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여제를 제외한) 이 책사의 혀에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된다. 미하일은 그 기념할 만한 문을 연 것이다. 이 대화 직후 미하일은 자신이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낡은 책을 나인하트 앞에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나인하트는 가늘게 웃으며 미하일에게 물었다.

이것은?”

나는 글을 모릅니다. 당신이 알려 주세요.”

예절부터 배워야 쓰겠습니다만, 그 전에 제 이름부터 다시 한 번 기억하시죠 미하일. 제 이름은 나인하트입니다.”

후에 에레브의 경제권과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되는 나인하트는 어린 소년을 바라 보았다. 열이 올려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만, 총기 어린 눈은 분명 그의 안에서 넘실거리는 학구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3. 사람 만들어 놓겠습니다.(feat 나인하트)

미하일은 나인하트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났다. 글을 익히는 것은 비교적 빨랐으나 나인하트는 미하일에게 단지 글을 가르치는 것에서만 멈추지 않았다. 고작 12살 쯤 되었을 법한 소년에게 배우게 할 것이 뭐 그리 많겠느냐 싶겠다만, 미하일이 문장을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별 무리 없이 읽게 되었을 때, 굵기가 팔뚝만한 책을 몇 권 들고 왔다. 미하일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 책들을 바라보았다.

뭡니까?”

뭐긴요. 당신이 외워야 할 것들입니다.”

이번엔 미하일의 넋이 완전히 나갔다.

간단한 예절부터 시작할 겁니다. 보아하니 식사예절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과 만찬을 함께 할 것인데 그들 앞에서 당신이 한손으로 닭다리를 쥐고 뜯어먹는 모습, 난 죽어도 못 봅니다.”

식사 예절부터 올바르게 깃펜을 쥐는 법, 인사하는 법, 걸음걸이는 걷는 법, 예복을 갖추어 입는 법, 써서는 될 말과 쓰면 안될 말까지 생활 전반에 걸친 상식과 세계에 현존하는 왕국들의 역사와 문화, 계보, 심지어 나인하트는 기본적인 검술과 호신술도 미하일에게 가르치려고 들었다. 이후에 미하일은 회상한다. 자신의 첫 스승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인하트일 것이라고. 미하일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온갖 예절을 배웠고 검술 또한 기본적인 것에 한에서 몸에 익혔다. 그리고 스펀지처럼 쭉쭉 지식을 흡수하는 미하일은 나인하트는 상당히 만족스런 표정으로 지켜 보았다. 그리고 나인하트는 어느날 미하일을 불러 실험삼아 임무를 시켜 보기 시작했고...

 

4. ? 첫인상? 몰라.

누구나가 예상하다 시피 미하일과 이카르트의 만남은 썩 좋지 못한 것이었다. 미하일은 후에 어느날 눈 떠보니 시꺼먼 도적놈이 눈 앞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 말대로 어느날 갑자기 이카르트는 에레브의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의 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른다. 그날 미하일은 여느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여제의 정원 근처를 한바퀴 뛰는 가벼운 운동을 끝내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와서 빵을 뜯어먹고 있는 이카르트를 보았다. 미하일은 저 얼굴을 본 적 있었던가 하며 이카르트의 얼굴을 본의 아니게 빤히 쳐다보았고 미하일의 시선을 느낀 이카르트는 미하일을 보고 말했다.

"뭘 봐. 못생긴 계집애야."

미하일의 이카르트에 대한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이카르트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발언은 미하일에게 두가지 이유로 인한 분노를 가져다 주었다. 첫 번째로 모든 사람들은 못생겼다는 말을 탐탁치 않아 한다. 미하일은 외모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거나 신경쓰는 편이 아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듣는 것은 미하일에게도 그렇게 기분 좋은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을 계집애 라고 부른 것이었다. 외관을 보기에 아직 소년이라고 불리는 나이이기는 했으나 미하일의 어깨는 벌어져서 여자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체격이었고, 이제 얼추 애 티를 벗은 얼굴 또한 전형적인 미남자의 윤곽을 보이고 있었다. 어릴 적 진절머리가 나게 여자들로부터 희롱을 받았던 미하일은 내심 기생오라비 같다, 계집애 같다는 말에 대하여 트라우마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이카르트의 발언은 미하일의 지뢰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뭘 보냐는 말만을 들었다면 미하일은 자신의 실례를 이카르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을 것이다.(솔직히 이 말도 열받기는 했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뭘 보냐니. 생각해보면 세 단어로 이루어진 이카르트의 말은 지적을 하지 않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주어는 너, 수식어는 못생겼다, 목적어는 계집애가 붙은 말을 듣고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본인이 사과를 받아야 했다. 미하일은 식당 구석에 놓여있는 빗자루의 손잡이 밑부분을 잡고 이카르트에게로 돌아섰다. 이카르트는 우물우물 빵을 씹으며 미하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미하일의 견습 기사의 긍지를 담아 외쳤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당신, 나와 결투를 하자!”

이카르트가 배를 잡고 뒤집어졌다.

 

이카르트의 과거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는 도적이 되지 않고서는 못배길 환경에서 자랐다. 자세한 언급은 피하기에 이카르트의 과거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스승이 있다는 것을 에레브의 안다고 하는 자들은 꽤 알고 있었는데 이카르트는 살기 위한 기술을 그녀에게 배웠으며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스승을 떠나 에레브에 도착한 것이다. 미하일의 고함소리를 듣고 에레브의 기사들이 모여 들었으며 이카르트는 양 팔을 붙들려 나인하트에게 끌려가며 꽤나 관심있게 에레브의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도중에도 피실피실 웃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카르트에게 있어서 기사 예절을 보인 미하일은 코미디 쇼를 하는 광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지냈던 곳에서는 가벼운 도발은 일상이었으니 이카르트 나름대로 미하일에게 인사를 한 것이었지만 미하일이 받아들인 바는 본 뜻 그대로 였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이카르트는 생각했다. 꽉 막힌놈이야. 더럽게 재미없는 놈. 이카르트에게 있어서 미하일의 첫 인상도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최악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인하트의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했는지, 둘이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둘만이 알고 있다. 다만 분을 삭이기 위해서 검을 다듬고 있던 미하일은 뒤늦게 들어온 기사들이 하는 말을 듣고 검을 놓쳐 발등을 찍고 말았다. 미하일의 고통어린 비명 소리가 에레브에 울려 퍼졌다.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안 하셔도 됩니다. 제 결정이니까요.”

여제님께서도 허락 하셨습니까?”

당연히. 전력 보강은 썩 효율적인 일이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미하일. 서로가 첫인상이 최악이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습니까?!”
에레브의 모든 건 제 눈이니까요.”

미하일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전력을 보강한다고 치면 정식으로 기사단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붙이고 새 기사단원을 받아들여도 충분한 일인데 어째서 저런 시꺼면 도적을 나인하트가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계집애라는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미하일. 수련하러 가세요.”

나인하트가 산처럼 쌓인 일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미하일은 별 수 없이 나인하트의 집무실을 나왔다.

 

5. 미하일과 이카르트는 옛날부터 친했구나~ (feat 오즈)

이후 미하일과 이카르트가 어떻게 지냈느냐 하면은 정말 하루에 세 번 이상은 꼬박꼬박 싸웠다. 둘 다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부딪히지 않는 방법이 최선이었고 역시 처음에는 미하일도 이카르트도 서로를 무시했다. 그러나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반찬을 누가 먹느냐는 아주 사소하고도 사소한 문제로 부딪힘의 첫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성격의 닮은 구석은 눈을 씻고 찾아보래도 찾을 수가 없는 그 둘의 유일한 공통점이 쉽게 불타오른다는 다혈질적인 기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인하트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보기엔 재미있지만 관리하기에는 한없이 귀찮은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이의 놀림이라면 가볍게 웃고 넘어갈 미하일이 이카르트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비아냥을 들으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버럭 소리지르기에 바빴으며 그에 맞서 이카르트 또한 살의를 담아서 미하일에게 표창을 날려댔다. 나인하트에게 예절 교육을 받아 저속한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미하일이었지만 이카르트에게만큼은 예외로 졸렬한 좀도둑이니, 깔짝깔짝 표창만 던지지 말고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라느니 같은 말을 잘도 뱉어 냈다. 이카르트는 가시돋힌 미하일의 발언에 코웃음을 치며 뒷골목에서 배운 갱스터 욕설을 하거나 내가 미쳤냐 무식하게 네놈 검이랑 부딪히면 내 소중한 암기들이 전부 망가질 것이 뻔할텐데 내가 돌았냐 너랑 정식으로 싸우는건 내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서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다.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은 엄마 젖이나 더 먹고와라. 같이 말을 두 번 세 번 꼬아서 하기 바빴고 서로를 해하지 못해 안달인 싸움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시그너스가 나인하트에게 걱정스럽게 저 둘 저렇게 놓아 두어도 괜찮겠느냐고 말 할 정도였다. 나인하트도 처음에는 둘 중 하나만 조용히 만들면 되겠거니 싶어 여제의 힘을 빌어 미하일을 조용히 시킬 생각이었지만 시그너스의 염려가 미하일의 귀를 스쳐 지나간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식당의 상이 뒤집어 엎어졌다. 솔직히 이카르트의 깐죽거림을 반나절간 참은 미하일이 대단한 것이었지만. 나이는 동년배 쯔음, 서로가 상성이 정 반대이니 수련에도 어느정도 도움이 되겠고, 관찰하고 들어본 바에 의하면 미하일과 이카르트는 과거도 비슷한 듯 해 붙여 놓든 떨어트려 놓든 서로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에레브에 놓아둔 것이었지만 이렇듯 싸움이 점차 기물 파손으로 이어지자 나인하트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날도 다른 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미하일과 이카르트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사소한 것마저도 경쟁삼았다. 식당에서 누가 밥을 많이 먹느냐, 누가 에레브를 더 많이 뛰어다니느냐, 누가 팔 굽혀 펴기를 더 오래 하느냐, 누가 무기고에 있는 짐을 더 많이 옮기느냐, 누가 숨을 덜 쉬느냐까지. 그렇게 싫어하면 붙어있지 않으면 될 것을 서로가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는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서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 하기까지 했다. 물론 자신이 없을 때 상대방이 경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더 진도를 많이 나갔을 까에 대한 불안감이지 다른 감정은 한톨도 섞여있지 않았지만. 나인하트는 나날이 쌓여가는 에레브 기물파손 비용 영수증을 보며 나날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이러라고 그 둘을 데려 온 것이 아닌데. 물론 서로가 경쟁하며 무력이 성장하는 것은 반가웠지만 빼곡하게 적힌 영수증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직 정식 기사도 아니라 용돈삼아 주는 봉급도 적다. 그러니 봉급에서 깔 수도 없다. 미하일과 이카르트 본인들이 아닌 그들이 만들어내는 금전적인 문제로 전전긍긍하던 나인하트는 두배로 늘어난 식대 영수증을 보고 마침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

 

8. 에레브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나가세요.”

?”

?”

이럴때만은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동시에 대답하고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는 미하일과 이카르트를 보며 나인하트가 생각했다. 상극이 지나쳐서 세상 한바퀴를 돌아 다시 만난 것인가. 나인하트는 쓰고 있던 안경을 위로 치켜 올렸다.

임무입니다. 아래에 이러저러한 약초가 있는데 둘이서 구해오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마침 에레브가 리프레 위를 지나갈 때입니다. 마음같아서는 집어 던지고 싶지만 비행정으로 안전히 땅에 내려놓아 줄 테니 감사히 여기세요.”
전혀 감사하지 않거든?! 당신 우리, 아니 내가 리프레에서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해?”

살아남지 못합니까?”

눈이 달려있긴 한거야? 아래 몬스터 수준을 보라고!”

나인하트는 이카르트에게도 언어 예절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습니까? 안타깝군요. 저는 전력이 될 만한 인물을 거두어 들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아이를 모셔온 모양입니다.”

미하일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나인하트에게 수업을 받을 때 힘든 소리라도 할라 치면 그것도 못합니까?’ 같은 뉘앙스로 도발을 받았던 광경이 앞에 서 있는 사람만 바꾸어 또 다시 눈 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나인하트. 지금 리프레 숲 속으로 가는건..”

우리, 아니 저로서는 능력 밖의 일입니다. 라고 끝을 맺었어야 할 말은

못해?”

이카르트의 인터셉트로 끝을 맺었다. 미하일은 옆에서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이카르트를 쳐다 보았다.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삐그덕 소리라도 내는 것 같았다.
도련님은 그것도 못하냐고. 숲속에서 살아남는거 말이야.”

그냥 숲속이 아니잖아. 리프레라고.”

못할 것도 없지. 낮에 눈치 보면서 돌아다니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잔다면 말이야.”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나보지?”

못합니다. 그는 아직 이곳에서 수련을 더 해야하는 아이거든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쯤 되었으면 슬슬 한사람 몫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군요. 괜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나인하트가 아주 알맞은 타이밍에 또다시 이카르트를 도발했다. 미하일은 나인하트의 의중을 파악했지만 그의 의중보다 이카르트의 말을 받아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난 간다. 다시는 그딴 소리 못 꺼내게 만들어 주지.”

이카르트가 언제적의 미하일이 했던 것처럼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

이카르트는 어른이 되려고 하는군요. 미하일?”

나인하트가 온화하게 웃는 모습으로 미하일을 돌아 보았다. 미하일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저자식은 못 갈걸.”

이카르트가 비죽비죽 웃으며 말했다.

갑니다.”

그 웃는 얼굴을 본 순간 이성은 뚝 끊어졌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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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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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글

개인작 2014. 12. 21. 23:19

 말 그대로 잡다하게 내가 심심할때 쓴 글들.

 

140327

팬텀아리

나는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내가 손 수 쓴 글자들은 자음 하나 모음 하나, 획 하나 하나가 당신을 옭아매는 주문이 되어 자유라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당신을 구속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에요.
팬텀. 나는 당신을 동경했습니다. 에레브 궁전의 창가에서 당신이 처음 내게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달빛에 길게 늘어진 당신의 그림자가 저를 덮었습니다.
기억 하나요? 당신은 눈부시게도 새하얀 빛을 발하는 옷과는 달리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까만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팬텀. 당신은 내게서 불안을 가져가 주었습니다. 내 걱정을 가져가 주었습니다. 내 슬픔을 가져가 주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웃음을 가져다주었고 꿈을 가져다주었고 기쁨을 가져다 주었으며 미약하게나마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자유를 주었어요. 당신이 내 앞에 서있을 때 나는 당신을 휘감고 있던 자유를 동경했고 당신이 내 옆에 서있을 때 당신이 말하는 경험들을 갈망했습니다.
팬텀. 당신은 나에게 있어 꿈과도 같았어요.
비로소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서 가져가고 대신 채워 넣어주었던 것들을요.
팬텀.
팬텀.
펜촉이 끊임없이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밤은 이제 곧 새벽에게 자리를 내어줄거에요. 어둠에 잠긴 세상을 부드러운 손길로 걷혀주는 태양이 뜰 겁니다.
당신이 태양이 되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은 이미 나에게 아침을 주었으니까. 당신이 찾아온 날 당신은 나를 둘러싸고있던 밤을 걷어가주었어요.
나는 두려웠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기회를 준 나의 위치가.
당신을 만나고 나는 결심 할 수 있었습니다. 공중에 두둥실 떠오르던 마음을 한데 묶어 다시 제 품에 가둘 수 있었지요.
팬텀. 당신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 종이에 제 진심을 적습니다. 세계는 나의 꿈이자 희망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어요. 당신도 마친가지로, 나는 이제 이 편지를 접어 어딘가의 책속에 끼워넜을 것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서 이 글자들은 내 마음을 품은채 숨쉬고 있겠지요...
당신이 언제까지고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ps 그것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세계속에는 당신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걸요.

 

 

 

프리메르 

두꺼운 천막을 겆히고 나와 한숨을 쉬었다. 천막 밖의 공기는 생각보다 시원하면서도 날이 바뀐 영향을 받아 그 차가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날이 바뀐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가져다주는 종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고 시간 감각을 잃은지도 오래 된 듯, 나에게는 하루가 지났지만 남들에게는 사흘이 지난 날들도 세어보면 두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차고 넘쳐 꽤나 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가져본 개인적인 시간이리라. 그러나 그 개인적인 시간도 나에게는 사치인 것마냥 머릿속을 온통 잡다한 생각들이 메우고 있었다. 잡다하다고 표현할 수 없을만큼 무거운 일들은 내 머릿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검은 안개가 끼인 것 같았다. 차라리 흰 종류의 안개라면 미세한 형체라도 구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뻘에 발을 디딘 것 같기도 했다. 분명 나는 걸어간다. 발에서는 느낌이 느껴지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헤메이며 어느샌가 진득한 흙은 위로 올라와 발목을 넘어 종아리로 허벅지로 내 몸을 축축한 흙 속에 밀어넣어 버리는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 위로 구름이 잔뜩 끼었음에도 남아있는 그나마 몇 개의 새벽별을 본다면 뻘처럼 저 밑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생각들을 조금은 밀어 낼 수 있게되었다. 몸 뒤로 닿는 천막의 느낌이 까슬하다. 나는 천천히 다리를 굽혔다. 지금까지 계속 앉아 있었다. 직각으로 굳어버린 듯한 다리에 다시 한번 움직임을 주자니 뼈마디를 타고 올라오는 시원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 올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눈 밑으로 보이는 풀잎마저도 다른 생각을 들게 할 수 는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해요.’‘당신이 필요해요.’‘여기엔 무엇을 하면 됩니까?’‘이곳엔 이것을 하는 것이 옳을까요?’‘옳지 않을까요?’‘하지만 당신의 말을 따랐다가 이러이러한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죠?’‘당신이 책임 질 수 있습니까?’‘감당할 수 있습니까?’‘결국 당신의 책임이에요.’‘나는 몰라요 당신이 해결해요.’‘전부 네 탓이야.’ 제발 나는 가만히 놔둬. 정신을 차리면 흙을 그러 모아쥐고 손바닥에 잔돌의 자국이 날 정도로 움켜쥔 나 자신이 있었다. 흙을 놓았다. 그러나 흙의 잔재는 내 손 위에 남아 있었다. 나는 분명히 그들을 위해 일하겠노라고 말했다. 시작은 떠밀리듯이, 진행은 온갖 말들을 다 들어가며, 끝은? 잔돌이 박히듯 남은 자국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천막이 싫다. 비로소야 주위에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인식했다. 각종 소리가 들려온다. 다급하면서도 느릿하면서 낮고 농담을 심각한 소리를 몇몇의 흐느낌은 들어도 듣지 않은 듯 알아듣기조차 힘든 말들이 공기중을 휘감고 맴돌았다. 불타는 소리가 들린다. 마르지 않은 나무에 불이 옮겨 붙는 소리가 들린다. 불타는 숲을 본 적이 있는가? 숲이 불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나무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나뭇잎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는 했다. 깊고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무수한 녹빛에 감싸이면 그들은 다만 나뭇잎만이 아닌 과감하게 몸 속까지 닿아오는 진동으로 말을 걸고는 한다. 하고는 했다. 그건 마치 태곳적부터 살아온 자들의 특권인 듯 그에게서 내게로 그녀에게서 내게로 말을 걸어 왔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고귀한 자의 미소는 내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숲이 너를 사랑하니 나도 너를 사랑해. 우리 종족은 너를 받아들이겠어. 한때의 추억이리라. 그 추억조차 재에 그슬려 사라져 버린 것을 나는 안다. 숲은 내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불에타는 그 순간 말이다. 숲이 지르는 비명소리는 침묵 그 자체였다. 그들은 내게 자신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무엇을 했는가. 애석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 발버둥은 우습기 짝이 없게 끝이 났다. 여섯 살 아이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리겠다 재잘거림을 들었을 때에도 그처럼 웃기지는 않으리라. 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말을 잃어버린 생명들이었다. 고귀한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숲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실성한 듯이 웃었다. 그것조차 아름다웠다.
요정이 달빛을 마주하며 거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마치 그 존재 자체가 빛의 일부가 된 듯한 광경인지라 내가 꿈 속에서 그것을 보았는지 꿈을 꾸는 것인지 지금도 알 수는 없는 광경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달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를 비추는 것 이상의 존재로 내게 다시 그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달이 없다. 구름이 가려 내게 남은 것은 소금같은 몇 개의 별과 불은 빛으로 하늘을 뒤덮은 구름 뿐이다. 또한 나는 손을 휘적이며 수풀 안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은 소리를 참기 힘들었다.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내게 말했다. 무엇을 하고 있냐.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냐. 이리로 와 보아라. 불씨가 어디서 시작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우리의 뼈가 꺾일 때의 느낌을 너는 이해 하느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죽음을 이해 하느냐 우리의 울음 소리를 듣고서도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네 종족밖에 생각을 하지 않지. 지독히 이기적인 족속 같으니. 네게는 능력이 있었는가? 우리를 구할 능력이 있었는가? 없었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 서 있는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로운 그 자리를 자진해서 선택한 병신 머저리같은 너는 모래성같은 사람들에게 대체 무엇을 알리고 있는가? 있었다고? 우리를 외면하기 이전에 훨씬 더 더 더 이전에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디서부터 나는, 왜, 이곳에서, 숨을, 쉬고, 있나? 손을 휘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명한듯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기분을 이렇게 느낄 줄은 몰랐으므로. 이성은 깨닫고 있었다. 이 이후의 일을 어떻게 여며 가야 할지 어디서부터 바느질을 시작하고 나사를 조이고 기름칠을 해 나가며 섬세한 작업을 시작해 모두를 덮어낼 이부자리를 준비할 일을 말이다. 그러나 감성은 그렇지 못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무엇하지만 그래, 천막의 뒤편으로 나와 쭈그리고 앉아서 흙을 한 웅큼 쥐었다 손을 펴 보고 홀린 듯 수풀 안으로 들어가는 나는 명백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정신인 사람이 누가 있으랴. 정신을 놓아버리는건 엄연히 시간 문제였으므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곧장 호수로 나아가 신발을 벗고 한걸음 한걸음 호수 안으로 스며들어 내일 아침 시체로 퉁퉁 불어 물 위에 떠올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네가 좀더 너 자신을 생각했으면 좋겠어.’ 모두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지나가는 말이던 진심이던 나에게 질리도록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결국 나는.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나를 위한 생각이 아닌 온전하지 않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다. 용은 멸종한다. 혹은 노예로 팔려간다. 이종족들은 인간에게 짓밟힌다. 가장 온건한 방식의 타협은 그들의 모든 문화와 언어를 잃고 절대자의 밑에서 통일된 사고방식을 지니며 살아가는 수 밖에. 전쟁을 모르는 이들은 왜 우리의 적이 몬스터라고 생각하는가. 통제불능의 광폭한 생명이 이 세상에 몬스터만이 있는 것처럼. 진저리가 나도록 역겨운 행동하는 것은 나름대로 체계화된 문명을 갖고 있는 족속들인데.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과연 평화로울까. 인간인 몸으로 모욕적인 취급도 당했고 차마 보지 못할 꼴도 봐왔으며 입에 담지 못할 희롱도 당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도 나는. 모험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할아버지, 할머니,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내게 해주던 옛 모험들과 내 모험은 너무나 다른 종류다.
발 끝에 물이 채였다. 호수에 달이 비추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호숫물에 비친 달이었으니 나는 달을 바라 보았다. 불그스름한 하늘을 찢고 달이 저 자신을 드러내었다.

141005

여카일 cherry blossom

전투가 없는 날이면 판테온 대신전의 계단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어느샌가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인사를 하고 까르르 웃으며 달려갔다. 몇몇 사람들은 내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럼 그들은 웃으며 서로서로 이야기를 희미하게 나누고는 내 앞을 지나쳐 갔다. 심각한 표정으로 왔다갔다 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을까. 사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설핏설핏 스쳐지나갔던 얼굴들은 전투가 끝나고 다시는 볼 수 없기도 했고 익숙해져 한번쯤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은 언제부턴가 내 삶의 대부분을 전투가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친구들과 뛰놀던 시절을 지나 갑작스레 내게 찾아왔다. 나는 어깨 너머 땋아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만졌다. 때때로 어릴때에는 아이들이나 그, 그녀가 장난스레 잡아당기곤 했었다. 도망치는 것을 번번히, 혹은 일부러인 듯 머리카락부터 잡혀 뒤로 엉덩방아를 찢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싫은 소리를 하던 것이 어릴적의 일이다. 그녀는 넘어진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그는 내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잘못했다며 사과를 했다. 흐트러진 머리를 땋아주는 것은 언제나 그녀였다. 머리카락이 참 고와. 손틈새로 머리가 빗겨지고 촘촘히 땋는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달이 세 개인 하늘은 밥을 먹을 시간인 듯 혹은 잠을 자야 할 시간인 듯 머리 위에서 영롱히 빛났다.

 셋이 누워 이야기를 했다. 반드시 우리가 커서 어른들을 지키자고. 정의의 용사가 되자고.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마력의 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지곤 했다. 그럼 나는 이곳에서 너희들을 기다릴께. 너희가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나는 변함없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그럼 내게 이야기를 해줘. 너희들이 보고 듣게 된 걸 말야. 그녀의 말을 듣고 때때로는 그가 조금은 부루퉁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린다는 거야. 너는 왜 우리끼리만 가버릴거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내 친구들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린 언제까지고 함께야. 친구잖아. 그러면 그녀는 말 없이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두 개의 달이 겹쳤다. 그가 말했다. 낮간지러운 소리는 하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는 그가 고마워 다 같이 하늘을 보며 웃었더란다. 숲에는 알알히 반짝이는 풀잎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어린시절의 우리는 어디가고 나 혼자 덩그러니 대신전의 계단 위에 앉아 어린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카이저님처럼 될 꺼야! 나도 나도! 노바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겠어! 더 이상 그 소리를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대 신전 안으로 향했다. 나는 카이저가 될 거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대신전안에는 수많은 전대 카이저들의 동상이 있었다.  저절로 위축이 되는 듯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처음 이 장소에 발을 들였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동상들을 올려다 보았다, 그것은 경외 그 자체였다. 몸 안에서 본능인것처럼 들끓는 피가 나 자신이 새 노바의 수호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맹세했다. 나의 종족을 보존하고 그들이 절대로 파멸의 길에 발을 디디지 않게 하리라. 이 수많은 동상들의 주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리라. 내 검과, 나의 목숨을 걸고. 나를 보는 시선들은 경외로 찼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경외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안다. 경외라는 것은 때때로 타인에게 부담이 되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동상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지면서도 마음 한쪽에 자리해둔 것 또한 커져갔다. 바로 밑에서 전대 카이저의 발을 만지며 생각했다. 왜 하필 나일까. 다른 이들이 많고 많았을 텐데 왜 하필 나를 수호자로 선택 했을까. 나에게 특별한 것이 있었던 걸까. 심지어 강한 남자도 아니고, 남자보다 약하던 나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긴 머리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그녀에게서.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다가 마지막 적의 목을 베고 그 피를 뒤집어 썼을 때 갑작스레 기억이 났다. 내 아래에는 핏물이 고여 파동을 그리고 있었다. 내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당장 그 때의 내 모습이.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땀과 피에 젖어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미 잔뜩 헝클어진 채라 다시 묶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묶어줄 이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고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에 개구지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줄 친구가 그곳에 없었다. 차가운 돌에 머리를 기대었다. 떠나가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를 잡을까 내밀었던 손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사람들이 내게 달려들어 당장 괜찮으냐고 소리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림자들에 쌓여 나의 친구는 그렇게 사라졌다. 어느샌게 보이지 않게 된 그녀 또한 마찬가지 였다. 판테온 대신전의 계단에 앉아 있기 전에 우리가 항상 함께였던 그 장소에 가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시절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달은 여전히 세 개가 있는데 그 장소에는 나 혼자였다. 손을 내밀었어야 했었다. 나를 둘러싸고 지켜달라는 이들을 뿌리치고서라도 그에게 달려가 그를 막았어야 했다. 다시 마주한 그를 내 검으로 내리치기 전에. 그를 개 끌 듯 잡아 내동댕이 치기 전에. 더러운 배신자라고 부르기 전에. 그의 눈에서 내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의 기억이 퇴색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 느끼기 전에. 나 자신이 내가 아닌 완전한 수호자가 되어버리기 전에 나는 그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말았어야 했다. 손이 아파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돌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톱이 부러져 피가 나고 있었다. 수런수런 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외마디 감탄사에 나는 뒤를 돌아 보았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경탄하며 동상들을 올려다 보았다. 혹은 까르르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쳤다.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우리의 꿈이 이루어 진다면, 나는 먼저 앞서가는 그의 어깨를 치며 활짝 웃을 것이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는 돌아보면서도 곧 내 장난을 받아 주며 어릴때처럼 내게 헤드록을 걸고서 항복하라 말하고, 저 멀리 그녀가 보여 우리는 다시 다 함께 그 장소로 가는 거다. 누군가는 축복을 하고 누군가는 다른이의 어깨에 기대어 변함없이 달이 세 개인 하늘을 보는 거야. 어쩌면 가끔씩을 우리도 저쪽 세상에서 오는 이들과 같이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 볼지도 모르지. 그리고 신기해 하는거야. 그땐 너도 함께야. 셋이 다 같이 가는 거야. 우리가 지켜줄게. 내가 당신들을 지켜 줄게요. 맹세합니다. 나는 나의 종족의 안전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겠습니다. 어렸음에도 어렴풋이 생각났던 그때의 나의 생각은 나를 둘러싼 이들의 생각에 휩쓸리면서도 그가 다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과 그녀가 슬픈 얼굴로 울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어린시절의 전부와도 같았던 것들을 나는 잃었다. 나의 친구. 바랐던 꿈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나 커서 그 무게에 발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넘실거렸다. 동상에 기대어 미끄러지면 소리없이 나를 반기는 환상이 절로 웃음 짓게 만들어 다시는 눈을 뜨기 싫게끔 손짓했다. 너희가 생각하던건 뭐였어? 다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어? 씁쓸한 감정이 타고 흐른다. 내 시야에 닿는 곳에 나를 아는 이들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다. 큰 소리로 나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어느샌가 금기와도 같은 일이 되었다. 나는 나로서, 수호자로서, 한번 깜박일때마다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회한은 그 자국을 남기다가 덧없이 사라졌다. 이대로 자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채로. 차라리 전투가 나았다. 살아서 적을 더 베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는 전투가 행복했다. 생각할 시간이 생기면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온통 후회와 통한으로 점철되었다. 갈기갈기 찢겨진 넝마마냥 한참을 거대한 우상의 그림자 밑에서 나는 잠겨 있었다.

 

141008

프리드  아야노의 행복이론

떠올려보면은 온통 좋은 추억 뿐이었다. 붉게 저물어 가는 노을을 곁에 두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 고향을 떠나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서 때때로는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밤중에 숲 저편에서 번쩍이며 빛나는 짐승들의 눈에 밤 잠을 설치기도 하고, 먹을것이 없어 숲에 아무렇게나 널린 열매를 주워 먹었다가 복통을 일으키기도 하고, 벌에 쏘이기도 하고, 몬스터에 쫓기다 비탈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하고. 덕분에 입고 나온 옷이 엉망진창이 되고 지팡이 또한 부러져서 어쩌나 싶을 때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길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내가 나누었던 인사 만큼이나 다양한 종족들을 만났으며, 그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면서 그들의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한걸음씩 걸으며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 구름을 올려다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더욱 많은것이 있다. 어느날의 밤하늘은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것처럼 총총히 빛났다. 나를 본 어떤 이가 내 눈이 별을 비춘 호수처럼 빛난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한참 같이 여행 했다. 그는 어느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나와의 작별을 말했다. 세상에는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더 많아. 지금까지 우리가 봐왔던 게 일부라면 너는 믿겠어? 그는 내게 악기를 건네며 말했다. 너와 더 이상 함께 가지는 못할 것 같아. 하지만 때때로 내가 있는 곳 근처로 온다면 내게 이야기를 들려줘. 나는 네게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해 줄게. 담담하고 멋진 작별이었다. 그와 그가 뿌리내린 마을을 등지고 걷는 노을도 붉고 눈부시게 빛났다. 그 이후에도 만난 내 소중한 친구들. 손으로 꼽자면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어른이 되었다. 점점 자라나는 나와 같이 내가 여행하는 세계 또한 점점 변해 갔다. 세계는 마치 저울처럼 끊임없이 흔들린다. 한쪽에는 좋은 방향의, 한쪽에는 나쁜 방향의 추를 매달고 끊임없이 흔들리던 그것이 무너져 마침내 기울기 시작 했을 때 나는 나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래전의 그곳으로 다시 한번 향하게 되었다. 도착한 그곳은 입구부터 탄 냄새가 진동했다. 내 두 눈으로 무너져가는 세상의 모습을 목격한 첫 순간이었다. 형체가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는 그 마을 안에서 생존자를 찾는 행위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였다. 내가 찾은 것은 새카맣게 탄 세구의 시신이었다. 셋 중 어떤 것이 친구인지는 알 수 없어 한참을 그곳 앞에 멍하니 서있다, 해가 질 즈음에야 그나마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였다. 부스럭 거리며 잿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발 밑을 내려다보니 용케 그슬리는 것으로 끝난 무언가가 있어 집어들었다. 까끌하게 손 끝에 닿는 그것은 친구의 추억의 단편인지라 내 안의 균형조차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나의 용에게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그제서야 나는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달리 했다. 내가 할 일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행 중,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 감정에 휩쓸리듯이 한 선택은 내 운명의 지침을 바꾸어 놓았다. 여행과는 또다른 고된 날의 연속이었다. 바뀌는 것 없이 점점 기울어가는 추를 보면서 때때로는 초조함을 느끼고 그때와 전혀 변함없는 하늘을 보며 심정을 토로해보기도 하고. 내가 지키려던 것을 나 스스로 포기하기도 해 보았다. 나는 어른에서 내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었다. 의지할 곳은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도 극히 드물어 때때로 나의 용에게 기대 의지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울거나 하는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럴 때가 지났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가 결국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전쟁은 상처만을 남긴다.’ 끊임없이 주장하는 이가 사라지고 그녀의 의견을 따르던 사람들도 그에 휩쓸려 대부분이 죽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전쟁을 선택했다. 앞선 것은 나였다. 분명 전쟁은 상처만을 남겼다. 더 이상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고 평생 흉터로 남아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바였다. 나 또한 알고 있었으니, 가끔씩 꽃을 들고 찾아가는 세 개의 묘비는 언제나 공허한 바람으로 내 상처를 들쑤셔 놨다. 그에 무뎌진 나는 그럼에도 생각했다. 죽는다면 상처를 입는 것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세상이 너무나 좋았다. 붉게 노을지는 하늘 저 너머를 바라보며 하루가 저물 때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사람들이 사는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면서 어린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어머니의 부름을 따라 달려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삶이 피곤하거나 그만두고 싶다 생각 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내가 입은 상처조차 그것을 통해 사소한 것이라도 무언가는 배울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 정말로 행복했다. 내 친구들도, 용들이 자신의 숲으로 돌아가 알과 새끼 용들이 무사한지 살펴보는 것도, 그들이 날개짓을 할 때 비처럼 방울방울 쏟아지는 반딧불이도, 숲 너머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요정들의 마을과 밤하늘을 배회하는 하얀 새들도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남자의 슬퍼하는 탄식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다할 이의 굳은 눈매, 기울어진 세상의 수런거리는 말소리와 그럼에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즐거운 노랫소리가. 이 지경이 되도록 그 무엇에도 질리지 않고 웃을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되돌아 올 것 같은 시간은 미련이라는 족쇄가 되어 내 발목과 숨통을 조였다. 미련들이 내 목을 조르며 당장에라도 자신이 잃은 것들을 돌려내라며 울부짖었지만 차마 그것마저도 이해했기에, 단지 오만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목이 졸려 쇳소리를 내며 괜찮다 되뇌이면서도 웃음을 잃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애정은 거두고 싶다 해서 쉬이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왜 이리 내 자식처럼 아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정의하고 이해했지만 근본적으로 어렴풋한 정의 그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좋아. 단 한마디 즉 사랑유치하지만 그것으로 표현을 다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것 이상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다. 외에 무엇으로 더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해의 끄트머리가 지평선에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끝이 보인 참이었다. 오랜 연구의 결과물에 마침표를 찍고 오두막에서 나와 차를 홀짝이며 노을을 감상하던 참이었다. 이 광경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용이 내 곁에 앉았다. 나도 용에게 등의 기대었다. 아는 것은 우리 둘 밖에 없었다. 이제 곧 다른 몇몇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고 뜨끈해진 머리를 식히며 생각해보았다. 아프리엔.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프리엔. 나는 말없는 용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너는 내 선택을 막지 않을 거야? 두 눈을 깜박일수록 저무는 해는 더욱 흐릿하고도 붉은 빛으로 강렬히 빛났다. 뭉그러진 바람이 부편에 피어난 들꽃과 풀을 스치고 내게로 와 부딪혔다. 물론 네가 막는다고 해서 하지 않을 내가 아니지만. 사실 우리 많이 싸웠잖아. 처음 만나고 의견이 맞지 않아서 네가 내게 화를 낼 때도 있었고 네가 내 뼈를 부러트릴 뻔한 때도 있었고, 네게 알을 떨어트리겠다 협박했던거 기억해? 나 참 철이 없었지. 주절주절 이야기 하던 목소리는 점점 잦아 들었다. 희생은 결국 자살과 같다. 남의 입으로 듣는 영웅담은 고귀한 희생처럼 들리지만 결국 그 본인은 알 것이다. 자신이 죽게 될 것을 그 마지막 순간에 두 눈에 아로새기고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생각을 계속하다간 정말 멍청한 생각을 떠올려 버릴거야. 지금 이 작전만으로도 충분히 바보같고 멍청하잖아. 서투르기 짝이 없는 생각이야.

그 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때 그 수많은 선택지중 정답은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나만이 더 이상 이 곳에 살아 숨쉬고 웃고 떠들고 사랑을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웃었다. 아프리엔. 정말 좋아해. 넌 내 최고의 친구야. 숨을 편안하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갑자기 뜨끈해져 오는 눈시울이 당황스러웠다. 편안하다는 것은 사실 거짓말이다. 떨리는 것은 나 스스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사실은, 죽고싶지 않아. 결과의 도출은 내 탄생의 부정과 내가 지금까지 다른 이들과 함께 쌓아왔던 모든 시간이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종이를 움켜잡고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고민했다. 해가 한치 기울 듯 말 듯 한 시간에 불과했으나 내게는 그랬다. 아프리엔. 여전히 용은 대답이 없었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에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내 말은 공중으로 흩어졌으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다. 그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벼랑의 끄트머리에 몰려 한 선택이 옳은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지금에만은 알 수 있다. 이제 차갑게 식은 미련이 속눈썹 끝에 매달렸다가 나의 미소와 함께 밑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노을은 눈부시고도 따뜻했다.

141104

윈드브레이커+와일드헌터

그녀가 말했다. ‘복수심으로 시작된 싸움은 슬픔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는 생각했다. 고고한 이상을 위하여 검을 든 자들은 생각하는 것도 고고하기 짝이 없어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지는 전쟁 속에서도 적의 목을 베기 전에 한번 더 참회할 기회를 줄 것이다. 희생은 그들의 몫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겠지. 그들은 귀한 몸이시니 아주 당연하게 우리는 무릎을 꿇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동기가 중요합니까? 당신은 정말이지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많군요. 하긴, 연합의 수장이 하는 일은 생각하는 것 뿐이니 그런 것 마저 꼼꼼히 생각하지 않는다면 차마 우리를 볼 낮이 없겠네요.”

그녀는 맑은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개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폭언을 들었음에도 잔잔한 수면에는 파문조차 일지를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그의 주변 인들이라 그는 부드럽지만 강경한 힘에 의해 그녀 앞에서 끌려 나와야만 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위치와 그녀의 위치를 고려 했을 때 말한 때와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은 말의 의미에 한치 거짓과 의심이 없었기에 그는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말했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아.’ 그 역시 눈에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으며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 까 떠들어대던 친우의 죽음이 슬펐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의 부모를 잃고 무엇보다도 믿었던 형제의 배신에 인생관이 비틀릴정도로 좌절과 슬픔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는 동료에게 말할 수 있었다. 죽은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는 그 원념이 남아 산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고 마법의 힘을 매개체 삼아 자신과 운명을 달리 한 이에게 마지막 뜻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머나먼 일일 뿐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은 수습하기에도 벅찬 시신 뿐이었으므로 그는 동료의 어깨를 잡았다. 형체를 알아 볼 수조차 없게 불탄 시신을 잘도 끌어안고 있던 동료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엉겨붙은 피와 잿더미가 동료와 시신의 사이에서 짓물렸다. 그는 역한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슬픔을 이기는 것이 있을까. 어렸던 그는 불 탄 집 앞에서 목도리를 추스렸다. 추웠기 때문이었다. 맨발이었고 입고 있었던 옷은 가벼운 가을 옷 뿐이었다.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부모님을 잃어 슬펐고 자신들을 버린 형에게 화가 났으며 추웠다. 그는 고개를 털고 동료에게 말했다.

시신은 나중에 수습하자. 지금은 갈길이 급해.’

동료가 중얼거렸다. 대부분은 뭉그러져 알아 듣기 힘든 발음이었지만 몇몇 단어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결혼식, 약속, 전쟁, , 약속, 약속, 사랑, 약속. 그는 머리가 지끈거려 동료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자.’

비명소리같은 발악이 뒤를 이었다. 그는 동료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인신모욕을 들었다, 얼떨떨한 그 상황에서 들었던 말 중 그가 현재 유일히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였다.

 

정확히 형이 죽은지 한달째 되는 겨울날이었다. 그날 그의 형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부딪히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자신의 형이 언제 마지막 숨을 내쉬었는지조차 몰랐다. 순간은 빨랐지만 느렸다. 언제나 바보같이 웃음만 지어 짜증을 유발하고는 했던 형의 표정이 섬광처럼 굳었다가 서서히 편안하게 이완하며 모든 것을 놓은 듯 멍해졌다. 녹빛 눈동자는 빛이 깨어졌다. 형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것과 그 증상이 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전쟁에 나오지 못해 안달인 형에게 들었던 감정은 단순한 싫다라는 감정의 집합체에 가까웠다. 그는 형을 미워했다. 원망했다. 증오했다. 형을 원인으로 삼아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며 그로인해 울었고 서글퍼했다. 그는 때때로 생각했다. 형이 없었으면. 누군가 자신과 형을 엮으면 소름끼쳐 했으며 그를 비웃고 그의 모든 것을 짓밟았다. 우물쭈물하며 손을 내밀던 형의 손을 외면했다. 형이 그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형의 죄책감 또한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이기심에 우리를 저버린 형이 나에게 가지는 책임감을 곱게 포장하여 내비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멈출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지그문트 교관이 했던 말이었다. 선을 지키고, 인간의 유도리를 지키고, 시그너스 기사단과 대립하는 관계인 레지스탕스 임에도 교집합은 있으며 그것을 선으로 표현 하겠다.

그는 형을 사랑했다. 차마 버릴수는 없는 감정이었다. 사랑을 원망으로 감싸고 증오로 묶어 놓았다. 슬픔으로 포장한 감정은 작은 실오라기도 내비추지를 않았다. 형은 자신에게 웃어보였다. 사실은, 사실은 사랑했다. 증오하면서도 원망하면서도 형을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마주하는 자리에서는 형을 외면했으면서 사실은 조금씩 훔쳐보는 것을 숨기지 못했으며 그의 모습을 동경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의 시작을 준 사람에게 경애심을 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는 형을 따라잡고 싶어했다. 저 멀리서 오랜만에 본 형은 처음보는 기술을 사용하며 자신이 그리 어렵게 어럽게 몰아놓은 몬스터들을 단 일격에 전멸시켰다. 서리바람이 볼을 차갑게 스치며 흩날리는 눈꽃 사이로 본 그의 모습이란 넋을 놓아 동료들에게 한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단 한마디라도 나누고 답답한 이 심정을 전하고 싶었다. 그들은 형제였다. 그는 형을 더 알고 싶어했다. 정말 자신들을 버린 이유가 그 이상때문이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마음에 걸려했다. 그는 형에게 배우고 싶었던 것이 많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에게 용서받고 싶어했다. 어쩔 수 없는 어리광이면서도 형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라 맘속으로 작은 희망을 품고는 했다. 시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형이 살아 있을 것이라 그 누가 당연하게 말해준 것이 아님에도 아주 당연한 대 전제인마냥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 그의 형이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유일한 자신의 꿈이었던 그의 형이었으니까.

나의 형.

강한 나의 형.

나를 사랑해주는 나의 형.

 

이젠 가족이 없다. 겨울날 그는 목도리를 끌어 올리며 공허한 벌판 위에 섰다. 그는 마치 십 여년전의 그날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달 전 형은 이곳에서 죽었다. 형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형은 빈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투력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으므로 무언가 착각을 하는 가보다 생각했다. 형의 몸에는 외상이 없었다. 그러나 입에서부터 시작된 검붉은 핏줄기는 셔츠 앞섶을 적시고 망토와 바지 드문드문 제 존재를 드러냈다. 그는 처음 보는 형의 생소한 모습에 으르렁거리는 재규어의 부름도 듣지 못한채 형을 바라보았다. 형의 주변으로는 칼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그에게만은 부드러운 산들바람이었다. 형은 그에게로 다가왔다. 한발짝 한발짝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시선을 내려 형의 힘겨운 발걸음을 보았다. 부축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상황이 비현실적이었던 탓이다. 형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딜 보는 줄 알았을까.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형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형이 한걸음 옮길 때마다 발걸음에 비례하며 검붉은 호선이 떨어졌다. 칼바람은 형을 상처 입혔다. 형은 느릿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가슴팍 주머니에 품고 있던 작은 펜던트를 꺼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용돈을 모으고 모았어도 생일선물을 사기에는 몇푼이 모자라던 그 시절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서 간신히 산 물건이 있었다. 형의 13번째 생일이었다. 활을 살까 했지만 어렸던 그가 사기에는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이라 애써 포기하고는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 그가 산 물건을 형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목에 걸었다.

미안하구나...”

형은 그의 손에 펜던트를 쥐어 주었다. 손이 찼다.

“.......그날......”

그리고 형은 웃었다.

네 곁을, 떠나서는.. 안되는 거였어.....”

언제나처럼. 바보같이.

 

펜던트와 함께 형은 미끄러졌고 신기루처럼 그의 삶에서도 사라졌다. 목도리는 다시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싸구려 펜던트는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녹 한점 없었다. 세월의 흔적을 반영하듯 당연히 찌그러진 자국도 있었고 작은 흠집이 생긴 부분도 있었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는 펜던트를 열었다. 심장을 찌르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펜던트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형을 사랑했다. 형을 사랑하는 만큼 싫어하고 미워했으며 원망과 증오로 사랑을 감싸 안았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생전에 하지 못한 말은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 뿐이다. 그는 자신의 솔직함을 이렇게 포장했다. 진심이라고는 드러나지 않는 졸렬한 삶이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보잘 것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의 형이 있었다. 그가 등을 돌리고 형에게 비수를 꽂을 때조차 형은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감싸 안았으며 자신의 동생이라 수도없이 전해오고는 했다. 나는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가.

그는 드디어 인정했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은 깨어 졌으며 의심으로 점철 되었다. 의미없는 말들이 아주 뒤늦은 후회와 함께 눈쌓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상실을 자신이 지탱하고 서 있던 바닥이 무너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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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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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고데기

 


(황급히 책으로 가린듯 어지롭게 널린 책들 아래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수첩이 밑으로 툭 떨어진다. 작은 글씨가 오밀조밀하게 쓰여있다.)

.....요즘 알파님께서는 신전 안에서도 영 안절부절 못하십니다. 자리에 가만 앉아서 멍하니 손톱을 만지고 계시다가도 벌떡 일어나서는 정신사납게 주변을 왔다갔다 거리시기도 하고 신전 외부와 통하는 문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시죠. 어느날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으시다가 이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불만에 가득 부푼 표정을 하곤 책을 내던져 버린 채 메이플 월드로 향할 때도 있으셨고 (솔직히 제가 책을 던지는 행동을 저희 어머니가 보셨다면 저는 물통을 들고 서있는 벌을 받아야 했을 거에요.), 연금술 수업을 받으시다가 중간 과정에서 정신을 놓으셨는지 이상한 약을 만들어 놓으셔서 신관들이 기겁한 적도 있어요. (약에서 꾸물꾸물 살아있는 것처럼 기분나쁜 연기가 기어 나왔는데 다행히 옆에 계시던 베타님이 신전 밖으로 내다버려주셨습니다.) 또 기분전환 하신다며 머리스타일을 바꿔보기도 하시고 괜히 평소에는 시끄럽다며 쨍알쨍알 싸우기만 하던 무기에게 (성물은 자아가 있다고 신관님들께서 설명해 주셨지만 전 아직도 신기해요!)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하십니다. 베타님께선 그런 알파님을 가만히 앉아 쳐다보기만 하고 계세요. 알파님이 저러시는 이유를 저는 압니다. 솔직히 신전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좍 퍼졌어요. 알파님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 말예요. 그 소문, 알파님만 모르시는게 아닐까요? 어쩌면 베타님두요.
하지만 신관들은 다들 모르는 척 해줍니다. 베네딕트 신관님은 초우 신관님 옆에서 무언갈 소근소근 이야기 하기 바쁘시고 피엥 신관님은 알파님의 안절부절 못하시는 행동을 기록하기에 여념이 없으세요. 다른 분들께서는 알파님이 어질러 놓으신 책이나 물품들을 치우느라 정신없으시구요. 도대체 왜 다들 알파님이 안절부절 못하는 행동을 바라보기만 하는걸까 저는 늘상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다들 신전의 평화는 바라지 않는걸까요? 알파님의 연애사에 안정을 바라지는 않는 걸까?

그러던 어느날, 저는 복도 청소가 제 담당이었던 주에 새벽같이 일어나 반쯤 졸며 대걸레를 물에 빨다가 저 복도 끝에서 걸어오시는 알파님을 발견했습니다. 들고있던 이모자나 저모자를 써보기도 하시고, 안절부절하게 머리도 만지고 하시다 결국 에이씨 하는 단말마와 함께 벅벅 헤집어 버리고는 어딘가로 향하시는 알파님의 모습을 보고는 저는 직감 했습니다. 아. 소문의 그분에게 가시는구나. 하고요. 그리고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소문이 진짜일까, 딱봐도 진짜인것 같긴 한데 궁금하잖아요!

게다가 저는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견습사제인지라 아직 신전을 벗어나도 큰 탈이 없었거든요. 청소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대걸레를 곱게 수도꼭지 옆에 놓고 저는 알파님을 따라 거울세계의 통로를 걸었습니다. 얼마 안되는 시간동안 길을 따라 걸은 것 같았는데 금새 헤네시스에 도착했어요. 신전의 시간은 분명 새벽이었지만 헤네시스는 벌써 해가 중천 조금 안되게 걸려있었고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기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죠. 저는 몇발자국 성큼성큼 걷다가 멈춰서서는 심호흡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길을 걷는 알파님의 뒤를 살금살금 쫒아갔습니다.

헤네시스의 사람들은 알파님을 보곤 다들 인사를 했어요. 왠지 익숙해보여서 마음이 설렜습니다. 꼭 증거를 발견한 탐정의 마음 같았죠.
여담으로, 처음으로 가본 헤네시스에 대한 소감을 말하자면 아마 버섯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천국같은 장소라는 겁니다. 그 외엔 그냥 정말 평범한 마을 같았어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빨래를 널고 아이들이 모여 숙제하고, 저쪽에선 부부싸움도 하고, 여자애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소곤거리며 지나갔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광경이 마냥 재밌어서 기웃기웃 쳐다보다가 알파님을 몇번이고 놓칠 뻔 했습니다.
만약 알파님이 길을 걷다가 몇번이나 멈춰서서 하늘 봤다가 땅 봤다가 누가봐도 괜히 해보는게 분명한 꽃잎세기를 했다가 집을 봤다가 하며 시간을 끌지 않으셨다면 전 분명히 놓쳤을 거에요. 다행이긴 했지만 소문의 그분을 만나겠다는 걸까 아닌걸까 속이 터져 죽을것 같았습니다. 이러다 점심이 지나고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건 아닐까 불안한 생각이 들 무렵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그분이 보였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분은 마치 헤네시스에서 오랫동안 살아온것마냥 마을 풍경에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요. 알파님이 좋아하시는게 분명한 프리드님 말입니다. 갈색 긴 머리에 초록색 눈이라고 해서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평범하신 모습이었죠.
왠지 목이 탔습니다. 옛날 리프레에서 있었던 일 중 알파님께서 프리드님께 감 하날 건네주시며 배고프지? 목마르지? 이거 먹어. 하는 해괴한 말을 하셨고 프리드님께선 해맑게 웃으시며 그 감 덜익었다 말하셨다던 전설같은 이야기는 저희 신관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돌았거든요.
근데 이런 알파님의 모습을 보니 진짜같습니다.
여튼 프리드님께서는 노란버섯지붕 집 앞에 앉아 아이들에게 무언갈 이야기 해주고계셨어요. 저도 궁금했기에 숨어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모험얘기가 아닐까요? 아이들은 그런 이야길 좋아하고 프리드님 께서도 모험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대에 차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는데,

그래서 내 생각엔 용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뉘지만 더 자세하게 파고들면 그 종류중에서도 몇가지 특징을 잡아 또 분류를 해볼 수 있을것 같은데...

? 제가 제대로 들은게 맞는걸까 싶어서 계속 들었더니

....그중에서도 가장 우리와 말이 잘 통하는건 오닉스 드래곤이야. 쉽게 알 수 있어. 그아이들에겐 문양이 있거든. 무엇보다 특징이 뚜렷한....

알아들을 수 없는 용 이야기를 하시는 프리드님의 눈이 멀리서 보기에도 반짝반짝 빛나는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알파님. 알파님은 그자리에 딱 멈춰서서는 움직일줄을 모르셨어요. 왜죠. 좀 움직이세요.
제 다리가 저릿저릿 해와 온몸을 비비 꼬고 구름 속에서 몸을 절반쯤 숨겼던 해가 구름을 빠져나와 온전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을때 프리드님이 머리카락이 갈색 빛으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알파님, 좀 움직여 보세요. 초월자 아니십니까. 아마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광경입니다. 알파님은 프리드님을 보고계시고 저는 숨어서 두분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프리드님께서 눈이 부셨는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셨습니다.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다 알파님을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손짓했습니다. 아이들도 동시에 뒤를 돌아봤는데 눈빛이 딱 아 또 저 사람이네 하는 눈빛이었죠.
알파님은 쭈뼛쭈뼛 어설픈 걸음을 옮겨 프리드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저분이 과연 제가 모시는 초월자분이 맞을까요. 아니 분명 베타님과 함께 메이플 월드로 향하실때는 그처럼 늠름하고 강인해보일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처음 초월자 분들을 뵈었을때 두분의 강렬한 붉은 옷은 시선을 잡아끌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하며 당당한 걸음걸이까지. 한눈에 보기에서 아 저분이 내가 모시게 될 초월자 분이시구나 싶을 정도로 두분께서는 빛이 났습니다. 알파님이 새로 뽑힌 사제(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들을 보며 잘 부탁한다 말씀하셨을 때가 제 인생 최고의 순간중 하나인걸요.
그때는 마치 금빛으로 빛나는 날개를 본 듯도 했고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바로 눈 앞에서 마주한것 같기도 했습니다. 평생 두분을 모시겠다고 맹세한것을 후회할 일은 결코 없을거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절대 후회 안해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거야? 나 부르지."
"조금전에 왔어. 막 부르려던 참이었다고."

저 거짓말쟁이! 저분 거짓말합니다! 제가 다리 저릿저릿할때까지, 코에 침발라도 소용없을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요?! 프리드님은 그 말을 듣곤 웃으시며 오늘은 안오나 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뵌 분이지만 프리드님의 웃음이 특히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는 사람이 편안하게 느껴지게끔 하는 웃음이었어요. 알파님은 뭐라 작게 말하며 흘끔 프리드님의 눈치를 보셨습니다. 그리곤 괜시리 헛기침을 하셨죠. 프리드님과 알파님, 두분께서 나란히 앉아계시는 광경은 꼭 어떤 풍경화의 그림같았어요. 프리드님은 다시금 어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이야기는 변해 이젠 마냥 용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모험이야기도 드문드문 하시는 듯 했습니다.) 알파님은 프리드님의 옆에서 프리드님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가끔씩 뭐라 딴지를 걸기도 하시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도 아이들을 향해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다리를 콩콩 두드리며 두분을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혼나지만 않는다면 저도 두분 앞의 아이들 사이에 끼고싶었는데 말예요. 아마 그랬다간 이제 별로 어리지도 않은게 징그럽다고 알파님께 딱밤을 맞지 않을까요?
소문대로 였습니다. 알파님은 분명 프리드님을 좋아하고 계시는게 확실해요.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 이젠 마냥 답답하거나 하지 않고 두분이 지금 이대로 천천히 지내셔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두분은 가장 어울리는 형태로, 두분만의 방식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시니까요.

 

to 솦님

 


(수첩 위에 조악하게 쓰여진 글. 수첩은 군데군데 물에 젖은 자국과 음식물 국물자국이 남아있다.)

.......저는 에레브에 잠시 들린 차였습니다. 마악 2차 전직을 끝내고 들떠 엘리넬로 떠난지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엘리넬에서의 소동을 마무리짓고 어린 요정들에게 영웅이라 불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입 노블레스도 볼 겸 나인하트님께 임무 보고도 드릴겸 겸사겸사 왔단 말입니다.

 물론 나인하트님께 혼이 났죠. 연락책을 사용하면 될것을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 직접 왔느냐고요. 엘리넬에서의 일이 끝났다면 분명 골드비치로부터 초대장이 왔을텐데 가라는 골드비치는 안가고(나인하트님은 어떻게 이런것까지 알고 계시는걸까.) 왜 굳이 에레브를 왔냐 단단히 혼이 날 뻔 했습니다. 왜 혼이 날 뻔 했느냐, 저는 자랑스런 스트라이커! 존경하는 기사단장 호크아이님에게 배운 민첩성으로 나인하트님의 불호령을 눈치껏 피하는 스킬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도망쳤습니다. 도망쳤을 뿐이에요. 암요.

그리고 도망치는 길에.. 맞아요.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샜지. 제가 이걸 쓰기 시작한 이유가 있었는데 말예요.
저는 도망을 치다 더이상 할것도 없고 해서 비행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비행장으로 가는 길엔 워낙 나무가 많지만 유독 큰 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그 근처를 지나가며 서러워서 레벨업이나 해야지 3차나 해야 간신히 에레브에 발 붙일 수 있겠네. 이런식으로 중얼거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냥 지나쳐버릴뻔 했지만, 그 나무 아래에는 익숙한 인영이 있었습니다.

전직할 당시 촐싹거리는 호크아이님, 아니 솔직히 좀 까불거리시지 말입니다. 그러다 바람의 기사단장님께 혼나는걸 제가 몇번을 봤는지 몰라요. 어쨌든 그런 호크아이님 옆에서 조용히 검을 손질하고 계셨던 그분. 빛의 기사단장 미하일 님이라 들었습니다. 언제나 여제님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여제님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기사단장님이라고도, 나인하트님과 미하일님이 여제님의 오른팔 왼팔과 같다고도요.
그분은 호크아이님과는 다른 의미로 사람의 시선을 잡아놓으시는 분이었어요.
그분을 보면서 기사단장님들은 각기 자신이 이끄는 기사단 이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가만히 앉아계시기만 해도 은은한 빛이 스며나오는 듯 하니까요. 입고계시는 은빛 갑주때문에 그런가? 아니며 샛노란 금색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보여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닥 꾸미지 않으셨는데도 말예요. (호크아이님을 보세요. 천지차입니다. 당장 해적모자만 봐도 호크아이님이 얼마나 폼나는 스타일에 신경을 쓰시는지 알 수 있죠.) 그 당시에 그분은 간단한 사복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투구도 쓰시지 않은 채였습니다. 늘 보던 은빛 갑주와 인상깊다고 생각했던 투구조차 쓰시지 않았었죠. 늘 보던 익숙한 모습이 아닌지라 더더욱 알아보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시선이 어쩌다 보니 그곳으로 향했기에 그분임을 알 수 있었던거죠.
 가벼운 옷차림이 신기하기도 했고, 일단 남자의 로망이 전사 아니겠습니까?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로망인 그분께 인사라도 드릴까 싶었는데, 쉬이 다가가지 못할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거 있잖아요. 뭐지. 아... 마치 보이지 않는 줄같은게 쳐진 그런거. 결계? 아 그건 아닌데... 그런 느낌이요. 그쪽과 이쪽은 숨쉬는 공기조차 다른 그런 느낌 말입니다. 미풍이 불었습니다. 그분은 나무 그늘 아래 서 계셨는데도 겹쳐진 잎 틈새로 쏟아지는 빛이 그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그 움직임에 따라 드문드문 그분의 머리카락이 빛났습니다.
은은하게. 말 그대로요. 전사라면 그 이름과 직업대로 잔뼈가 굵고 살갖마져 고행에 갈라져 상당히 인상이 험악해지거나 최소한 밥은 먹고다니나. 그런 생각이라도 들게 마련이건만, 그분은 만약 얼핏 스치듯이 본다면 어느 평화로운 마을에서(에레브 만큼이나요!) 아이들을 위해 책을 쓰거나, 마을 청소를 하거나 꽃집 청년이거나.. 어쨌든 험한 일은 하시지 않을 분처럼 보였지요. 굉장히 신기한것이 그렇게 샌님같아 (약해보이지는 않지만)보이면서도 위풍당당한 분위기였단 말입니다. 단단하고, 남자답고, 우러러 보게되는 그런것 말예요. 늘상 무언가를 보고계시면 그곳에 옳은 길이 있다. 정답이 있다. 그런 신뢰를 주시는 분이었지요.
그리고 그런 그분은 미동없이 그 자리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시다 살짝 고개를 움직인 듯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섰습니다.
솔직히 설렜어요. 그런 남자의 로망인 분이 제 기척을 눈치채시고 말을 걸어줄 것이라 생각하면 당연 얼어붙죠. 그러나, 그분은 저를 눈치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 쪽을 보신 것이 아니라 나무 위쪽을 보셨어요. 약간 고개를 올려 무언가로 시선을 두시고는 입을 움직이셨습니다. 말은 들리지 않았어요. 그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거든요. 그냥 아 말을 하시는구나 정도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드문드문 말은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중간에 표정을 찡그리기도 하셨고,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표정을 허물어트리기도 하셨고, 특유의 무표정 또한. 표정이 워낙 다양하신 호크아이님 밑에 있다 기사단원 사이에 목각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퍼진 미하일님의 다양한 표정을 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그날은 신기한 일이 많은 날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렇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즈음에 보이셨던 미소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제님 곁에 계실때나 저희 기사단원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실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로 뭐라 해야할까. 당연한듯 만약 제가 노블레스 시절부터 알고지낸 친구를 오랜만에 봤다면, 마치... 마치.... ....기사단장이 아니었다면 볼 수 있었을, 아마도, 미하일님 나이 또래의 청년들이 짓는 웃음처럼, 지금 그 순간만을 생각하는. 그래요. 미래가 아닌 다만 지금 그 순간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처럼 웃는 그런 웃음마냥. 나쁜 의미가 아닙니다. 아아 어휘력이 모자랍니다. 이것저것 끄적거릴 수 있는 마법사가 부럽습니다. 여하튼 그때의 미하일님은 온전히 그 순간에 계신 것 같았습니다. 평범한 청년처럼요. 아주 잠깐 스친 웃음이었지만 왠지 순식간에 그분의 중요한 부분을 훔쳐본 기분이라 퍼뜩 정신이 들어 단숨에 비행장까지 달려가고 말았습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손이 덜덜 떨리는 나머지 실수로 빅토리아 아일랜드로 가야하는것을 오르비스행 표를 끊었습니다.

아.... 내 메소......

시간이 남아 배낭 구석에 놓아두었던 수첩을 찾아 지금 이렇게 기록을 하면서도 계속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분은 무엇을 보고 계셨던 걸까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계셨다면 과연 누구였을까.
잊혀지지 않는 풍경과 함께, 궁금한것은 점점 많아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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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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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헌-후회의 길

개인작 2014. 12. 7. 03:07

 

후회의길 - 추억의 길 - 바람에 스치는 저녁날 -  순백

(브금 순서)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눈 앞에 흐드러지도록 보이는 입김을 동반했다. 추억의 길 저편에서부터 느껴진 냉기는 갑작스러울 정도로 온 몸을 휘감았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 곁에 몸을 붙였다. 재규어는 그 큰 눈동자를 위로 굴려 자신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재규어에게 말을 붙였다. 춥지? 그의 말에 재규어는 스스로 그에게 몸을 조금 붙였다. 그는 재규어에게서 눈을 돌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추억의 길과 다름없이 큰 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넓은 돔과 함께 앞으로 뻗어나가는 큰 기둥이 자신에게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지난 길과는 다른 의미로 떼어내기 힘든 한걸음을 옮겼다.

시간의 신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심지어 막 사탕을 빨며 간신히 말을 배웠을 법 한 어린 아이도 신전 안에 총총거리는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시간의 신전은 사람들을 삼킨다. 모험가들 사이에 공공연히 떠도는 말이었다. 그 누구나가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누구나가 여신이 있는 곳까지 당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신전을 찾는 이는 언제나 드물었다. 그는 형을 잃었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비가 오고 쇳소리가 천둥처럼 몰아치던 그날 형은 자신의 앞에서 숨을 거두었고, 유품과 시신은 자신이 아닌 시그너스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자신에게 형의 마지막이 넘어와 보아야 자신은 무엇을 해야 했을지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며칠을 형의 시신 앞에서 재규어와 함께 깊은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형의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에 사람들이 달려올 때까지, 줄곧. 그는 가끔가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쓸데없는 상념이었다. 형은 살아있었던 그 순간부터 죽고 없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쓸데없는 상념만을 주었다. 상념, 상념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쓸모있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후회의 길은 추웠다. 기둥에 붙어있는 얼음에는 자신이 투명할 정도로 잘 비추었다. 덜덜 떨리는 몸은 재규어의 온기를 원해 자신도 모르게 재규어의 곁으로 조금 더 몸을 붙였다. 재규어는 왜 그러냐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순백의 털이 부드러운 미풍을 받아 가볍게 흔들렸다. 그도 조금 의아해졌다. 춥지 않아? 재규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울, 얼음들은 마치 거울같았다. 후회의 길은 얼음으로 감싸여 있었다. 신전의 천장에도, 구석에도, 앞서 펼쳐진 길에도, 그의 옆에 우두커니 서있는 기둥에도 얼음이 선명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얼음은 투명하게 그 속을 드러내면서도 아주 선명히 현재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덩치 큰 흰 재규어에 기대어 덜덜 떨고 있는 한 남자. 그게 현재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자신은 어떠했었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신말 밑창과 바닥 사이에 끊임없는 서리가 끼었다. 나란히 걷던 재규어의 곁에서 점점 멀어졌다. 몸이 뻣뻣히 얼어갔다. 겨울날이면 흔히 느끼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혹시나 몰라 바지춤에 걸쳐져 있던 석궁을 다잡았다. 곱은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한참을 애먹었다.

시간의 신전은 사람들을 삼킨다. 그럼에도 신전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관리인을 봤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라. 신전은 노을빛이야. 큰 문은 세 개로 이루어져 있어. 믿어져? 나 그 문중 하나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과거의 문이라고 해. 그 안엔 뭐가 있는데? -숲 같은 신록? 표현할 수 없어. 하지만 아름다웠어. 옛 생각을 나게 했어. 동료들은 각자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다. 아주 어릴 적 망가진 기계 부품을 장난감 삼아 놀던 시절부터 막 페르디 교장 선생님의 스카웃을 받아 마을 일손을 돕던 일들과 전직 교관들을 앞에 두고 한없이 쪼그라들던 일, 그곳은 숲이야. 추억이 도란도란 햇살을 타고 오지.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의 얼굴은 웃음으로 빛났다. 그가 신록의 틈 사이에서 본 것은 형과의 추억이었다. 그는 신전의 길을 재규어와 마치 산보를 하듯 걸었다. 곳곳에 피어난 이름 모을 녹빛의 식물들은 얼핏 보기에는 이전 집 근처에서 볼 수 있었던 잡초들을 닮았다 생각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앞서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흙 묻는다는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앞마당의 풀밭 위에서 뒹굴거리다가 부엌 창문 너머로 높은 목소리의 꾸중이 들려오면 벌떡 일어나 뒷마당을 향해 도망쳤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며 따라오는 사람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면서 익숙한 길을 걸었다. 밟는 흙은 부드러웠다. 자신과 가족들이 사는 헤네시스 전경은 비가 오는 날이 거의 없이 언제나 햇살이 밝게 비추었다. 어머니가 빨래 널기 좋은 날씨라 말하는 것은 하루의 일과와도 같았다. 멀찍이서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리는 표식과도 같았다. 그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형의 소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 형이 있었다. 풀 숲 사이로 본 형의 모습은 언제나 올곧았다. 꼿꼿하게 뻗은 등은 절대 구부러질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형의 갈색 머리카락 마저도 부러웠다. 나는 색 없이 밋밋한데. 가끔씩은 동네 애들이 우유같다고 놀리기도 했다. 물론 흠씬 때려줬다. 형은 떨어져 있는 화살을 주워 시위를 매기었다. 길고 단단하게, 활은 유연하게 구부러졌다. 시위는 끊어질 듯 한 긴장감을 품고 한계까지 늘어났다가, 단숨에. 화살은 바람을 타고 아주 당연한 듯이 과녁의 한복판에 꽂혔다. 뭐해? 홀린 듯이 과녁을 바라보고 있던 자신의 머리 위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결에서 깨어난 듯 자신은 형을 올려다 보며 웃었다. 형은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망쳐왔구나? 할 일 없으면 자세교정이나 할까? 뒤이어 자신의 투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자세교정만 해야 하는 거야. 나도 활 좀 잡아보고 싶다고. 무엇이든 처음 버릇이 중요한거야. 몸에 익으면 바꾸기 힘들어. 볼을 부풀린 자신을 보며 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큰 손이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다음번에는 활을 잡아보자. 오늘까지만 자세교정 하는 거야. 알겠지? 형의 웃음에 그 또한 웃어보였다. 형이 웃으면 그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냥 기뻤으니까.

추억의 길은 그 이름답게 추억이라 부를만한 아름다운 기억만을 투영했다. 그는 눈을 비볐다. 기둥뒤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그의 모습과 형이 모습이 보인듯한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한가. 그의 중얼거림에 재규어는 말없이 꼬리로 그를 두어번 툭툭 쳤다. 알았어 정신 차릴게. 마치 언제나 밝게 비추었던 집 근처의 햇살처럼 따스한 추억의 길을 걸으며 그는 그리운 기억을 오랜만에 맞이했다. 밑으로 밟히는 신록의 풀은 마치 흙처럼 부드럽게 자신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형과의 추억이 영원할 것처럼 당연하게 이어지던 그 시절처럼.

과거는 지나갔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얼어붙은 현재였다. 사람들의 말은 후회의 길에서 멈추었다. 추억의 길 너머에 뭐가 있는데? 모르겠어. 그 전에 멈췄거든. 그곳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아니 그 이전에 그곳에 들어가본 사람이 있기는 해? 나는 멈췄어. 그곳은 너무 추워. 나는 별로 춥지는 않았어. 하지만 들어가보고 싶지도 않았어. 다른 사람들이 말하더라. 그곳은 여신의 슬픔이 얼어붙어 있는 곳이라고.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후회의 길이 그렇게 불리었다. 후회의 길이라는 말조차 누가 그렇게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입에서 입으로 그곳은 추억의 길, 그곳은 후회의 길이라는 말이 전해져와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하며 받아들일 뿐이었다. 눈을 감은 여신은 꿈속에서조차 그 사랑스러운 눈길을 추억의 길에 던진다고 했다. 여신의 사랑을 받아 추억의 길은 가장 아름답던 시절만을 비춘다는 말이 있었다. 무한한 시간에 가까운 여신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것은 모든 것을 앗아갈 그 손길답게 망각이었으나 여신의 눈길이 지나간것에 불과한 추억에 닿아 그 부질없는 허망함이 여신의 슬픔을 만들었고 그것이 얼어붙어 후회의 길을 만들었다는 거짓말과 동화의 중간쯤인 이야기가 마치 진실인 것마냥 사람들 사이에서 형태를 달리해 돌고 돌았다. 그 누구도 진실을 몰랐다. 후회의 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세다리 건너서도 만나기 힘들었으며 어딜 가나 신전에 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 뿐이었다. 후회의 길은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그 무엇에도 진실은 없었다. 시간의 신전 안에 들어오기 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후회의 길에 대하여 묻고 또 물었지만 얻은 대답중 지금 자신이 걷고있는 후회의 길과 일치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고. 이곳은 여신의 슬픔따위가 얼어있는 곳이 아니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먹물들이 별 같잖은 의미를 부여하여 시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눈에는 마치 영안실 같이 비추었다. 곳곳이 시체더미였다. 그는 얼음에 비춘 자신을 보다 얼음 속의 무언가를 보았다. 그러자 전체가 보였다. 얼음속에 가지각색으로 잠들어 있는 것은 사람들의 추억이었다. 신록은 사람들의 추억을 꽃피웠다. 가장 아름답던 그 시절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후회의 길은 가장 미련이 남던 시간을 형태로 보여주었다.

그는 그제사 자리에 멈추었다. 얼어붙은 길은 지나온 길과 같이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과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달랐다. 얼음속에 갖힌 사람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으나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웃고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음이었다. 제각각 찡그리거나 허물어지거나 울고있는 표정이 있었지만 격렬한 감정을 동반한 얼굴 이외의 다른 것이 없었다. 그는 발을 덮는 냉기를 느꼈다. 눈을 깜박였다. 얼어붙은 기둥 사이를 넘어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꺼지라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그는 고개를 돌려 외침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이상하지. 그 아름다웠던 시절의 기억은 까마득하게도 언제 내 기억속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생각없이 지나쳤던 기억은 지금에 와서야 마치 기억이 현실을 차지할것마냥 다가왔다. 그는 그의 형에게 표독스럽게 외치고 있었다. 배신자. 그는 보았다. 형의 넓은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하는 것을. 그는 형을 뒤로하고 재규어와 함께 걸어갔다. 남겨진 형은 하염없이 그의 뒤를 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과거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과거의 그가 완전히 그 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야 형은 뒤를 돌았다. 그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형은 웃고 있었다. 눈가가 발게질 정도로 기쁘게 웃고있어 그는 숨이 막혔다. 간신히 뱉어낸 숨에 서리가 끼었다. 시선을 돌려 앞을 향했다. 갈길이 급하다. 그러나 목표를 잃어가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재규어는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 보았다. 재규어의 시선이 그의 발치를 향했다. 발을 묶은 얼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이상하게도 얼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휘청이며 걸었다. 느린 걸음의 그를 과거의 자신이 앞서걸었다. 시선을 두지 않으려 해도 후회는 그의 현재를 빼앗아갔다.

 왜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어? 왜 나를 버렸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사단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어? 그럴 리가 없지. 형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이 우선이었잖아. 안그래? 비아냥대는 자신의 얼굴에 주먹이 날아갈 법도 했으나 형의 손은 힘없이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왜 자꾸 나와 마주쳐. 다음번에는 걷지도 못하게 만들거야. 레지스탕스와 시그너스 기사단의 대립이 꽤 크게 일어났던 때였다. 그는 시그너스 기사단에게 악감정이 있었고 그것이 무너져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기사단은 아니었던 듯 했다. 그럴만도 하지. 이상을 품고있는 자들은 같은 적을 둔 단체에는 손도 제대로 대지 못하게 하는 룰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딱 봐도 강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막기에 급급했지 반격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그의 형도 그랬다. 그것은 억지였다. 기사단이 있는 곳에 형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형을 찾아간 것은 자신이었다. 정말로 만나기 싫었다면 다른 임무를 자원해서 빠져나갔어도 될 것이다. 그가 굳이 그의 형을 찾아간 이유는 그것이었다. 형을 상처입히고 싶었다. 지난 세월동안 자신이 형을 생각하며 한 원망을 형도 똑같이 하기를 바랬다.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는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원망이나 증오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형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바닥을 향에 떨어질 듯 시선을 내렸다.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느긋하게 감상했던 그는 언제나 이런 순간이면 미묘하게 쾌감을 느끼고는 했다. 지난 시간이 보상받는듯한 기분이었다. 재규어는 자신의 곁에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날은 재규어가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게 옳다고 생각해? 그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재규어를 쳐다보았다. 재규어는 노랗게 빛난는 눈으로 말끔히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은 없었다. 생각의 차이가 만드는 선택의 방향성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끊임없이 형을 상처입히는 방향이었다. 화해의 길은 분명히 존재했다. 형은 속죄를 원했으니 그것을 받아들여 각 단체의 수장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친선의 의미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선택이 그러했던 고로 형은 그에게 끊임없는 상처를 받았다. 무릎이 꿇릴 만도 한데, 그시절의 형의 등은 약간 구부러졌을 지언정 변앞없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의 가슴이 차가워졌다. 의미없는 불안이 그를 채웠다. 그것이 후회의 시작이었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이 감정이 정말 증오와 원망이 맞는 것일까. 자신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감정의 문제였다. 과연 증오와 원망, 미움, 배신감 같은 것이 어디서 탄생하는가? 아예 관계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치를 떠는 배신감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냥 엿먹어라 생각하면서 무시했겠지. 형을 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형을 무시했다. 못본척 하며 지나쳤다. 그러나 그것은 가면 갈수록 어떠한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냐면, 가장 근본적인 것. 가족애. 사랑이었다. 형을 사랑하고 믿지 않았다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형이 그날 와줄거라 믿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던 형을 향해 그렇게나 배신자라고 매도하면서 형을 원망하고 들끓는 증오를 끼얹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간과한 가장 큰 오차였다. 그는 자신이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저 미움뿐이 다라고 착각에 가까운 오만을 떨면서 생활의 일부분처럼 형을 생각했다. 그는 이제는 잘 떼어지지도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형의 표정이 보고싶었다. 기약없는 이별을 한 형의 과거를 억지로 들춰서라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 형의 얼굴은 허물어지지 않은채, 입술을 깨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올곧은 눈빛속에 꺼지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 감정은 사람을 일그러지게 한다. 왜곡된 이미지를 실제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크기로 형이 말했다. 그는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어쩌면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았더라면.

나는

그리고 형은 웃었다. 변함없는 그날처럼 형은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래도 널 사랑해. 그는 형에게서 돌아섰다. 형의 사랑에서 돌아선 것이다. 형도 그에게서 돌아섰다. 그러나 형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은 자신의 나름대로 그를 지킬 방법을 찾았다. 그가 모를 형태로, 그가 거부하지 않을 형태로, 때로는 그에게 폭언을 받으면서도 그게 그를 지킬 방법이라면 서슴없이 자신의 희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형은 믿었다. 그가 여전히 변함없이 자신의 동생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강인할 수 있었다. 그 믿음이 형을 만들었고 그를 지켜주었다. 형은 언제나 강했다. 그가 형을 앞서갔다고 믿었던 그 순간조차 형은 그보다 강했다. 언제나 그의 한발자국 앞에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형이었다. 그는 몸의 균형을 잡기 힘들어 신전의 벽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자신의 손 끝이 푸르게 얼어있음을.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시야였지만 얼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후회가 그를 잠기었다.

후회의 길은 특이점이었다. 추억과 망각사이를 묶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후회였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미련이라는 특이점으로 사람들의 기억을 묶어 놓고는 과거로 돌아갈 여지를 남겨놓았다. 그것이 후회의 본질이었으나 감정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나약한 것이 보통의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을 이기지 못한채 이곳에서 잠드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감기어오는 눈을 억지로 떴다. 무릎까지 절반쯤 얼어 있었다. 재규어는 당황하여 그의 몸을 밀어도 보고 그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보기도 했다. 발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그날 형과 자신의 모습이었다. 비가 내리는 어둑한 날이었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눈에 담기는 허름한 신발에 고개를 들었다. 그날의 형이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형의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실력 하나만큼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형의 상태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사 온전히 형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형의 눈은 안개가 낀 것마냥 희뿌옇게 바래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았음에도 형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으로 칼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난다. 얼음은 허벅지까지 올라왔다. 신전의 기둥과 그의 팔을 잇는 얼음은 팔꿈치를 삼켰다. 재규어가 애달프게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선인 것이 있었다. 빛바랜 추억속에 놓고 온 것을 찾아야 했다. 단 한번에 불과할지언정 듣고싶은 말이 있었다. 형은 웃었다. 분명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형의 사후에 동료라 불리우는 다른 기사단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기사단의 휴식 권고를 들은 것도 모자라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했다. 형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마저 그런 말을 했다고, 형의 건강을 앞서 생각했다고 했다. 또한 형의 건강이 도대체 언제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는지, 형은 잔병치레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잃은 그날 시작된 형의 병은 형을 끝끝내 삼키고 말았다. 그는 생각했다. 혹여 그 병이 나는 아니었을까. 내가 그를 죽인 것은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그를 삼키기 전에 얼른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바깥에서 형의 유품을 챙겨갈 것이냐는 말이 들어왔다. 그는 대답했다. 필요 없다고. 얼어붙어가는 그의 앞에 서있는 죽기 직전의 형은 그에게 낡은 펜던트를 건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그때 너를 놔두고 가서는 안되는 거였다고. 또한 웃었다. 펜던트처럼 낡아 빠지기는 했어도 그것이 펜던트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형이라는 것은 변함없이 그에게 웃으며 더 이상은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듯 입모양으로 말했다. 기억을 몇 번 되짚어 보아도 생각나지 않던 것이 형태를 갖추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형이 그에게 소리없이 전했다.

사랑한다.

직후, 형은 빈 나무토막마냥 그에게로 쓰러졌고 그림자와 같이 사라졌다. 재규어는 제 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냉기에 얼어붙듯 사라지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는 얼굴을 있는 데로 찡그리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것은 얼음이 허리를 타고 올라와서도, 어깨를 넘어 심장 근처까지 다가와서도 아니었다. 이지경이 되도록 자신이 형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형은 언제나 그에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그도 형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형이 죽은 지금은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것이 그의 후회의 본질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떨어진 바닥에 얼음이 피어났다. 미련은 그를 삼켰고 후회는 그를 덮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눈물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새로 생긴 얼음덩어리를 향해 구슬프게 우는 재규어 한 마리뿐이었다.

 

 

 

 

과제해야지ㅎㅎ..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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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주산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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