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도리야 이즈쿠는 몸이 아팠다. 원인은 모른다. 태어났을 당시의 몸무게는 3.15kg으로 또래보다 적당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게였다. 성장 과정은 평탄했다. 지금 미도리야 일가의 가족 앨범을 들여다보면 외아들 미도리야가 활짝 웃고있는 가족 사진이 한가득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미도리야는 원인 모를 빈혈을 앓았다. 엄마. 나 머리가 아파. 모친은 단순한 두통이라고 생각했다. 수시로 아프다 칭얼거리는 아들과 함께 소아과를 찾아가도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어른이 먹는 진통제를 한 알 깨어 먹였다.
어느 날은 배가 아프다 했다. 하나 있는 아들이 혹시 관심을 끌기 위해 아프다 거짓말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았으나 하루 종일 화장실에 가서 나오지 않고, 나와보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모습을 보고 단숨에 의심은 사라졌다. 대학 병원으로 갔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모친은 조금 초조한 마음으로 원무과 앞 줄을 서서 기다렸다. 미도리야는 그동안 병원 로비의 의자에 앉아 벽걸이 TV에서 나오는 놀라운 세상 따위의 프로그램을 봤다.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미도리야에게 관심을 보였다. 꼬마야. 혼자 왔니? 미도리야는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말라는 모친의 신신당부를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엄마랑 같이 왔어요. 허둥지둥 지갑을 뒤지는 어머니를 손가락으로 가르키자 아주머니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차례를 기다리는데 한참이 걸렸다. 간신히 소아과 진료실로 들어섰더니 의사는 차트를 몇 번 성의없이 넘긴 후 미도리야의 셔츠를 걷어 올렸다. 차가운 청진기의 감촉에 미도리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도리야의 배를 문지른 후 똑같이 무성의한 말투로 채혈실로 가세요- 하고 말했다.
"엄마. 채혈이 뭐야?"
모친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곧 알게 되었다. 정말 펑펑 울었다. 그렇게 아프지 않았던 것 같지만 커다란 주사기 안에 피가 슬슬 고이는 모습은 어린아이에겐 충분히 공포였으므로. 솜으로 팔 안쪽을 문지르고 또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엑스레이를 찍고 시티촬영을 했다. 모친의 표정이 점점 안좋아졌다. 처음 보는 기계가 무서워 울먹울먹 울음을 삼키던 미도리야의 손을 꼭 붙잡고 모친은 저녁으로 좋아하는 가츠동을 사 주겠다 약속했다.
검사 결과를 찬찬히 훑던 의사는 미도리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모친과 나누었다.
이제 볼 일이 끝났다고 했다. 미도리야는 모친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가야."
의사가 미도리야를 불렀다. 내민 손에는 딸기맛 사탕이 놓여있다.
"뭐 해. 의사선생님이 주시는데. 받아야지."
"고맙습니다."
배꼽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꾸벅 인사했다. 딸기 맛보다 오렌지 맛이 더 좋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포장을 까지 않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저녁은 약속대로 가츠동이었다. 입 안으로 튀긴 고기를 집어넣는 아들을 가만 바라보던 어머니가 자신의 그릇 위에 놓여있는 고기조각 한 점을 아들의 그릇 위로 올려주었다. 많이 먹어.
가게의 조명은 전구가 나가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었고 날이 저물어 주인 아저씨가 응원하는 구단의 야구 경기가 낡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미도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 컵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엄마. 물."
모친은 한참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다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모친은 눈물이 많았다. 결혼 비디오에서도 한참 주례사가 주례를 읊을 때 울음을 터트리셨으니까. 기뻐서 흘리는 눈물, 놀라서 흘리는 눈물, 슬퍼서 흘리는 눈물, 행복해서 흘리는 눈물, 가지각색의 눈물이 있다고 늘상 말 하셨다.
어두워진 바깥의 가로등이 켜졌다. 미도리야는 소스에 비빈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집어넣으며 보챘다. 아빠 오겠다. 엄마. 우리 빨리 먹고 가자. 모친은 티슈곽에서 싸구려 휴지를 뜯어 눈물을 훔쳤다. 그래. 아빠 보러 가자.
모친이 계산대 앞에 서 낡은 동전 몇 개를 올려 놓았다. 미도리야는 듬성듬성 스티커가 붙은 가게 문 너머로 바깥을 구경했다. 미도리야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이가 노래를 불렀다. 제멋대로 가사를 붙인 가요의 흥겨운 곡조가 거리 위에 수런히 묻혔다.
*
약을 많이 먹었다. 모친이 약국에서 얻어온 봉투더미를 펼쳐 놓으며 열심히 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건강해진다고 말 했다. 미도리야는 아침, 점심, 저녁이 쓰여져 있는 봉투를 집어들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걸 전부 다 먹어야 해?"
"그럼."
모친은 종이 가방에서 갈색 병 하나와 하얀색 병 하나를 더 꺼냈다.
"여기 두 약도 먹어야 해. "
비타민이니까 꼭꼭 챙겨먹어야 한다. 이즈쿠. 미도리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알약을 먹는 것도 가루약을 먹는 것도 고역이었던 나이인지라 입 안에 물과 약을 한꺼번에 물었다가 몰래 화장실로 달려가 약을 토해내는 날이 꽤 있었다. 모친이 네 번째로 그 광경을 발견한 이후로 미도리야는 모친의 앞에서 약을 삼켜야 했다.
*
좋아하는 만화 주제가를 부르며 걸으면 한 곡이 끝나기 전 또래 아이가 살고있는 집에 도착했다. 이름은 바쿠고 카츠키. 동네의 골목대장이자 부모님들끼리 알고지내는 사이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까진 때로 미도리야가 노올자 불러내기도 했고, 바쿠고가 미도리야 집 초인종을 누르며 노올자 부르기도 했다.
자주 어울려 놀았다. 별 다른 것을 한 건 아니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던가, 몇 명 아이들을 더 모아 술래잡기를 하거나 아니면 주택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악당을 무찌른단 만화 영화 주인공 놀이를 했다. 키가 가장 작고 기가 약했던 미도리야는 항상 악당의 하수인A 역할을 맡았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미도리야가 쓰러진 것은 여름의 초입, 한참 기온이 올라갈 때 였지만 밤이 되면 춥다며 부모들이 자식에게 아직도 가디건을 입혀 밖으로 내보낼 무렵이었다. 미도리야는 초록색 후드티와 그 위에 조끼를 입고 나왔다. 비오듯이 땀을 흘리며 언제나처럼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바쿠고 원정대 구호를 외치고 다니던 미도리야는 일순 하늘이 핑글 도는 경험을 했다. 어라. 걸음을 멈추어섰다. 앞서가는 무리는 멈추지 않았다. 구호소리가 작아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나보다.
아스팔트 길에 잠깐 서 있다가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았다. 추웠다. 아직 해가 머리 위에서 쨍쨍 내리쬐고 있는데도 그랬다. 금새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 엄마아...
저절로 겁이 났다. 너무 춥고 무서워 몸이 덜덜 떨렸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 그러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돌고 땅이 돌고 내가 돌아는데 이젠 괜찮다? 눈을 껌벅이고 이상하다 생각한 미도리야가 친구들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 위로 머리를 찧었다. 기절.
.
..
...
"이즈쿠. 오늘 아침에 약 안 먹었니?"
"먹었어. 엄마."
"그럼 점심 약은?"
"..."
미도리야가 입을 다물었다.
"하얀 병에 있던 것도 안 먹었지?"
"..."
"대답해."
"안 먹었어."
"엄마가 먹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들어."
"약은 쓰단 말이야. 왜 나만 약을 먹어야 하는데? 다른 애들은 약 같은거 아플때만 먹는데. 나는 안 아파도 약을 먹잖아."
불만을 토로한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였다. 근데 엄마.
"왜 불을 껐어? 벌써 밤이야?"
정확한 원인을 의사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검사를 해 보았을 때 별다른 이상은 없고 비타민 수치만 조금 떨어져 있다고. 햇빛이 강해 블라인드로 가려놓았음에도 빛이 새어들어왔다.
그럼 제 아이가 왜 지금 눈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먹이라는 약 전부 먹였는데 왜 아픈거죠?
일시적인 실명 현상일 겁니다. 금방 돌아올 거에요.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 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나요?
가벼운 열사병일수도 있으니, 어머님 일단 진정을.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미도리야는 병실에서 홀로 눈을 깜박거리며 (아마도)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캄캄한 밤이네. 하나도 안 졸린데. 엄마 오면 불 켜달라고 해 봐야지.
*
몸 만한 노란 가방에는 아침 점심 약이 반드시 들어갔다. 모친은 미도리야가 등교를 하기 전 항상 물었다.
"이즈쿠. 학교에 가면?"
"아침 약을 먹는다."
"점심을 먹고?"
"점심 약을 먹는다."
"항상?"
"차 조심."
모친이 미도리야를 꼭 끌어안았다.
잘 다녀오렴. 미도리야도 모친을 마주 끌어안았다.
잘 다녀올게 엄마.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도리야는 학교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 하는 편이었다. 학기 초에 길을 걷다 난데없이 쓰러져 며칠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반 안에 들어오니 벌써 다들 짝을 지어 사이좋게 수다를 떨고 있더라. 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반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된 미도리야는 쭈뼛쭈뼛 빈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유일하게 신경을 써 주는 것은 반장 뿐이었다.
수업시간엔 전 날 챙겨오라는 준비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창피를 당하고 쉬는 시간엔 삼삼오오 모인 아이들 틈에 끼지 못해 외톨이 신세였다. 어수룩하게 학급 문고가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고르는 미도리야의 뒤에서 소꿉친구인 바쿠고가 미도리야의 이름을 길게 외쳤다.
"데-쿠. 또 쓰러져서 병원에 갔다왔냐? "
"카, 캇짱."
"넌 지인짜 약골이구나."
바쿠고의 주변에는 항상 또래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바쿠고는 언제나 재미난 것을 들고 학교에 등장했다. 사슴벌레, 나비 유충, 유리구슬, 하다못해 박음질이 잘못 된 신발까지(미도리야의 것이었다) 항상 당당하고 거침없는 바쿠고는 남자아이들에겐 우상이었고 여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마냥 악동짓만 하는 것은 또 아니라 보는 쪽지시험에서 항상 일 등, 중간평가에서도 전교에서 손에 꼽게 좋은 성적을 받았다. 선생님들이 바쿠고를 예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바쿠고의 모친은 항상 그런 말을 들었다. "카츠키가 말썽을 많이 피우기는 해도 참 착한 아이입니다."
반면에 미도리야의 모친은 이런 말을 들었다. "이즈쿠가 수업 진도를 따라오지 못 합니다, 수업에 필요한 준비를 잘 해오지 못해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주 오후 수업을 빠지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는걸.
다른 학년에서도 바쿠고가 있는 반에 이따금씩 놀러오곤 했다. 물론 같은 반인 미도리야가 있는 그 곳. 학기 초만 해도 언제 소꿉친구였나 미도리야를 무시하고 쌩쌩하게 패거리를 이끌고 재밋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던 바쿠고는 여름방학이 슬슬 다가올 무렵 학교의 모든 개구멍과 비밀스러운 창고를 정복했다.
"아. 심심해."
입술 위에 연필을 올리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바쿠고의 눈에 마침 가방 안에서 약을 꺼내는 미도리야가 들어왔다. 자리가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아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앞에 앉아 있었다.
"야. 데쿠." 바쿠고는 미도리야를 그 별명으로 불렀다.
"그거 뭐냐? 가방 안에 있는거."
미도리야가 점심 약을 꺼내다 말고 바쿠고를 돌아보았다.
"이,이거?"
"그럼 그거말고 또 뭐가 있는데."
"약이야. 병원에서 받은 약.
"쓰냐?"
"약이 쓰지..."
"줘 봐."
"어?"
바쿠고가 짖굳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줘 보라고.
괴롭힘을 당했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에게서 약봉지를 빼앗아 들어 뜯어냈다.
"하나, 둘, 셋, 넷, 우와. 너 무슨 약을 이렇게 먹냐?"
"돌려줘."
"이걸 다 먹는거야? 안 배불러?"
"돌려줘!"
미도리야가 소리를 질렀다. 약을 털며 이리저리 뒤져보던 바쿠고가 동작을 멈추고 제 앞의 소꿉친구를 노려보았다. 반 안이 조용해졌다. 알게모르게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바쿠고는 비죽 비뚠 웃음을 지었다.
"누가 안 돌려준데? 잠깐 보기만 한 거잖아."
"나 그거 먹어야 해. 돌려줘 캇짱."
"돌려줄게. 돌려 준다고."
손 끝에 약봉지를 달랑이며 말 하는 바쿠고는 말 내용과는 다르게 전혀 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미도리야가 낚아채듯이 손을 휘둘렀다.
어이쿠.
재미있는 놀이다. 바쿠고는 새로운 놀잇감을 찾았다. 우스꽝스레 몸의 중심이 기운 미도리야를 보고 바쿠고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는 거야 데쿠. 완전 꼴사납잖아! 바쿠고의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웃음을 터트렸다. 침묵을 폭소가 밀쳐내고 반 안을 가득 채운다. 바쿠고는 그래 그래 돌려줄게- 라고 발음을 길게 끌며 말 하더니 저벅저벅 아이들을 밀치고 창가에 섰다.
"나는 분명히 돌려줬다."
약봉지는 툭 떨어졌다. 창문 밖으로. 미도리야가 울상을 지었다. 단박에 교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뒷문을 따라 지독한 웃음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쫒아왔다.
약 봉지는 화단 안에 있었다. 다행이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하얗고 특유의 비린내를 가진, 우유였다. 미도리야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빈 우유곽을 쥔 손 두개가 창문 안으로 쏙 들어간다. 머리카락과 턱을 타고 우유가 뚝뚝 떨어졌다. 계단을 올라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모두 못 본 척 고갤 돌리고 제멋대로 떠들었다. 미도리야는 말 없이 자신의 의자에 앉으려 했다. 했는데.
"아악."
엉덩방아를 찧었다. 뒤를 돌아본다. 바쿠고가 모른척 교과서를 들어다보고있다. 어디서 픽, 하고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마."
미도리야가 울먹임을 담아 말했다.
"해지매애~"
누군가가 비아냥을 담아 미도리야의 말투를 따라했다. 미도리야가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삼키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야 데쿠."
바쿠고가 시침을 뚝 떼고 어른의 근엄한 말투를 따라했다.
"너 냄새나."
코를 싸쥔다. 미도리야는 교실을 뛰쳐나와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날 때 까지 학교 교정의 뒤편에서 쪼그리고 앉아 시간을 떼웠다.
바쿠고는 수업시간엔 아닌 척 미도리야의 머리 위로 지우개 가루를 던져댔고 쉬는 시간엔 책을 못 읽도록 일부러 뒤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허튼 짓을 했다. 그 때마다 미도리야는 비명과 울음을 꾹 삼키고 묵묵히 참아냈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바쿠고의 관심은 금새 식었다.
어느날 미도리야가 등교를 하자 바쿠고의 옆 자리에 있던 짝(쉽게 말해 똘마니)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쿠고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바쿠고. 데쿠 왔다 데쿠. 바쿠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도리야에게 시선을 주었다. 픽 고개를 다시 돌린다.
"아 재미없어."
괴롭힘은 그렇게 어이없이 끝났다.
"야 그보다 너네 집에 새 게임기가 들어왔다며. 나 그거 보러 가도 되냐?"
더 이상 아무도 미도리야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잘 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바쿠고와 미도리야의 집 방향이 같다는 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모친에게 부탁을 받았고 제 어머니에게도 신신당부를 들었다. 이즈쿠는 몸이 아프니 네가 꼭 가방을 들어주라고. 알게 뭐야. 내가 그딴걸 꼭 해야 해? 앞자리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저런 데쿠같은거. 미도리야는 노란색 가방 끈을 꼭 쥐고 느릿느릿하게 바쿠고의 뒤를 따랐다.
"야 데쿠. "
교정 문을 나서자마자 뒤를 돈다.
"으응?"
곧 묵직한 가방이 미도리야에게로 날라왔다.
"그거 네가 들어."
"하지만 이건 캇짱 가방인데."
"그래서."
"아니, 캇짱 건데 내가 왜."
"싫어?"
눈을 부라리며 말 하면 누가 싫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미도리야는 뒤엔 노란색 가방, 앞엔 빨간색 가방을 끌어안고 묵묵히 걸었다. 느리게 걸으면 길어야 이십 분 정도가 되는 거리였지만 언제나 곧바로 집으로 향하는 법이 없어서 한참 돌아가거나 멈춰서서 새 장난질을 기대하는 바쿠고를 기다려야했다.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집에 도착하기 한 블록 전에 자신의 가방을 맸다. 그리고 미도리야에게서 억지로 가방을 벗겨내어 그것도 자신이 들었다. 저 멀리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바쿠고와 미도리야를 발견한 모친은 언제나 우리 아들, 아들친구 카츠키 왔구나 하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바쿠고는 그 때마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깍듯이 인사했다. 이즈쿠의 모친이 과자와 함께 돌아갈 때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으라며 동전을 쥐어줬으니까.
"내일 보자."
바쿠고는 성의없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미도리야는 한참 바쿠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 캇짱이 날 괴롭혔어. 내 약을 버렸어. 여기 오기까지 내게 가방을 들게 했어.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미도리야는 그러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나마 대화하고 함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가 바쿠고 외에는 없었다. 모친이 말했다. 손 씻고 밥 먹으렴. 그리고 가끔씩은 카츠키 군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좀 하렴. 언제나 너를 챙겨주잖니. 모친의 애정어린 말을 들으며 미도리야는 꼼꼼히 손을 씻었다.
"알겠어. 엄마."
*
매미가 울었다. 여름방학을 잘 보내라는 담임선생님의 종례와 함께 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교실을 튀어나갔다.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숲이 가까이에 있어 그런지 공기가 습했다. 숲은 아이들의 좋은 놀이공간이었다. 자주 들어가 놀았다. 바쿠고는 말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그 미도리야도 엄마 몰래 놀이터를 빠져나와 바쿠고와 그 패거리의 뒤를 따라 돌아다녔다. 혼자 있는 것 보다는 나았다.
바쿠고 탐험대. 바쿠고는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어린 시절부터 특공대, 파워레인저, 기사단 등등 이름이 자주 바뀌었지만 맨 앞에 바쿠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변한 적이 없다. 미도리야는 나무 뿌리게 걸려 넘어질까 조심히 느릿하게 걸었다.
쉽게 숨이 찼다. 학교 체육시간에도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기는 커녕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피구를 했고, 그마저도 공이 세게 날아와 얼굴 한 가운데를 맞추어 코피가 멈추지 않았던 적 후엔 눈총을 받아 교단 위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헛발질 한 공을 주워달라 부탁을 받는 것이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미도리야는 중간에 멈추어서 숨을 골랐다. 언제나 그랬듯 아이들은 저만치 앞서나가있다.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미도리야는 땀을 닦았다. 깊게 들어왔다. 나가는 출구를 까딱하면 잃어버리고 한참을 해메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겁이 난다.
바쿠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미도리야가 점만큼 작아보였다. 쳇. 혀를 찬다.
왜 따라오고 난리야. 짜증나게.
심기가 불편한 바쿠고의 기색을 읽어낸 아이 하나가 바쿠고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왜."
"있잖아. 우리 숨바꼭질할래?"
"숨바꼭질?"
"응. 미도리야도 끼워서."
"너 제정신이냐? 저 데쿠를 왜 끼워."
"그러니까. 데쿠한테 술래를 하라고 하는거야. 그리고 우리는 도망치는 거지."
솔깃한 제안이었다. 곱씹던 바쿠고가 빙그레 웃었다.
"백을 셀 때 우리는 다른 곳에 가면 되는거잖아. "
"이번엔 숲을 나가 다른 곳을 탐험하자."
"쟤는 숲에 내버려두고."
부탁한다. 간곡한 어조의 미도리야 모친은 이미 기억 저편이었다. 바쿠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옳지 않은, 한 아이를 버려두는 작당모의다. 수작을 끝낸 바쿠고가 언제나처럼 미도리야의 별명을 불렀다. 길게, 발음을 끌면서.
*
95. 96. 97. 98. 99. 100.
찾는다!
미도리야가 꼭 감았던 눈을 떴다. 잔가지와 잎새가 무성해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둔 숲 속에서 오로지 혼자였다. 스산한 새 소리가 울려퍼졌다.
*
재미있었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숲 안에 들어선 바쿠고와 패거리들은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곤충 채집통에는 사마귀 몇 마리가 톱날을 도사리고 있었다.
맞다. 데쿠는? 누군가가 기억난 듯이 말을 꺼냈다.
에이. 갔겠지. 벌써 숲을 다 뒤져봤겠다. 포기하고 갔을걸.
맞아. 데쿠는 근성이 없어서 말이야. 몸이나 아프고.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거침없이 헐뜯는 말을 하며 걷던 바쿠고가 일순 말을 멈추었다. 말 끝이 힘을 잃고 기어들어간다. 카츠키 왜 그래? 뒤이어 이상한 기색을 느낀 아이들이 바쿠고를 따라왔다. 숲에 나무가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땅에도 잔뿌리와 잔가지들이 가득했지만 어린아이 무게 하나를 버틸 정도롤 굵지는 않았다. 곳곳에 뿌리가 부러진 흔적이 있다. 바쿠고는 찬찬히 걸었다.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고 짙어졌다. 어둠에 가까운 녹음이 눈 앞에 장막을 씌웠다. 머리 위에서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듯이 커졌다.
그리고 멈추었다.
미도리야가 있었다. 무성한 풀 숲 사이에. 정신을 잃은 채로.
우습게도 바쿠고는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이 언젠가 보았던 동화속의 새하얀 공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공주처럼 미도리야는 독 사과를 베어문 듯 죽은 것 처럼 누워 있었다. 숲에서 울 리 없는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사마귀 한 마리가 다른 개체의 목을 물어뜯는다. 아무도 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2.
미도리야 이즈쿠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구급차가 붉은 사이렌을 아프게 울리며 숲의 입구에서 멈추어 섰다. 때늦은 소란에 이웃 주민들이 무슨 일인가, 나와보았다.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다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몇 발자국씩 물러선 탓에 바쿠고 혼자서만 앞으로 나와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미도리야는 구조대원의 품에 안겨 구급차 안으로 들어갔다. 굵은 팔 틈으로 축 늘어져 달랑이는 손이 마치 연 같다고 바쿠고는 생각했다. 소식을 듣고 도착한 미도리야의 어머니가 아들을 확인하고 함께 구급차에 올라탔다. 구급 대원들은 미도리야를 발견한(함께 있었던) 아이들에게, 바쿠고에게 정확히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고, 몸이 약했던 아이가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 해 쓰러진 것으로 결론 내렸다.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틈 사이로 미도리야의 가는 팔목에 링거 바늘을 찌르는 모습이 보였다. 바쿠고는 저도 모르게 채집통을 꽉 움켜쥐었다. 차 문이 닫혔다. 구급차는 떠났다. 소란이 가시자 어른들은 손짓하며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놀이는 그렇게 끝났다.
바쿠고는 귀가길을 홀로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까르르 웃는 느낌이었다. 괜히 돌멩이를 걷어찼다. 집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밥을 먹지 않겠다 말 했다가 혼이 났다.
"너 좋아하는 매운 카레 해 놨잖아."
"안먹을래."
"안먹는다니.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몰라도 돼."
"얘 카츠키!"
"몰라도 된다니까!"
자꾸 생각이 났다. 인형처럼 쓰러져 있던 소꿉친구가.
*
미도리야가 쓰러진 일엔 놀라울 만큼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 몸이 약하던 아이가 이번에 기어코 병원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단 소리 뿐.
바쿠고는 곤충 채집통을 들고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멈춰 선 곳이 미도리야의 집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렸다. 앞을 빙글빙글 돌며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선 대답이 없다. 까치발을 뜨고 간신히 보이기나 할까 싶은 담을 넘어 훔쳐보는데 뒤에서 나직한 조언이 들려왔다.
"거기 아무도 없다." 바쿠고가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거기 아무도 없어. 애랑 애 엄마가 함께 병원에 갔거든."
허둥지둥 도망을 쳤다.
숲 입구, 공터에 친구들이 두엇 몰려 있었다. 친구들은 바쿠고가 어깨에 맨 곤충채집통을 보고 화색을 지었다.
"잡은 사마귀를 보자!"
몰려들어 채집통을 살피던 아이들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이상하네. 원래 한 마리가 모자랐었나?"
"싸움을 붙이자고 우리 머릿수대로 잡아온 거였잖아."
바쿠고가 채집통 안을 살펴보았다. 정말로 사마귀 한 마리가 모자랐다. 햇빛이 아프게 내리쬐었다.
"야. 재미 없다."
우리 곤충싸움 말고 다른거 하고 놀자. 친구들은 아쉬운 듯 잠깐 입맛을 다시더니 곧 수긍했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미도리야는 원체 아이들 틈에 섞이질 못했기 때문에. 숲을 걷다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점처럼 보이는 미도리야가 나무를 짚고 차근히 걸어올까. 어느샌가 버릇이 들었나보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어른들로부터 미도리야를 잘 돌보라 말 들었었으니까.
잔가지가 보삭보삭 부서진 흔적이 있다. 숨바꼭질이었다. 멀리서 24, 25, 26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곳을 찾던 바쿠고의 걸음이 느려졌다.
미도리야가 쓰러진 곳이다. 잠시 주저하다 풀 숲 사이로 들어갔다. 어색하게 가만히 서있다 슬며시 주저앉았다. 앉은 키만큼 자란 풀이 시야를 가린다. 위로 넓게 가지를 퍼트린 나무가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여름 햇살이 인사했다. 눈이 부셔 손으로 빛을 가렸다. 미도리야는 이 자리에 누워있었다. 단정하게. 동화속의 주인공처럼.
바람이 불었다. 풀을 스치고, 나무를 흔들고 바쿠고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았다.
아.
바쿠고는 비로소 숲의 색과 미도리야의 눈, 머리색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과도 같은 녹음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가늘고 바람에 속수무책 흔들리는 것이 누구를 닮았는지.
"찾았다."
나무 뿌리 위에서 그 새 쫒아온 친구가 바쿠고를 내려다보며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바쿠고는 친구를 멍하니 올려다보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벌써 찾았냐."
*
여름 방학기 끝날 때 까지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개학 후 학교에 와서 방학동안 지겹게도 보았던 친구들 얼굴을 다시 보고 뭐 할말이 그리도 많은지 시끄럽게 떠들다 조례 시작한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비로소 바르게 앉았다. 앞이 횡했다. 미도리야는 등교하지 않았다. 반장이 번쩍 손을 들고 말 했다. 선생님. 아직 미도리야가 오지 않았어요. 미도리야 군은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있어요. 걘 방학 내내 병원에 있었는데요. 바쿠고가 저도 모르게 볼멘 소리로 말을 했다. 선생님은 놀란 듯 바쿠고의 얼굴을 보다가 그래도 소꿉친구니 걱정하는 마음이 있겠지, 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앞자리는 텅 비어있었지만 달라진건 거의 없었다. 바쿠고는 쉬는 시간마다 떠들었다. 쪽지시험도, 단어시험도 완벽하게 보았다. 점심 시간에 반장이 교탁 앞에 서서 잠시 주목을 외치더니 병원에 입원한 클래스메이트를 위해 종이학을 접고 쾌유 메세지를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바쿠고는 심드렁히 그 거창하고 진부한 계획을 들었다.
일인당 다섯 장씩 색종이가 돌아왔다. 턱을 괴고 손바닥 만한 색종이를 만지작 거리던 바쿠고가 괜히 앞에 있는 미도리야의 의자를 신발로 꾹 밀었다. 하얀 편지지는 짜증이 났고 더군다나 부담스러웠다. 시험을 볼 때와는 다르게 머릿속이 새하얘서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사각사각 막힘없이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바쿠고와 함께 미도리야를 괴롭히던 놈들도 마찬가지로) 바쿠고 혼자 머리통을 부여잡고 끙끙대는 것이다. 반장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바쿠고는 슬그머니 편지지를 숨겼다. 나는 데쿠랑 집이 가까우니까, 알아서 전해줄게. 바쿠고를 바라보는 눈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 오후는 음악시간이었다. 가방과 책상을 탈탈 털어보고 나서야 바쿠고는 제가 리코더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교실 뒤편으로 나가있으라기에 터덜터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가서 반주를 따라 삑삑 연주해대는 급우들을 지켜보았다.
미도리야는 자주 이렇게 교실 뒤편에 서 있었다.
수학 시간에는 모형자, 과학 시간에는 스포이드, 미술 시간에는 크레파스, 음악 시간에는 리코더, 가끔씩은 교과서도 빼 놓고 안 들고왔다. 사실 시간표를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상 위에 얼굴을 박고 열심히 공부했다. 다들 5학년 수학책을 볼 때에 4학년 사칙연산 문제를 힘겹게 풀었으면서도, 그랬다.
나무재질의 마룻바닥을 실내화코로 쿡쿡 찍었다. 결국 전부 데쿠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
"카츠키. 엄마랑 같이 나갈거니까 준비해."
"아 왜?!"
바쿠고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병원에 갈거야!"
"병원엔 왜 가는데?"
"얘 좀 봐? 이즈쿠가 이제 중환자실에서 나왔으니까 문병 가야지."
"내가 그 데쿠 문병은 왜 가?"
"너 이즈쿠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데쿠를 데쿠라 하지 뭐라 해."
"이즈쿠라고 부르라니까."
"싫어."
리모컨으로 만화영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바쿠고가 툭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나 친구들이랑 놀거야."
"어딜 가."
"아 친구들이랑 놀거라니까! 약속했다고오!"
"다른 날에 놀자고 그래. 오늘 꼭 이즈쿠 만나러 가야 해."
바쿠고 모친의 의지는 강경했다. 그리고 바쿠고가 제 어머니를 이긴 적은 없었다. 모전자전이다.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바쿠고는 투덜투덜 거리면서 닌텐도 게임기를 들고 모친과 함께 택시에 탔다. 에어컨을 켰으니 창문을 닫아달라는 말에도 무시하고 창문을 열었다가 모친에게 꿀밤을 맞았다.
이미 스테이지를 전부 깬 게임이었다. 눈 감고 해도 깨겠네. 모친은 시험에서 일 등을 하면 게임팩을 사주겠단 약속을 했다가 탁상 가득히 쌓이는 게임팩과 비례해 점점 얇아지는 지갑을 보고 시험에서 전부 다 맞는 것으로 조건을 바꾸었다. 한참 뿅뿅 버튼을 누르다가 지루해져 택시 밖의 풍경을 보았다. 콘크리트와 벽돌로 이루어진 담이 길고 길게 이어지다가 트인 팔차선 도로가 나왔다. 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는건데?"
"대학병원이야."
"대학병원? "
"커다란 병원 말 하는 거야."
"왜 커다란 병원에 입원한거래."
"아프니까. 많이 아파서."
입을 다물었다.
택시는 십 분 정도 지나서 바쿠고 모자를 병원 입구에 내려주었다. 바쿠고는 먼저 내려 커다란 건물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정말 이게 전부 병원이란 말이야?
바쿠곤 병원과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 아픈 적이 드물었고 그 험한 장난을 치면서도 사고를 당한 적도 드물었다. 기껏해야 발목 몇 번 삐거나 살이 까졌지.
입구에서 자동문이 열렸다. 로비에 사람이 많다. 바쿠고의 모친은 능숙히 원무과에서 미도리야의 이름을 말하더니 아들의 뒷덜미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7층 714호. 바로 옆에 창백한 얼굴의 여고생이 환자복을 입은 채 함께 탔다. 바쿠고는 모친 곁으로 한 발자국 붙어섰다. 여학생은 6층에서 내렸다. 7층에 도착해 일부러 느릿느릿히 걸었다. 로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소독약 냄새가 훅 풍겼다. 얼굴을 찌푸린다. 낮임에도 복도는 조용했다. 가끔가다 산책을 하듯 돌아다니는 환자들과 이리저리 체크하며 움직이는 간호사들이 전부다. 모친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미도리야는 4인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서 책을 읽던 미도리야가 바쿠고를 발견하고 와락 웃었다. 세상에. 카츠키도 와 줬구나. 바쿠고는 어설프게 목례를 하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하얗고 반질거린다. 미도리야의 침대 옆 탁상에는 종이학과 편지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바쿠고는 그제서야 제 방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백지가 생각났다.
쭈뼛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할 말이 없다.
"캇짱."
미도리야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금 수학시간에 뭐 배워?"
"어, 분수."
미도리야는 수줍은 듯 손가락을 꼼질거린다.
"나 여기서 엄마가 수학 가르쳐주고 있거든. 이제 수학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냐."
"저기 음악 시간에는?"
"리코더."
"아직 부는 방법 잘 모르는데."
"바보냐? 아직도 몰라?"
바쿠고의 모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츠키! 말 곱게 써야지!"
"아니 얘가 바보지. 아직까지 리코더 부는 방법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어디있어? 유치원 애들도 다 안다고."
미도리야가 어설프게 웃었다.
"병실에서는 리코더를 불 수가 없어서.. 시끄럽다고 싫어하시거든. "
침대 옆에 쌓여있는 교과서를 보고 바쿠고가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도 공부를 하냐? 기껏 학교에서 나왔으면 그냥 놀아."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였다.
"난 공부하고 싶은데."
"공부가 좋아?"
살풋 고개를 젓는다.
"학교에서 창피한게 싫어."
할 말은 금방 동이 났다. 바쿠고의 어머니와 미도리야의 어머니는 수다 삼매경이다. 별 것 아닌 말에도 시도때도 없이 웃었다. 바쿠고 모친의 입에서 나오는 말 대부분은 아들을 놀리는 내용 뿐이었지만. 아, 바쿠고가 짜증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서 병실을 나갔다. 미도리야는 침대 위에서 바쿠고의 뒷모습을 쫓았다.
복도에 나왔으나 재미있어 뵈는건 없다. 바쿠고가 속으로 한탄했다. 더럽게 재미없네 진짜. 왜 끌고온거야. 이딴 곳. 낮설고 조용해서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도 싫었다. 분명히 놀릴테니까.
복도를 걸었다. 병실 대부분은 호수 밑에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네 개가 가장 많았고 여섯 개도 많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놓여있는 휠체어를 타 보고 환자들이 하는 것 처럼 바퀴를 손으로 굴렸다가 지나가는 간호사에게 걸려 혼났다. 재빨리 자리를 도망쳐 불이 깜박이는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병실이 있다. 이름표 자리는 네 개였으나 이름은 한 개였다. 문이 비스듬이 열려있었다. 호기심이 들었다. 바쿠고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낮이었음에도 창문을 온통 블라인드로 가려놓아 병실 안이 어두컴컴했다. 왜 불을 안 켜지. 탁하고 찝찝한 냄새가 났다. 지하 창고에 들어가면 나던 그런 냄새.
TV가 켜져 있었다. 낚시 채널인듯 하였다. 그마저도 전파가 지지직거려 화면이 일그러져 보인다. 주저하면서도 병실 안에 발을 디뎠다. 침대 하나는 비어 있었고 한 침대엔 노인이 누워있었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딸국질이 났다.
노인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바쿠고를 지긋이 쳐다보고 손짓했다. 바쿠고가 도리질쳤다. 빠진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얼굴에 있는 검버섯이 꿈틀거린다. 본능적인, 꺼려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노인이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가, 아가. 이거 먹을텨?"
노인의 침대 옆 탁자에는 검게 변한 바나나가 있었다. 바쿠고가 대답을 망설이자 노인이 손을 뻗어 바쿠고의 팔목을 잡았다. 덥썩. 깜짝 놀라 뿌리치려 했지만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노인은 생명줄을 붙잡듯 바쿠고의 손목을 잡았다.
"나도 너만한 손자가 있단다. 그런데 병원에 오질 않네."
"이거 놔요."
낑낑거리며 손목을 비틀었다.
"내가 얼마나 예뻐했는데. 다 죽어가니 오지도 않는구나. 너는 젊어 좋겠다. 너는 어려 좋겠다."
"놔요!"
"병원에 오기 전 까지는 건강했거든. 멀쩡히 밭도 가꾸고 산책도 했단 말이야. 그런데 자식들이 버리고 간 뒤로 눈도 침침해지고..."
"놓으라니까! 놔!"
"병원이 사람을 죽여. 병원이. 돈 벌라고 일부러 안 놔주는 거야."
바쿠고가 있는 힘껏 손을 뿌리쳤다. 노인의 손이 침대 난간에 크게 부딪혔다. 그 충격 탓에 손을 잡는 힘이 약해져 떼어낼 수 있었다. 바쿠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병실 바깥으로 나왔다. 뒤에서 아가, 어딜 가니, 아가 이리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쿠고는 겁에 질려, 창백한 몰골로 단숨에 미도리야의 병실까지 뛰어들어왔다. 지나가는 간호사가 이상히 쳐다보았다.
미도리야의 병실에선 탈취제 향기가 났다. 집에서 쓰는 것과는 다른 향이었는데 아무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아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는 모친이 괜히 얄미웠다. 오히려 바쿠고를 알아채는 것은 미도리야다. 바쿠고의 입에서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갔다.
"뭘 봐 멍청아."
모친이 휙 고개를 돌린다.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너 집에가면 두고 봐. 두고 보라지.
바쿠고는 침대에 걸터앉아(얘 카츠키! 밑으로 안 내려와?! 괜찮아요. 내버려 두세요. 이즈쿠도 괜찮을 거에요., 저희 애가 아주 제멋대로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닌텐도를 꺼냈다. 손이 아직도 덜덜 떨렸다. 얼핏 보니 벌건 자국이 남아있었다. 바쿠고가 질겅질겅 입술을 씹었다. 미도리야가 물었다.
"캇짱.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짜증난 바쿠고가 대꾸했다.
"신경 꺼."
미도리야는 걱정스레 바쿠고를 물끄러미 보았다.
바쿠고의 모친은 미도리야의 어머니와 함께 잠시 병실을 나갔다. 눈치를 보던 미도리야가 물었다.
"캇짱. 과자 먹을래?"
"과자 있어?"
"응. 사람들이 사다줬는데 난 이런거 먹으면 안 된대."
"왜?"
"먹으면 몸이 더 아파진대. 그래서 병원에서 주는 것만 먹고있어."
"흐음."
바쿠고는 과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뜯었다. 침대 위에 과자 가루가 흘러내렸다. 미도리야가 베시시 웃었다.
"캇짱. 맛있어?"
"어."
닌텐도의 전원이 켜졌다. 바쿠고는 이미 깨도 열 번은 더 깼을 스테이지를 눌렀다. 미도리야가 공책과 연필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바쿠고 가까이에 붙었다. 옆에서 보는 시선이 신경쓰였지만 그렇다고 쳐내버릴 건 아니었고, 미도리야가 뒤집어 쓰고 있던 담요의 보드란 감촉이 좋아서 내버려두었다. 무엇보다 제가 이렇게 게임을 잘 한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와 캇짱, 잘 한다."
"당연하지. 내가 이거 몇 번을 했는데."
"저기 저 위에 있는 아이템도 먹을 수 있는거야?"
"이따가 보여준다."
"진짜 대단하다. 난 이런거 하나도 못하는데."
"너도 게임기 사서 해."
"음, 게임기."
미도리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책만 읽지 말고. 책보단 이게 더 낫지. "
"그런가? 아 캇짱. 앞에서 악당 온다!"
"알고 있다고."
게임속의 용사는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몬스터를 단숨에 무찔렀다.
미도리야가 옆에서 박수를 쳤다. "캇짱 정말 대단해. 멋있다."
바쿠고가 어깨를 으쓱였다.
.
..
...
"카츠키. 가자."
한창 게임을 하던 중에 모친이 바쿠고를 불렀다.
"아싸."
바쿠고가 닌텐도를 덮었다. 미도리야는 벌떡 일어서는 바쿠고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럼 다음에 또 들를게요. 아님 카츠키라도 보내던가."
"아오."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아니에요. 카츠키도 공부 해야할텐데."
"얜 친구랑 노느라 바쁘죠. 오히려 이즈쿠랑 함께 놀면 좋을걸요."
"아 나 병원 싫어."
"병원은 싫어도 이즈쿠가 있잖니?"
데쿠도 싫어, 라는 대답을 하기엔 아무리 그래도 눈치라는게 있었다. 바쿠고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카츠키 다음에 보자. 네에. 바쿠고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문 밖을 완전히 나서기 전에 뒤에서 미도리야가 다급하고 큰 목소리로 바쿠고를 불렀다.
"캇짱 다음에 또 봐!"
괜히 큰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또는 무슨. 병원에 대한 인상 자체가 최악이다.
"다신 안 와." 혀를 길게 빼 물었다.
*
"이즈쿠를 또 만나러 가는 건 어때?"
"엄마 나 숙제있어."
"숙제 금방 끝나잖아."
"내일도 숙제있어."
"거짓말 치고 있네."
"아 진짜거든? 왜 아들을 못 믿어."
"너 원래 숙제 금방 끝내잖아. 놀려고."
"금방 안 끝내면 되잖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모친이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심화수학책을 책가방에 집어넣고 거실에서 만화영화를 보고 있으니 전화가 걸려온다. 카츠키. 네 친구란다. 바쿠고가 단숨에 달려갔다. 어. 오늘 왜 못놀았냐고? 병원갔다왔다. 안 아파. 그 데쿠(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병실 갔다왔어. 어. 내일은 놀 수 있어. 숲에서 만나.
모친이 아들에게 눈을 흘겼다. 바쿠고는 모른채 했다. 그래. 건강만 해라. 우악스레 아들의 머리카락을 헤집은 모친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실 가득히 정의의 용사 주제가가 울려퍼진다. 바쿠고가 작게 따라불렀다.
*
학교 청소시간 걸레를 들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으려니 저쪽에서 담임 선생님이 다가오는게 보였다. 들러붙는 친구를 냉큼 밀어내고 열심히 바닥 닦는 척 했다. 선생님은 교실 앞에 서서 청소상황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바쿠고를 불렀다. 바쿠고. 조금 있다가 교무실로 와 볼래? 고개를 갸웃거리는 바쿠고에게 저만치 밀려나있던 친구가 다시 다가와 추근거렸다.
야 너 무슨 잘못했냐? 왜 교무실 가? 알게 뭐야.
또 시험 백점맞았나보지.
재수없어.
내가 시험 잘 보는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라고 그러냐.
넌 진짜 천벌 받을거야.
천벌이 무슨 뜻인지 알긴 해?
낄낄거리며 웃었다. 넘겼지만 그렇게 좋은 예감이 들진 않는다.
"바쿠고. 네가 이즈쿠 집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면서."
"네."
"선생님이 부탁이 있는데, 이즈쿠가 결석하는 날이 길어졌으니 네가 알림장을 전달해줬으면 해."
바쿠고가 입을 우물거렸다. 싫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 하는 모양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당근을 던진다.
"학교 끝나고 전해주면 될 것 같은데. 청소 안 하고 바로 갔다오면 되고."
"진짜요?"
"물론이지. 이렇게 심부름 보내는데 청소까지 시키면 안 되는 거지."
인심쓰듯 말 한다. 바쿠고가 찬찬히 제 이득을 재 본다. 청소는 일주일마다 당번이 바뀐다. 다음주는 화장실 청소였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는 질색이다. 바쿠고가 냉큼 대답했다.
"갈게요."
"잘 생각했어. 매일 갈 필요는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면 돼."
"청소는 매일 빠져도 되죠?"
"이놈 양심봐라? ...그래. 그렇게 해라."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바쿠고는 모친이 챙겨준 장우산을 들고 총총히 가방을 챙겼다. 친구들이 청소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방 챙기는 바쿠고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야 넌 왜 청소 안해?
난 안해도 돼.
그런게 어딨냐. 너 오늘 화장실 청소잖아.
안 해도 된다니까. 선생님한테 물어보던가.
선생님, 선생님. 바쿠고 왜 청소 안해요?
선생님이 심부름 시킨게 있어서 가야 해.
아 그런게 어디있어요! 학교 끝나고 가면 될 걸!
어허. 너희들 조용히 하고, 가서 청소해!
승리자의 고양감을 만끽하며 바쿠고는 당당히 교실을 나왔다.
*
병원도 몇 번 와 봤다고 이젠 익숙했다. 물론 어둑한 복도 뒤쪽으로는 두번다시 얼씬하지 않았다. 우산을 툭툭 털고 가방에서 알림장과 게임기를 꺼내어 알림장을 미도리야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저는 게임기를 들고서 침대 위에 편하게 자세를 잡는다.
미도리야는 기뻐했다. 알림장의 존재도, 저를 찾아와주는 친구의 존재도.
알림장을 찬찬히 살핀 뒤에 교과서를 보고 오늘 할 분량을(계획을) 갱신 한 뒤 슬그머니 바쿠고의 곁으로 다가왔다. 바쿠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거기 수납함에 있는 과자랑 음료수를 들고 오라고 말 했다. 과자는 항상 차 있었다. 미도리야가 어머니에게 부탁을 했는지 초록색 케이스의 새 닌텐도 박스가 침대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쿠고가 콧방귀를 뀌었다.
"너도 닌텐도 샀어?"
"으응. 엄마한테 부탁했어."
"게임팩은 있고?"
미도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바쿠고가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집에 있었던, 유행이 다 지나서 건드리지 않는 게임팩을 챙겨다 미도리야에게 알림장과 함께 던져주었다. 미도리야는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바쿠고를 올려다보았다. 데쿠. 너 가져. 정말? 정말 나 주는거야? 그럼 널 주지 여기 다른 사람이 어디있다고. 미도리야는 얼굴을 단숨에 붉힌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듯이 게임팩을 매만졌다.
"정말 주는거야? 정말...? "
혼잣말을 중얼중얼 하더니 게임팩을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캇짱. 진짜 고마워. "
괜시리 부끄러워진 바쿠고가 고개를 돌렸다.
"야. 고마우면 과자나 더 내놔."
바쿠고는 거리낌없이 미도리야의 병실에 쳐 들어와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신나게 게임을 하며 떠들다 갔다. 게임 그만하라 잔소리를 해대는 모친이 병원엔 없었기 때문에. 미도리야는 자신이 게임을 가지고 노는 것 보다 바쿠고에게 붙어 게임속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간호사들은 바쿠고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시끄럽고 일거리가 늘어난다면서.
쫒아내진 않았다.
3.
미도리야 이즈쿠는 발작을 앓았다. 발작엔 일정한 주기가 없었다. 그저, 점점 잦아진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언제쯤 고통이 닥쳐올 줄 알았다면 의사 선생님도, 미도리야의 모친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나절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기분 좋게 일어나자마자 미도리야는 온몸에 스며드는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위액을 게워냈다. 장장 두 시간동안 쉴 틈 없이 구역질을 했다. 병실에서 응급실로 실려가면서도 주어진 대야에 토악질 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식도와 목에 상처가 났다. 당분간 먹는 것은 미음과 죽, 물(혹은 링겔 수액으)로 해결하라는 처방에 모친이 비통스러운 듯이 아들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미도리야는 지친 얼굴로 제 몸 속을 샅샅이 훑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모친에게서 수학 수업을 받을 때에도 격통은 갑자기 칼에 찔리는 듯 찾아왔다. 대부분 처음은 명치께가 살살 아프기 시작해서 들불 번지듯이 고통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모친이 아들을 위해 준비한 극세사 보드란 시트가 닿기만 해도 칼침으로 이루어진 이불을 덮는 듯 아팠다. 누군가가 폐를 쥐어짜는 것 처럼 숨을 쉬는 것이 더없이 불편했다. 격통이 찾아오면 미도리야는 숨을 최대한 참았다. 그게 차라리 편했으므로. 갈비뼈가 몸의 내장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엄마. 아파. 너무 아파.
낑낑 앓으며 아프다 울면 오히려 건강한 모친마저 아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 아픈 척, 괜찮은 척 웃음을 짓다가 정말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아파오면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변기 옆에 누워서 덜덜 떨었다. 물론, 대부분의 시도는 간호사를 동행한 모친이 문고리를 부수고 들어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침대에 실려 돌돌돌 이동하면서 눈물자국 가득한 얼굴로 모친은 아들의 작은 손을 붙잡고 억지로 웃었다.
"엄마가 울까봐 안 아픈 척 하는거야? 이즈쿠.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엄마 안 울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해줘. 제발.
과도한 슬픔에 이명이 울리고 조그만 입 위에 산소호흡기가 씌어져 있음에도 모친은 가냘픈 미도리야의 말을 알아들었다.
엄마. 아파서 미안해.
응급실(수술실)의 문이 닫혔다. 모친은 닫힌 문 앞에서 허망히 아들의 말을 곱씹었다.
검사를 했다. 정말 많이 했다. 피를 하도 뽑아서 빈혈이 와 뽑았던 피를 다시 수혈해야 할 만큼. 촬영을 하도 많이 한 덕분에 담당 직원 모두가 어린 미도리야의 얼굴을 기억하고, 미도리야도 날짜별로 달라지는 직원들의 얼굴을 외울 만큼. 그러나 계절이 바뀌어도 병명을 알 수가 없었다. 희귀병이 아닐까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다. 당연히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 약이 좋을까, 저 약이 좋을까 시도를 해 보는 두 번째 담당 의사 덕분에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었다. 이제 약을 먹는다는 행위에도 더 이상 거부감이 들지 않아서, 간호사가 주는 약 꾸러미를 미도리야가 직접 받아들고 천천히 덧셈 뺄셈을 해 가며 나눈다. 모친이 챙겨주지 않아도 알아서 물과 함께 꿀꺽꿀꺽 잘 삼켰다. 낮이 바뀌고 밤이 바뀌어도 병원은 이렇다 할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도쿄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저희로서도 안타깝지만, 지방의 대학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친은 떨리는 손으로 녹차를 담은 종이컵을 어루만졌다. 초췌한 표정으로 얼굴을 끄덕였다. 살고있는 도시를 벗어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도쿄의 병원으로 간다면 외국의 의사들과 분명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거라고. 아드님께서도 분명 차도가 있을 거라고.
웃을 일 없던 모친의 얼굴 위로 서서히 그늘같은 웃음꽃이 드리웠다. 우리 아들, 나을 수 있는 거겠지요. 몇 달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미도리야 일가를 지켜본 의사는 애써 돌려 말했다. 확증은 할 수 없지만, 아마도.
모친이 담당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아들의 병실로 돌아왔다. 또래에 비하여 한참 조그만 체격의 미도리야가 수학 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문제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에 멍과 함께 자리한 주삿바늘 자국이 몇 개고, 연결된 링거가 몇 개인지. 모친은 아들의 옆에 앉았다. 문제를 풀던 미도리야가 고개를 들고 모친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아이. 내 뱃속에서 태어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 된 아이. 떨리는 손으로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주 마르고 작아서 금새 부서질 것 같은 몸을. 미도리야도 연필을 놓고 모친을 마주 안았다. 연필이 데구르르 굴러가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조금만 더 계산하면 풀 수 있을 것 같아."
미도리야는 따뜻한 모친의 품에 얼굴을 부볐다. 색색 내쉬는 숨이 가볍다.
"이즈쿠. 우리 도쿄로 가야 할지도 몰라."
"도쿄?"
"응. 도쿄의 병원으로 가면 네가 나을 수 있을거래."
"도쿄는 멀어?"
"그렇게 멀진 않아." 미도리야는 모친의 품을 벗어나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학교는?"
"더 이상 지금의 학교를 다닐 수는 없겠지."
미도리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학교 안에서 이름과 얼굴을 기억할 만한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 아마도 학급에 있는 친구의 이름보다 학급 안에 있는 책 이름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미도리야는 학교에 큰 애착이 없었다. 쉽게 납득한 미도리야가 책상 위의 연필을 찾았다. 손을 뻗다 잠시 멈추었다. 그렇다면 헤어져야 하는구나. 캇짱과.
*
미도리야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갔다. 개학 직후엔 그래도 걸리는 것이 있어서 아무도 앉지 않던 바쿠고 앞의 책상이었다. 가을의 초입 누군가가 무심코 앉아 급우들과 떠들어댔다. 그 아이는 나중에야 자신이 지금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미도리야의 책상에 앉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랬네. 그 깨달음이 다였다. 미도리야의 책상은 뒤편에 위치해 있어서 수업 시간 다른 행동을 하고 싶은 아이들이 번갈아 그 자리를 탐냈다. 물론 들키면 혼이 났다. 네 자리에 안 앉고 다른 곳에 앉아있으면 어떡해!
아이들은 호기심에 손 타지 않은 미도리야의 사물함을 열어보았다. 있는 것이라곤 낡은 운동화 한 짝 뿐이다. 그리고 그 사물함은 반의 각종 잡동사니를 보관해 두는 곳으로 바뀌었다. 윗부분이 사라진 리코더, 복도에서 축구를 하기 위한 용도의 슬리퍼, 다 찢어진 교과서, 금붕어 먹이, 미니 물뿌리개, 다 시든 화분 등등.
사물함 앞에는 분명히 '미도리야 이즈쿠' 이름이 적힌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 뿐이었다. 아이들은 주인이 부재한 교과서에도 눈독을 들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명색이 소꿉친구라 기억하는 바쿠고에게 양해를 구했다.
"야 바쿠고. 나 이번 시간에 교과서를 빼 놓고 와서 그런데 한 번만 빌리면 안될까?"
바쿠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흔적이 서서히 지워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사실, 그것의 의미를 깨닫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미도리야의 교과서는 다른 반 아이들까지 빌리러 왔다. 남은 책. 그렇게 불렸다.
어느 하늘 높고 한가로운 날 복도를 거닐던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음악책을 창가에서 발견했다. 단정한 글씨체로 이름이 적혀있던 교과서는 검은 먼지 투성이에, 낙서가 한가득이었으며 표지는 반쯤 뜯겨나가 없는 것이 마찬가지인 꼴이 되어 있었다. 저런 책도 있었구나. 그저, 그렇구나.
미도리야 이즈쿠는 모두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지워나갔다.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자신의 책상 위에 낙서를 하거나, 혹은 칼자국을 내서 자신이 이 곳에 앉았다는 흔적을 남기곤 했다. 때문에 선생님은 불호령을 하면서 책상을 정리하라고 안달을 냈지만 미도리야의 책상은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깨끗했으니까.
교실 뒤편에 작은 어항이 하나 놓여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모두가 관심을 갖고 예쁘다, 멋지다, 잘 돌보리라 약속했다. 두 마리 금붕어가 고운 지느러미를 흔들거리며 어항속을 돌아다녔다. 선생님은 밥을 너무 많이 주면 금붕어의 건강이 상해버린다고 말 했다. 아이들은 네에- 대답을 했음에도 서로가 자신이 밥을 줄 것이라며 매 시간마다 싸웠다. 천천히, 천천히 어항에는 녹조가 끼고 물을 갈아주지 않아 더럽게 변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물은 썩었다. 주말이 지난 날 학교에 와 보니 금붕어는 배를 하얗게 까뒤집고 물 위를 둥둥 떠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뜰채로 금붕어를 건져내어 화장실에 버렸다. 그 뒤로 어항에 물고기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바쿠고는 초록색 어항으로 시선을 주었다. 평소엔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으나 이상하게도 시선을 잡아서. 금방 관심이 사라졌지만.
*
병원에서 주는 밥은 맛이 없었다. 미도리야가 두어 수저 뜨다가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것을 바쿠고가 뺏어먹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그 끔찍한 맛에 얼굴을 찌푸렸다.
"데쿠. 넌 이런걸 매일 먹어?"
"먹으면 건강해진댔어."
"건강은 무슨. 이렇게 맛 없는 걸 먹었다간 없던 병도 생기겠다."
미도리야가 숟가락으로 맨 밥을 콕콕 찌르며 웃었다. 검은 콩자반을 노려보던 바쿠고가 물었다.
"넌 뭐 먹고싶은거 없어?"
"먹고싶은거? "
"어. 먹고싶은거."
음, 미도리야가 잠시 생각했다.
"햄 반찬 먹고싶은데."
"그거 말고."
"먹고싶은거 말 하라고 그랬으면서..."
"씨. 그거 말고. 피자나, 햄버거나, 그런거 먹고싶지 않아?"
"먹으면 안된다고 그랬는데. 건강 나빠진댔어."
"그거 다 거짓말이야. 우리 엄마는 잘 먹고 양치만 잘 하면 건강은 문제 없다고 했어."
미도리야가 눈을 굴린다.
"음, 그럼, 핫도그."
"핫도그? 그게 먹고싶어?"
"응. 가게에서 파는 팟도그. 케찹이랑 설탕 묻힌거. 그게 먹고싶어."
"흠."
고개를 주억거리던 바쿠고는 그 다음날 주섬주섬 빨간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냈다.
"캇짱. 그게 뭐야?"
"네가 먹고싶다며."
가방에 넣어 숨겨온 탓에 케찹이 온갖 곳에 다 묻은 핫도그였다. 미지근했다. 미도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음 음식을 보는 사람처럼 핫도그를 관찰했다. 먹어. 바쿠고가 선심 쓰듯이 미도리야에게 내밀었다. 미도리야는 나무 젓가락에 끼워져 있는 핫도그를 받았다. 케찹이 손바닥에 묻었다. 한 입 조심스레 베어물은 미도리야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맛있다."
"맛있지?"
바쿠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난 이런걸 매일 먹는단 말이야. 근데 넌 이상한 것만 먹고있잖아. 나한테 감사해 하라고."
"고마워 캇짱."
미도리야가 다시 한 입 크게 베어물었다. 안에 숨겨져 있던 소시지가 드러났다. 두 볼이 터질 듯이 입 안에 음식을 넣고 천천히 씹었다.
타코야끼, 오뎅, 초코우유, 딸기우유, 콜라, 당고, 주먹밥, 바쿠고는 병원에 찾아 올 때마다 재미 붙힌 것처럼 미도리야에게 먹고싶은 음식을 물었다. 미도리야는 그때 그때 생각나는 음식을 말했다. 물론 가방 안에 숨겨올 수 있는 것 만을 말해야 했다. 바쿠고가 숨겨오는 모든 음식들을 미도리야는 채 반도 남기지 못하고 남겼다. 남은 음식은 바쿠고가 먹었다. 사실 거의 다 바쿠고가 먹었다.
"맛 없어?"
"아니. 맛있는데 배 불러서 더 못 먹겠어."
"너 편식하는거 아니냐?"
"그런거 아니야."
바쿠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미도리야를 보다가, 기껏 사 왔는데 아깝게. 하고 말하며 남은 음식을 우적우적 입 안에 집어넣고 닌텐도를 꺼냈다.
"아, 카레먹고 싶다."
미도리야가 냉큼 바쿠고의 말을 따라했다.
"나도. 나도 카레먹고싶어."
"바보야. 그걸 어떻게 가져오는데."
"그러네. 가져 올 수가 없네."
"아. 카레 주먹밥 저번에 편의점에 있는 거 봤다. "
"그럼 그거 먹고싶어."
"넌 먹고싶은것도 많냐."
"만날 미안해. 캇짱."
그래도 굳이 카레 주먹밥을 사 온 바쿠고는 혀가 아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미도리야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야 이게 뭐가 맵다고 그래. 그리고 카레 주먹밥을 한 입 크게 베어물고 당당히 씹어삼켰다. 미도리야가 웃었다. 캇짱은 역시 대단하구나.
*
바쿠고는 쪽지 시험에서 백점을 맞았다. 선생님이 칭찬했다. 역시 바쿠고 답다고. 바쿠고는 붉은색 함박눈이 내린 시험지를 덜렁덜렁 들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짝이 물었다.
"야 바쿠고.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팩 살거지? "
바쿠고가 흘끗 반절은 틀린 옆 짝의 시험지를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지금 깨고있는 게임 있어."
"뭔데?"
"알아서 뭐하게."
"궁금해서 그래. 너 다 깼잖아."
"다시 깬다."
"왜?"
"아, 알아서 뭐하냐고!"
"거기 바쿠고랑 T타 조용히 해!"
"에이씨..."
바쿠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짝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쿠고를 노려봤다. 바쿠고도 마주 노려보았다.
집에 돌아와 시험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녁 준비를 하던 바쿠고의 모친이 시험지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었다.
"엄마. 아들이 백 점 맞아왔는데 표정 왜그래."
"엄마가 뭐 어떻다고? 우리 아들 백점맞았네~"
모친은 시침을 뚝 땠다. 바쿠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갖고싶은 게임팩 말해. 엄마가 시장 다녀오는 길에 사올게."
"갖고싶은거 없는데."
모친은 카레 냄비를 젓고 있던 국자를 놓치고 놀라운 듯이 아들을 뒤돌아보았다.
"왠일이래. 갖고싶은 게임이 없어?"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닌텐도 전원을 킨 바쿠고는 한참 세이브 데이터가 저장된 게임팩을 노려보았다.
"엄마."
"왜 아들."
"게임 말고 용돈으로 주면 안돼?"
"용돈?"
"어."
"어디다 쓰게?"
"..."
"아들 돈 뺏기고 다니는거 아니지?"
"아니야. 어떤 놈이 내 걸 가져가."
"하긴. 아들이 돈 뺏기면 그건 하늘이 놀랄 노릇이지."
"그냥. 먹고싶은거 사 먹고 싶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모친은 충격 받은 얼굴로 닌텐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들을 다시 돌아본다.
"엄마 밥이 맛없어?"
"아 그런거 아니라고. 그냥 요새 배고파."
"바깥에서 음식 사 먹는거 별로 안좋은데."
"엄마가 양치질만 잘 하면 된다 그랬잖아."
"어휴. 이놈의 입... 그래. 줄게. 대신 진짜로 양치질 잘 해야한다."
"내가 애야? 그런건 알아서 한다고."
"네가 애 맞지 그럼!"
*
제가 사온 크림빵을 우적우적 먹는 바쿠고를 앞에 두고 국어 문제를 풀던 미도리야가 깨달은 듯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아."
"왜?"
"그게, 아니. 캇짱 입에 크림 묻었어."
바쿠고가 손바닥으로 크림을 닦았다.
"그, 먹고싶은거 생각나서."
"뭔데?"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이더니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캇짱은 못 사와."
바쿠고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뭔데."
"아, 아니야."
"아 뭔데!"
목청이 올라갔다. 미도리야가 몸을 움츠렸다.
"그, 그거 가방에도 안 들어가는 거고..."
"됐고. 말 하라니까."
그, 미도리야가 몸을 쪼그린채로 망설이는 듯 눈을 깜박깜박 하더니 꼬옥 감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츠동..."
"가츠동?"
"응. 가츠동 먹고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가츠동..."
쯧. 바쿠고가 혀를 찼다. 그 까짓 거.
"안 먹어도 돼. 캇짱. 그냥 진짜 갑자기 생각 난거야."
"넌 문제나 풀어 데쿠."
미도리야는 시무룩해져서 입을 다물고 다시 국어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기 안의 용사가 체력을 다 까먹고 쓰러졌다. 그러나 눈은 화면에 있고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어서 깨닫지 못했다.
*
가츠동. 바쿠고는 힐끔힐끔 가게 이름과 밖으로 내어놓은 메뉴판을 보면서 휑한 길거리를 걸었다. 가츠동을 파는 가게는 많았다. 그러나 포장이 된다는 곳이 드물었다. 포장이 된다 싶어서 들어가면 한 그릇 이상을 사 가지고 가야하고. 수중에 있는 돈이 모자란다. 데쿠는 왜 하필 가츠동 따위를 먹고싶어하냐.
날이 서서히 가을의 중반으로 접어들어 해가 일찍 저물었다. 바람이 불었다.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면서 투덜거리며 걸었다. 전단지가 저편에서 날아와 얼굴에 부딪혔다. 바쿠고는 작게 욕을 하며 전단지를 떼어내 길바닥으로 버렸다. 저녁이 되자 네온사인 간판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주머니 안에 넣어놓은 돈 표면으로 손바닥의 열이 옮겨가 따뜻히 데워졌다. 붉은 색 가방을 매고 점퍼를 입은 바쿠고가 허름한 가게 앞에서 멈추어섰다.
돈부터 내미는 어린아이를 보고 늙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굴 주려고 하는거니. 바쿠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아니요. 아빠? 아니요. 그럼 누구? ... 친구? 친구 아닌데요. 노인은 더 묻지 않았다.
한참이 걸렸다. 가츠동을 사느라 평소보다 시간이 늦었다. 물론 계절이 바뀜에 따라 날이 저무는 속도가 빨라진 이유도 한 몫 했다. 가방이 묵직하다. 걸음이 큼직큼직해도 바쿠고 답지 않게 조심조심히 걸었다. 가방 안에 비닐로 꽁꽁 묶어놓은 음식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피곤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붉은 빛이 반짝이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내려오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했다.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7층 로비가 시끄러웠다. 평소엔 눈인사라도 해 주던 간호사들이 이리저리 전화를 해대느라 바빴다. 로비에 흘끔 눈길을 주고 익숙한 병실로 뛰듯이 걸어갔다. 문고리를 돌린다.
미도리야는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들의 발치에서 미도리야의 모친이 입과 울음을 틀어막고 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발작이 심했다. 미도리야는 허리를 튀틀고, 눈을 까뒤집으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이번 발작도 역시나 갑작스러웠다. 공부를 하던 미도리야가 수학책을 떨구었다. 링거 줄이 당겨져 손 등에 꼽혀있던 링거가 빠졌다. 피가 튀었다. 미도리야는 만지지 말라며, 아프다고, 온 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쳤다. 휘두르는 손에 커튼이 뜯겨져나갔다. 어린아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힘이 나왔다.
"아파, 아파요."
의사와 간호사들이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미도리야의 온 몸을 붙들고 내리눌렀다. 가는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여리한 몸이 찌그러질 것 같다. 바쿠고는 문 앞에 서서 그대로 멈추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병실 안의 다른 환자들도 얼어붙어 미도리야의 발작을 마냥 지켜보았다.
입고있는 병원복을 쥐어뜯고 저를 내리누르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발길질을 하고, 밀치고, 할퀴었다.
"하지마. 만지지 마."
미도리야가 흐느꼈다. 고개를 저으며 펑펑 울다가, 눈이 마주쳤다. 붉게 충혈된 녹색 눈과. 대책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도리야가 손을 뻗었다. 구원의 동앗줄을 잡으려는 듯 바쿠고에게 몸을 기울이다가 침대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버르적대며 어머니를 찾는 아이처럼 바쿠고에게로 기어가려 했다. 뻗은 손 끝이 애처롭게 덜덜 떨렸다. 얼굴과 몸이 붉었음에도 손 끝은 새하얗다.
"캇짱."
그 입에서 울음이 묻어 넘치는 목소리로 바쿠고의 이름을 불렀다.
"카츠키. 캇짱. 살려줘."
미도리야가 몸을 뒤튼다.
구해줘-
"캇짱, 카츠키이-"
절규와도 같은 울음이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바쿠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방 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돌덩이 같았다. 불편했다. 안절부절 못하던 간호사 하나가 바쿠고를 발견하고 재빨리 병실 밖으로 밀어냈다. 오늘은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넋을 놓고 질질 끌려나가던 바쿠고가 뒤를 돌아봤을 때엔 이미 병실의 문이 닫힌 후였다. 굳건히 문이 닫혔음에도 밖으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바쿠고는 귀를 틀어막았다.
*
새 게임팩을 샀다는 친구들이 바쿠고에게 몰려들어서 너도 이 게임 샀어? 하고 물어댔다. 바쿠고는 귀찮다는 듯 쳐냈다.
"안 샀다고. "
"너 백 점 맞았잖아. 그럼 너네 엄마가 사주지 않아?"
"이번엔 안 샀다고."
"그으래?"
단번에 이 골목대장에게 제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으스대기 시작하는 친구가 재수없고 얄미워서 가볍게 주먹질을 했다. 넘어져 엉어 우는 친구와 주먹을 꼭 쥔 바쿠고를 하필이면 교실로 올라오고 있던 선생님이 발견했다. 바쿠고는 수업 시간 내내 손 드는 벌을 받아야 했다. 친구는 씩씩거리며 바쿠고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스테이지를 깨지 못한 친구는 슬그머니 바쿠고에게 다가와 게임기를 내밀었다. 나 이거 못 깨겠어. 바쿠고 네가 좀 대신 깨 주라. 아 팔 아픈데. 내가 주물러 줄게. 바쿠고는 관심 없는 척 게임기를 받아들고 보스 스테이지까지 쭉쭉 나아간다. 친구는 입을 헤 벌리고 바쿠고의 손 안에서 신나게 두들겨맞는 보스를 보았다. 팔을 두드리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와, 바쿠고 넌 역시 대단해. 대단할게 뭐가 있냐.
캇짱은 역시 대단해.
돌연 바쿠고가 열심히 놀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야. 야 바쿠고! 친구가 다급하게 옆에서 불러댔다. 정신을 차렸다. 이미 용사의 체력이 반절이나 깎여나가 있었다.
기말 시험기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모두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의미에서 밥먹듯이 내 주던 숙제를 내주지 않았다. 아이들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알림장에 빈 공간이 가득했다. 바쿠고는 교실 늦게까지 남아서 빈 칠판을 바라보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숲으로, 오락실로 달려가던 친구들은 부모님들의 불호령으로 인해 학원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노을이 길게 진 하교길을 혼자 터덜터덜 걸었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시작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골목길 사이로 쓰레기통이 보인다.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까마귀와 투닥거리며 열심히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바쿠고는 잠시 멈춰섰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다 식은 가츠동을 전부 쓰레기통 안으로 쏟아버렸다. 바삭했던 튀김이 다 해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방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으로 올라가 방 안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래층에서 집에 돌아왔으면 손 씻고 발 씻고 양치부터 하라는 잔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이 났다. 베게의 귀퉁이를 잡아 머리를 감싼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깨냈던 보스 스테이지가 떠올랐다. 바쿠고는 병원에서 돌아온지 약 이주만에 자신의 닌텐도 전원을 켰다. 이미 두 번 올클리어를 끝마친 게임이 펼쳐졌다. 아무렇게나 스테이지를 선택하고 열심히 게임을 하다가, 그것도 지루해져 머리 옆에다 던져두었다. 패배를 뜻하는 음악이 울렸다.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재미가 없었다. 두 번이 올클리어를 했다는 것이 괜시리 짜증이 나 게임팩을 빼버렸다.
문득 처음 미도리야의 병실에 찾아갔을 때 했던 게임이 떠올랐다. 아직 보스 스테이지를 깨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는 미도리야에게 자랑을 하기 위해 이미 다 깬 게임팩만을 들고 갔었으니까. 서랍을 뒤졌다. 찾는 것은 없었다. 온 방 안을 뒤집어 놓아도 보스가 남아있는 게임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래층에서 바쿠고를 부르다 못한 모친이 열을 내며 아들 방문을 열었다가 그 꼬락서니에 기함했다.
"카츠키! 너 방이 왜 이래! 엄마가 열심히 청소해 놨는데!"
"엄마 내 게임팩 못 봤어?"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게임 하고 나면 제대로 정리 해 놓으랬지!"
"아 서랍에 없다고."
"그럼 네가 다른 곳에 놓은거 아니야?"
"다른 곳?"
"엄마한테 짜증내지 말고 다시 찾아봐. 밥먹기 전까지 이 방 전부 정리해 놓고, 지금 내려가서 손이랑 발 씻어."
곰곰히 생각하던 바쿠고의 머릿속에서 익숙한 장소가 떠올랐다.
닫히던 문, 뻗은 손, 그 곳 밖에는 없었다.
*
시간이 늦었다. 바쿠고의 모친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다. 바쿠고는 부엌의 동태를 잠깐 살피고선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신발을 신었다. 소리가 작게 나도록 문을 닫았다. 당장 지하철로 달려갔다. 깜박깜박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저편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역 안에서 나왔다. 바쿠고는 연어처럼 그 무리를 거슬렀다. 병원 앞에 있던 지하철 역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다행이다. 모아두었던 용돈 몇 푼을 들고 지하철 표를 끊엇다. 어린아이가 개찰구를 지나는 것을 역장이 유심히 지켜본다.
지하철이 덜컹거린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빛이 점점히, 그리고 선처럼.
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벌써 날이 캄캄해졌다. 병원 로비는 조용했다. 그 와중에도 구석에 있는 응급실에서는 의사와 구급차가 왔다갔다 시끌벅적했다. 시선을 잠시 빼앗겼다가 사람이 빠져나간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병실 안에서는 바깥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 아침도 이르게 맞이했고, 저녁도 이르게 맞이했다. 간간히 라디오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쿠고는 조심스레 미도리야의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미도리야는 얌전하게 침대 위에 누워있다. 여름 날 풀 숲 사이에서 독사과를 먹은 공주처럼 누워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못 보던 것이 있었다. 작은 얼굴 위로 짧은 관이 끼워져 있다. 그리고 옆에는 링거와 함께 기계가 하나 더. 급하게 온 지라 몰아쉬는 숨을 들키지 않도록 나누어 쉬면서 제 소꿉친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코에 끼워져 있는 관이 신기해 손을 뻗어 동그란 콧망울을 툭 건드려보았다. 미도리야가 살그머니 눈을 떴다.
병실 안의 불은 전부 껐으면서 블라인드를 내릴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건지, 침대 맡의 창문으로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밤에 보는 미도리야의 눈은 암녹색 빛이었다. 달빛이 물기에 반사되어 마치 밤하늘처럼 보였다. 작은 알갱이같은 것이 보였다고 생각했다. 반딧불이 처럼. 이리저리 빛났다. 미도리야가 빙그레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바쿠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지 않길래, 기다리고 있었어."
"코에 그건 뭐야."
바쿠고가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물었다.
"이거... 몰라. 끼고 있으랬어."
미도리야가 눈을 깜박이다 바보처럼 웃었다.
"코 간지럽다."
"캇짱. 게임팩을 두고갔어."
"알고 있어."
"엄마가 선반 위에 놨대."
바쿠고는 선반 위에 있던 게임팩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미도리야가 맑은 눈으로 바쿠고를 말끄라미 올려다보았다. 바쿠고는 그 눈을 피해 주머니 안의 게임팩을 만지작 거리다 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지껄였다.
"야."
"응 캇짱."
"나 몰래 나왔어."
"몰래?"
"원랜 집에서 공부해야 한단 말이야. 조금 있으면 시험이라 공부해야 한다고."
"으응. 미안해. 그럼 가야하지 않을까?"
"돌아갈 수 있겠냐? 우리 엄마한테 맞으면 엄청 아프다고."
"헤헤."
"뭘 웃어. 진짜야. 등에 손바닥 자국이 난다니까?"
미도리야는 대꾸없이 웃었다. 창백한 볼에 옅은 홍조가 드리웠다. 바쿠고는 발을 꾸물거리다 억지를 부렸다.
"야. 나 잠와."
미도리야가 바쿠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천천히 바쿠고의 말을 되새겼다.
"졸리다고."
그럼, 미도리야가 침을 삼켰다.
"그럼 여기 누울래? 내 옆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도리야는 무거운 몸을 옮겨 구석으로 붙었다. 침대 위에 두 아이가 누울 수 있을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신발을 벗고 미도리야의 옆에 누웠다. 초등학교에 진학 한 이후에는 아마 함께 누운 것이 처음 아닐까,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서 병원 천장을 보다가 고갤 돌렸다.
미도리야의 눈이 지척이었다. 바쿠고는 숲을 봤다. 여름날의 매미소리가 울리던 숲이 미도리야의 눈 안에 보관되어 있다. 나뭇잎이 스치는 사각소리가 들린 듯 했다. 별자리를 닮은 주근깨가 볼 안에 촘촘히 그려져 있었다. 손을 뻗어 말랑한 볼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푸석한 감촉에 놀랐다.
제 볼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미도리야가 가만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비춘 달빛은 이마부터 매끈한 원을 만들다가 서서히 밑으로 내려온다. 미도리야가 눈을 떴다. 바쿠고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별이 있어. 혹은 반딧불이가.
"야 데쿠."
바쿠고가 잠긴 목소리로 미도리야를 불렀다.
"응 캇짱."
"너 예쁘다."
네 눈, 예쁘다.
이제야 알았다. 눈꼬리가 풀어진 두 눈 안의 붉은 홍채를 한참 들여다보던 미도리야가 눈을 사르르 접었다. 둥근 뺨을 따라 눈물이 또르르 굴렀다. 미도리야는 기쁜 듯, 슬픈 듯 웃었다.
비어있는 바쿠고의 손을 잡았다. 바쿠고는 손 잡는 것을 싫어했다. 답답하다면서 미도리야가 손을 잡을라 치면 늘 먼저 쳐냈다. 훌쩍훌쩍 울면서 바쿠고의 옷자락을 잡고 졸졸 쫒아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망설이듯이 조심히 바쿠고의 비어있는 손바닥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바쿠고는 반응이 없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미약한 힘으로 바쿠고의 손을 잡았다. 바쿠고가 눈을 떴다. 슬쩍 시선을 돌려 미도리야의 손을 바라보던 바쿠고가 제 손을 움직였다.
아, 쳐내는구나.
예상했던 것 과는 다르게 바쿠고는 손을 빼 내고 오히려 자신이 미도리야의 손을 다시 잡았다. 깍지를 끼고 손에 힘을 주었다.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가 났다. 바쿠고의 것은 조금 빨랐지만 미도리야의 것은 조금 느렸다. 바쿠고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동안 미도리야는 들숨을 쉬었다. 때때로 잠에서 깼다. 입 앞에 손을 대 보고서 입김이 느껴지면 다시 내렸다. 미도리야의 등 뒤에 있는 기계가 일정한 그래프를 그렸다. 삑, 삑, 삑, 스산한 느낌의 기계소리가 울렸다. 미도리야는 금새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았다. 굽슬거리는 미도리야의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스쳐보다가 내려가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작게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새하얗게 빛나는 얼굴을 잠시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라며 깨어나서, 또 가슴 위에 손을 올려보고.
*
선생님은 청소시간에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바쿠고를 보고 화를 냈다.
"너 왜 벌써 가방을 챙겨? "
"선생님이 가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 아."
이윽고 장기결석생에게 생각이 닿은 선생님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바쿠고는 짝다리를 짚고 마룻바닥을 내려
보았다.
"그, 미안하다. 그래도 요샌 알림이 없는데 안 가도 되지 않을까. 너도 시험 공부 해야지."
바쿠고는 부루퉁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내가 미도리야에겐 말을 해 놓을 테니까. 알았지? 시험 끝날 때까진 안 가도 돼."
땅바닥이 일렁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줄도 몰랐다. 선생님은 바쿠고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버렸다.
재미가 없었다. 학교가. 하나도. 수업시간에 사각사각 연필을 놀리던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바쿠고에게 비밀 쪽지를 던졌다. 내용은 사소하게 학교 끝나면 몰래 숲 속으로 들어가 놀자거나, 간식을 먹자거나 하는 그런한 이야기들. 바쿠고는 심드렁히 그 쪽지들을 확인하고 앞으로 던졌다. 애꿎은 아이가 맞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딴 짓 한다 선생님에게 핀잔을 들었다.
야. 바쿠고. 나 이 문제를 모르겠는데.
멍청이냐. 그것도 몰라?
아 모를 수도 있지.
이건,
데쿠도 아는 건데. 말을 하려다 마는 바쿠고에게 앞에 선 아이가 멍청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했다. 짜증이 났다. 부글부글 속 안에서 끓었다. 됐어. 내민 공책을 밀쳐내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친구는 무어라 웅얼웅얼 거리다 앞을 떠났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까지 마친 뒤, 담임 선생님이 교실을 떠날 때까지 바쿠고는 교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펼친 알림장은 온전한 백지였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바쿠고는 가장 늦게 일어나 교실 문을 잠그고 하교했다. 힘없는 발걸음에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도 비명처럼 들렸다.
그 새 새 게임팩이 나왔다. 진열대 앞에선 최신 모니터에서 대마왕과 싸우는 용사의 모습이 풀 스크린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을 따라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던 바쿠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게임도 재미가 없었다. 뒤에서 아이들이 바쿠고를 불렀다. 무시하고 집으로 향했다.
숲에 금지 표시가 붙은 밧줄이 걸렸다. 주인 없는 숲인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가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자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숲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바쿠고 패거리는 숲에서 쫒겨났다. 입구에 숲지기가 들어섰다. 항상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왔다갔다리 하는 어린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모든 개구멍을 보수해 들어갈 수 있는 구석도 없었다. 바쿠고와 아이들은 그 숲 앞에 서 있다가 단념하고 공터를 찾았다. 길거리 신호등이 깜박였다. 붉은 색 신호가 켜진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바쿠고는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홀렸다고도 볼 수 있겠다. 초록색 그 자체에. 친구가 옆에서 건너지 않고 무얼 하느냐 툭툭 쳤다. 신호가 깜박였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멘트 가득한 길거리다.
버릇처럼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던 바쿠고가 들고있던 닌텐도를 주머니 안에 쑤셔넣었다.
"야. 나 오늘은 못 논다."
"뭐? 왜에? 오늘 c타 집에서 같이 게임하기로 했잖아."
"시끄러워. 못 논다면 못 노는 거야."
"새로나온 게임이라고. 야 카츠키 너 진짜 안 놀거야?"
"못 논다고."
바쿠고는 날카롭게 외치고 붉은색인 신호등을 건넜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
시험을 봤다. 동그라미 가득한 수학 시험지 뒷장을 돌렸다. 딱 한 개 날카로운 빗금이 그어져 있다. 단순한 계산 실수였다. 선생님은 과도하게 놀란 제스처를 취했다. 이번 일 등은 바쿠고가 아니라 다른 아이라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옆자리 짝이 바쿠고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히 말했다.
"야 네가 무슨 일이냐. 하날 틀리고."
무표정으로 시험지를 노려본다. 시험은 쉬웠다. 백 점을 놓쳤다. 일 등을 놓쳤고, 게임팩도 놓쳤다. 바쿠고는 시험지를 꼬깃꼬깃하게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선생님은 너희들 공부를 하긴 하는 거냐며, 오답노트를 써오라고 했다. 그게 숙제야. 바쿠고가 눈을 크게 뜨고 교탁 앞의 선생님을 보다 황급히 알림장을 펼쳤다. 공백이 가득한 종이 위에 까만색 비뚤배뚤한 글씨가 새기어졌다. 알림장을 가방 속으로 넣느라 시험지가 구겨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청소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냈다. 저편에 붙은 이름표 하나가 떨어질 듯이 달랑거렸다. 알게 뭐야. 신발을 신고 잠깐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하면서 달려나갔다. 담임 선생님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힘없이 최후의 버티기를 계혹하던 이름표가 떨어졌다. 바랜 이름이다.
병원으로 향했다. 떨리는 기색을 보이기 싫어서 최대한 걸음을 천천히 걸었는데도 금방 도착했다. 병원 로비는 시끄러웠다. 7층 로비도 적당하게 시끄러웠다. 빨간색 가방에 들어있는 알림장의 존재를 되새기며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없었다. 아무도. 적어도 바쿠고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에는.
텅 비어있는 침대를 바쿠고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발치에 걸려있던 이름표가 없었다.
수납장 위에 올려있던 과자와 음료수가 없었다.
항상 베게 옆에 놓여있던 교과서와 공책들이 없었다.
잘 때는 머리 맡에 올려두고 잔다던 필통이 없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옆 침대에 있는 아줌마가 TV를 보다가 바쿠고를 발견했다. 고개를 가웃거리다가 그 애, 도쿄의 커다란 병원으로 갔는데 못 들었냐고 물었다. 바쿠고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쿄로 갔어.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서 확실하게 방법을 찾으러. 저번주 즈음 갔는데 못 들었구나. 꽤 친해보이더니. 침대는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불과 환자복이 곱게 개켜져 구석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쿠고는 병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전부 그대로였지만 미도리야가 없었다. 그것 뿐이었다.
얼떨떨하게 병실을 나왔다. 복도 저쪽에서부터 침대 하나가 돌돌 바퀴를 굴리며 바쿠고 쪽으로 다가왔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모양새였다. 모친이 자주 보던 드라마에서도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바쿠고는 이불을 끝까지 뒤집어 쓴 침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비져나온 손이 덜렁였다. 검버섯 가득 피고 말라깽이 손을 본 적 있다. 부자연스런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은 손은 바쿠고를 사로잡은 채로 복도 귀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스치고 지나간 바람에서 아무 체취가 담기지 않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 흔적의 끝을 쫓으려는 듯 바쿠고는 복도의 어둠에 한참동안 붙잡혀 있다가 간신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럿다.
꾸욱 버튼을 누른 손가락을 떨구려던 찰나에 뒤에서 간호사가 바쿠고를 불렀다. 너, 얘.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르고 한참 올라오는 숫자를 보다가 얘, 너 714호 환자 친구?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걔가 이걸 주고갔어. 너한테 전해달라고."
간호사는 박스를 내밀었다. 받아들었다. 엄마에게 졸라서 샀다는 닌텐도 박스였다.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간호사가 가 보라며 손짓했다.
*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바쿠고는 초록색 닌텐도의 버튼을 눌렀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게임기가 켜졌다. 스테이지1도 다 깨지 못한 게임이 나타난다. 박스 안에는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준 게임팩이 전부 들어있었다. 하나 하나 꼽고 빼 가며 게임팩을 살폈다. 모든 게임이 스테이지 1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끔가다 2에서 주인공이 깜박거리는 게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거의 전부가 그랬다.
닌텐도를 껐다. 미도리야는 자신이 게임을 하는 것 보다 바쿠고의 옆에 붙어서 바쿠고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보는걸 더 좋아했다. 바쿠고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친구가 저를 찾아와준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기뻐했다.
애시당초 미도리야는 게임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
그 날 밤은 꿈을 꾸었다. 바쿠고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밖에 없었다. 초록색 녹음이 한창이었던 여름이었으니까. 매미 소리가 폭우처럼 내리꽂혔다. 바쿠고는 제 뒤를 따르는 탐험대를 전두지휘하며 걸었다. 맨 뒤에서 미도리야가 쫑쫑 따라왔다. 모두가 곤충 채집통과 잠자리채 하나씩을 들고 있었지만 바쿠고는 잠자리채 하나 뿐이었다. 바쿠고 몫의 채집통은 미도리야가 두르고 있었다.
바쿠고 탐험대는 뛰었다. 미도리야 또한 따라 뛰었다. 잔가지를 밟으며,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뛰었다. 모두가 사슴벌레, 사마귀를 잡겠다고 할 때 미도리야는 잠자리를 잡겠다며 뛰었다. 바쿠고는 꿈 속 미도리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비처럼 뒤었다. 폴짝 폴짝, 하늘 저 너머로 떠나가버릴 것 처럼 잔가지를 밟으며 잘도 움직였다.
아,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미도리야는 까진 무릎을 호호 불었다. 피가 주르륵 났다. 울먹이던 미도리야가 굳세게 눈물을 닦았다.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든다. 바쿠고는 미도리야 앞에 서 있었다.
건강하게 모두를 따라 뛰어다닐 수 있는 미도리야를 내려다본다. 손을 내밀었다. 둥그런 눈이 커져 바쿠고의 얼굴과 손을 왔다갔다했다. 그래도 바쿠고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그것이 저에게 내밀어진 손이라는 것을 깨달은 미도리야가 허둥거리며 잠자리채를 왼 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 바쿠고의 손을 잡았다. 손은 축축했다. 바쿠고는 그 손을 고쳐서 깍지 껴 잡았다.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불렀다.
"바-보."
"캇짱."
"바보- 데쿠이즈쿠."
미도리야는 제 이름을 듣고 활짝 웃었다. 흔들리는 녹음, 태양처럼, 푸른 여름과 같이, 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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